메뉴 건너뛰기

close

ⓒ 현대문학
영화 <아마데우스>로 잘 알려진 밀로스 포만 감독이 스페인 화가 고야(Francisco Jose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전기를 다룬 영화, <고야의 유령>(Goya's Ghosts)을 연출했다는 소식을 오래 전에 들었다.

이제나 저제나 개봉을 고대하던 차에 서점에서 동명의 소설을 발견하고는 망설임 없이 사들고 돌아왔다. 저자가 영화의 각본을 담당했던 밀로스 포먼과 장 클로드 까리에였기 때문이다.

흔히 흥행에 성공한 영화를 재구성하여 책으로 엮어내는 것과는 달리 소설 <고야의 유령>은 영화 작업과 출판을 염두에 두고 미리 써졌다고 외신은 전한다. 그래서 그런지 소설의 전개는 읽기에 막힘이 없다.

영화적 서사를 문학적 서사로 그려내고 있는 공동 저자들의 역량은 탁월하다. 영화 <프라하의 봄>, <양철북> 등의 시나리오를 집필한 최고의 작가 장 클로드 까리에의 문장과 거장 밀로스 포먼의 상상력이 빚어내는 앙상블은 아름답다.

영화와 소설-고야의 유령

▲ <고야의 유령> 영화 포스터
책을 읽는 중에 인터넷을 통해 영화 <고야의 유령>을 볼 수 있었다. 기대한 대로 영화는 우리의 눈길을 붙잡아두기에 충분하다. 다만 미디어가 전하는 것처럼 고야의 전기를 다룬 영화라기보다는 고야가 살았던 18세기 스페인의 사회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작자들은 로렌조 신부와 시대의 비극적 희생양인 아이네스라는 가공의 인물을 등장시켜 고야가 살았던 시대를 조망한다. 고야의 후기 그림들이 왜 그토록 기괴하고 우울해야만 했는지를 그들을 통해 깨닫도록 해준다.

18세기는 이성의 시대였다. 또한 도덕과 계몽의 시대였다. 1789년에 일어난 프랑스 대혁명은 인간의 존엄을 일깨우는 일대 사건이었다. 교회와 성직자의 타락은 더 이상 신에게 구할 것이 없음을 알게 해주었고 무능한 왕들과 사치와 향락에 빠진 귀족들의 전횡은 피폐한 삶에 허덕이는 민초들에게 결코 좌시할 수 없는 생존의 문제로 다가왔다.

자연과학의 발달과 식민지 개척으로 넓어진 민중들의 시야에는 온갖 부정한 것들이 크게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야가 살던 스페인은 아직 근대의 여명이 동터오지 못하고 있었다. 교회는 여전히 부패한 채로 권력의 중심이었고 무능한 왕정은 간신들의 손아귀에 놀아나는 실정이었다. 한때 무적함대를 앞세워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였던 스페인의 영화는 자취도 없이 사라지고 무자비한 폭정과 탄압, 전쟁으로 인한 혼란과 무질서가 극에 달한 유형의 땅이었다.

부패한 (카톨릭)교회는 치부와 권력유지의 수단으로 이단재판소를 이용하였다. 올바른 신앙을 수호한다는 기치를 내걸었지만 실상은 불순분자를 색출하여 가두는 마녀사냥터가 곧 이단재판소였다.

주인공 로렌조 신부는 바로 그 이단재판소의 책임자다. 첩자들로 하여금 이교도를 색출하고 심문(고문)하는 것이 그의 임무였다. 문제는 그가 신심을 가지지 못한 사악한 자라는 것이었고, 하필이면, 단지 돼지고기를 먹지 않았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앞에 잡혀온 아이네스(나탈리 포트만 분)가 너무도 아름다웠다는 것이다.

자신의 초상화를 부탁한 고야의 집에서 보았던 아리따운 초상화의 모델이 이교도의 혐의를 받아 잡혀온 것이다. 고문으로 발가벗겨진 그녀의 눈부신 나신 앞에서는 신의 권능도 무용지물인가, 그는 그녀를 범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딸의 석방을 위해 로렌조에게 뇌물과 수도원의 복원을 약속하며 탄원한다. 그러나 로렌조는 궤변으로 그의 부탁을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금지옥엽, 딸을 위해서 무슨 짓인들 못할까(자세한 과정은 독자들의 몫이다).

카메라는 궁정화가로서 왕비와 왕의 가족 등을 그리며 틈틈이 자신의 자화상이나 주문 받은 그림을 그리는 고야의 일상을 쫓는다. 유럽의 패권에 욕심을 낸 나폴레옹의 군대가 해방을 내세우며 스페인을 침공하는 장면들과 그 덕분에 감옥에서 풀려난 아이네스의 미친 문둥이 같은 몰골 그리고 로렌조의 아이를 낳았다는 비사들이 차례로 스크린을 채운다. 또한 사라졌던 로렌조가 프랑스군의 고위직이 되어 교회의 수장을 감금하며 복수하는 반전도 일어난다.

로렌조의 아이를 낳은 감옥에서의 시간에 정신이 멈추어진 아이네스를 위해 고야는 그 존재를 로렌조에게 알리고 백방으로 수소문한다. 그러나 야욕에 물든 로렌조에게 그 딸의 존재는 아예 인정할 수 없는 것이다. 수녀원에서 도망친 아이네스의 딸은 알리시아다.

겨우 이름만 알아낸 그 딸이 고야에게 발견된다. 제 어미를 쏙 빼닮은 외모를 고야는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다. 운명은 가혹하기만 한 것인지, 그녀는 공원에서 몸을 파는 창녀다. 영화의 서두에서 천사의 얼굴이 꼭 매춘부 같다는 타박이 왜 삽화로 등장하는지를 짐작케 하는 대목이다.

절대 왕정 때나 해방군을 빙자하여 입성한 점령군이나 민초들의 고혈을 빨아먹기는 매 한 가지다. 변한 것이 있다면 그저 당하고만 살 수 없다는 민초들의 각성이다. 마침내 민중봉기는 일어나고 페르디난드 7세의 왕정을 거쳐 때마침 나폴레옹의 독주에 위기의식을 느낀 주변국들의 결맹(신성동맹)에 의해 영국군이 포르투갈을 거쳐 스페인으로 진격한다.

프랑스군은 패퇴하고 로렌조 역시 도망치기에 바쁘다. 그 때만은 신은 있었던지 로렌조는 (죄인들이 쓰던) 뿔모자를 써야만 한다.

붓으로 그린 진실의 역사

▲ 고야의 대표작 중 하나인 사투르누스(그리스/크로노스). Saturn, 1820~1823, Oil on Plaster, Museo del Prado, Madrid
ⓒ cgfa.sunsite.dk
프랑스군의 스페인 침공과 귀머거리가 된 후의 고야의 그림들은 일대 전환점을 이룬다. 전쟁과 살육, 교회의 타락과 권력의 무능과 부패에 환멸을 느낀 고야는 고향 근처에 칩거한다.

그 당시 고야가 살았던 고야의 집을 사람들은 '귀머거리의 집'이라 불렀고 그는 그 집의 벽면에 소위 '검은 그림'들이라 불리는 벽화를 그린다. 온통 마녀와 미치광이, 악마의 표정으로 울부짖는 민초들이 장식한 음산한 벽면은 전쟁의 참상을 목격한 고야의 우울한 영혼이다.

이념의 범주로 가둘 수 없는 화가 고야는 평생 1870점이라는 방대한 작품을 그렸다. 로코코 시대의 회화에서부터 왕가와 귀족들의 벽면을 우아하게 장식해주었던 양탄자 데생과 그림, 신의 은총과 구원은 어디에도 없던 부패한 교회와 타락한 성직자, 사악한 인간의 본성과 광기를 고발하고 있는 '변덕' 같은 일련의 동판화집 등등 그의 화풍과 그의 그림이 드러내고자 한 정신을 누구도 한 마디로 정의할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비록 그가 궁정화가 신분으로 왕이 주는 연금과 귀족들의 주문으로 벌어들이는 수입에 의존하여 그림을 그렸지만 그의 정신만큼은 어떤 권위와 상징으로도 강제할 수 없는 자유주의자였다는 사실이다.

또한 여전히 죽은 신의 교리와 가짜 신성에 신음하던 조국 스페인에서 일찍이 이성의 합리와 사유를 신봉한 선각자였다. 그는 (내세의 구원을 앞세운) 신성마저도 그것이 인간의 존엄을 억압하는 것이라면 단호히 거부해야 한다고 믿은 올곧은 휴머니스트였다.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를 펴낸 박홍규 교수(영남대 법대)의 말처럼 "괴물을 쫓아내기 위해 괴물을 그린" 거의 유일한 시대의 반항아였다. 어떤 이념과 이상을 빙자해서도 그 수단이 전쟁과 같은 폭력이라면, 그 시대의 율법과 교리는 받아들일 수도 받아들여서도 안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살육과 부패와 광기로 얼룩진 그 시대의 현장에 늘 있었고 그 참혹한 역사의 얼굴을 그대로 그려내었다. 그의 붓이 역사를 기록한 그 어떤 사관의 펜보다 진실하고 강한 까닭이 여기에 있다.

고야를 알리고 배우기에 이 지면은 고통스럽다. 그렇다고 영화와 소설의 모티브가 되었음직한 몇 점의 그림을 소개하는 것마저 생략하자니 그것은 더욱 안타깝다. 고야의 예술은 마치 기다란 심지를 가진 폭죽과 같아서 먼 후대의 예술에 밝은 빛을 뿌렸다.

밀로스 포만이 굳이 <고야의 유령>이라 이름 지은 것은 아마도 우리가 사는 오늘 역시 타락한 신성과 죽은 이성에 병든 것은 매양 마찬가지라는 사실을 지적한 것은 아닌지 문득 그런 확신이 든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U포터, NCN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임흥재 기자의 블로그 http://blog.naver.com/epogue21/100035985083 

*고야의 유령/밀로스 포먼 외/이재룡 역/현대문학/9500원
<참고서적>
*야만의 시대를 그린 화가, 고야/박홍규 저/소나무
*프란시스코 데 고야-내 손안의 미술관 08/엘케 폰 라치프스키 저/노성두 역/랜덤하우스


고야의 유령

밀로스 포먼.장 클로드 카리에르 지음, 이재룡 옮김, 현대문학(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