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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학계에 린위탕열풍이 몰아치면서 린위탕과 관련된 많은 도서들이 출판되고 있다.
중국학계에 린위탕열풍이 몰아치면서 린위탕과 관련된 많은 도서들이 출판되고 있다. ⓒ 김대오
린위탕(1895.10.3∼1976.3.26)의 인생역정은 참으로 독특하다. 푸지엔(福建)성 롱시(龍溪)의 가난한 목사 집안 출신인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난 린위탕은 초등학교에서 대학까지 모두 기독교학교에 다니며 서양식 교육을 받는다. 상하이의 성 요한대학을 졸업하고 칭화(淸華)학교에서 영어교사로 3년 일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다시 독일 라이프치히대학에서 언어학박사학위를 받는다.

귀국 후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베이징사범대학 등지에서 강의를 하며 1927년에는 정치활동도 잠시 한다. 이후 좌우의 이념적 대립에서 벗어난 자유주의적 성향의 문학활동을 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간다.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뉴욕타임즈> 특별기고가로 활동하는 등 중국에 관한 많은 평론을 발표한다. 영화 <뮬란>은 할리우드에서 만든 작품이지만 효(孝)를 바탕으로 하는 가족의 확대가 곧 충(忠)을 강조하는 국가로 연결되는 중국사회의 일면을 정확하게 간파한 영화이다. 왠지 린위탕이 설파한 중국에 관한 글들이 이 영화에 잘 녹아 있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가 말하는 서구의 물질주의와 소외를 극복하기 위해 제시한 유교적 가족주의의 한 형태를 영화<뮬란>에서 보는 듯하기 때문이다.

1937년 펴낸 저서 <생활의 발견>은 그의 이름을 서양세계에 알리며 '린위탕 붐'을 불러오기도 한다.

린위탕은 1948년 유네스코 예술부장에 선출되고, 1954년에는 싱가포르 난양대학 총장을 역임하기도 하며, 1958년, 1966년 대만을 방문하고, 1968년, 1970년에는 한국에서 강연을 하기도 한다. 1972년 병약한 몸으로 '현대 중영사전'을 편찬한다.

1975년 저서 <경화연운(京華煙雲)>으로 노벨문학상 후보에 오르기도 했으며, 1976년 3월 26일 홍콩에서 타계했다.

"연설과 치마 길이는 짧을수록 좋다"는 명언과 "미국식 난방이 된 영국 별장에서 일본인 부인과 프랑스 애인과 중국인 요리사와 함께 살고 싶다"는 해학에서 볼 수 있듯이 린위탕은 중국어에 '유머' 라는 말을 '여우모(幽黙)'로 처음 사용한 작가답게 삶의 풍류와 멋을 즐기며 새로운 자유를 향유하는 삶을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물에 빠진 개는 더 두들겨 패야 한다"며 군벌과 봉건적 폐해에 대해서 페어플레이를 뒤로 미루고 더욱더 철저하게 투쟁해야 한다는 루신의 논리는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충분히 린위탕을 설득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중국의 상황은 많이 달라져 있고 중국인들은 린위탕이 추구한 여유와 멋을 추구하고자 하는 듯하다.

그러나 몸은 중국을 떠나 자신의 호화주택과 화려한 생활 속에 머물며 아득한 추억 속에 떠오르는 중국에 대한 편린들로 중국의 문화를 서양인들에게 소개한 린위탕의 한계는 분명 존재한다. 중국의 실상을 제대로 경험해보지 못한 그가 중국문화에 대해 갖는 향수와 그리움은 어쩜 서양인이 동양에 대해 느끼는 일종의 '오리엔탈리즘'인지도 모른다.

린위탕의 풍류는 현재 물질적 풍요를 이룩한 부유한 중국인들이 꿈꾸는 삶이 될지 모르지만 멋과 재미만을 추구하고 시대적 사명에는 용기 있게 대답하지 못했다는 비판으로부터는 그 또한 영원히 자유로울 순 없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국정브리핑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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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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