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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레지
얼레지 ⓒ 안준철

얼레지
얼레지 ⓒ 안준철
얼레지라는 예쁘고 다소 이국적인 이름을 가진 꽃이 있습니다. 꽃 모양도 이름만큼이나 예쁘고 우아하지요. 백합과의 여러해살이풀로 두 장의 잎이 마주보는 것처럼 달리는데 3~4월에 잎 사이에서 나온 꽃줄기 끝에서 자주색 꽃이 한 송이씩 아래를 향해 피어납니다. 그 모양이 마치 머리를 뒤로 올린 성장한 여인을 연상케 하지요.

비유가 그럴 듯할지 모르겠지만 혼인식을 마친 신부가 초야를 치르기 위해 고개를 숙인 채 다소곳이 앉아 있는 모습이랄까?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신랑은 밤새 나타나지 않고 신부 혼자서 꼬박 밤을 새우고 맙니다. 옷을 벗겨주고 머리를 풀어줄 신랑이 없으니 혼인식을 치른 그 모습 그대로 말이지요. 곱고 단정한 꽃을 앞에 두고 왜 이런 슬픈 상상을 하는 걸까요?

그것은 얼레지라는 꽃이 예사롭지 않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예사롭지 않다! 그렇습니다. 그 표현이 딱 어울리는 꽃이 바로 얼레지입니다. 땅을 바라보며 피어 있는 그 자태가 정말 예사롭지 않습니다. 뒤집어 까듯 뒤로 젖혀진 꽃잎의 모양도 그렇거니와 핏자국처럼 진한 자주색 암술과 수술이 그런 분위기를 더욱 부추깁니다.

얼레지
얼레지 ⓒ 안준철
만약 얼레지가 산골짜기에 피어 있지 않고 화단이나 화병에 꽂혀 있었다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도회지에서 만난 아름다운 여인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스쳐 지나가듯 말입니다. 그녀를 만난 곳이 산길이요, 그것도 평소 다니던 길에서 조금 떨어진 외딴 곳이기에 차마 발길을 돌릴 수가 없었던 것이지요. 이런 말도 안 되는 엉뚱한 상상을 하면서 말입니다. 나마저 모른 채 하고 가버리면 누가 저 머리를 풀어주지?

얼레지라는 꽃 이름을 처음 안 것은 사오년 전의 일입니다. <김해화의 꽃 편지>로 유명한 김해화 시인의 사진첩 속에 핀 꽃을 본 것이지요. 그림 같다고나 할까요? 아니면 세상에 실재하지 않는 환상 속의 꽃이라고나 할까요? 얼레지를 처음 보았을 때 제 느낌이 그랬습니다. 그 그림 같은 사진, 혹은 제 환상 속에서만 피어 있던 꽃을 직접 본 행운을 얻은 것은 이태 전이었습니다.

얼레지
얼레지 ⓒ 안준철
그날도 어제(25일)처럼 벗들과 산길을 가다가 우연히 얼레지꽃을 만난 것입니다. 땅을 향해 피어 있는 꽃 모양이 사진 속의 꽃과 흡사했습니다. 하지만 군락을 지어 피어 있는 모든 꽃들이 사진 속의 꽃처럼 예쁘지만은 않았습니다. 더욱이 땅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으니 숨겨진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무릎을 꿇고 눈높이를 낮추어야만 했습니다.

어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얼레지 앞에서 몸을 낮추고 무릎을 꿇은 것은 꼭 사진을 찍기 위해서만은 아니었습니다. 그녀가 간직한 숨은 아름다움을 만나기 위해서는 몸을 낮추고 마음을 낮추는 최소한의 예의를 갖추어야만 했습니다. 아니, 그러고 싶었습니다. 해서 일행을 먼저 내려 보내고 아예 땅바닥에 주저앉아 사뭇 오랫동안 눈을 맞추었습니다.

산을 내려와 집에 와 보니 나를 맞이하는 아내의 표정이 여느 때와는 달랐습니다. 저 혼자만의 생각이었는지는 몰라도 아내가 좀 외로워 보였습니다. 산을 가도 늘 함께 가곤 했는데 이태 전부터 한 달에 한 번꼴로 산악회 회원들과 함께 산을 가다보니 아내에게 조금은 미안한 마음이 들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동천에 핀 벚꽃
동천에 핀 벚꽃 ⓒ 안준철

나비와 꽃
나비와 꽃 ⓒ 안준철
저는 배낭을 내려놓고 사진기만 챙겨 든 채 아내와 함께 다시 집을 나섰습니다. 아내와 늘 다니던 동천에 벚꽃이 막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아직 제철이 아닌데도 이미 두세 그루의 나무는 꽃이 만개하여 절정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아내를 위해서 이삼일 먼저 꽃을 터뜨린 것이 아닌가 하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기도 했습니다.

마가레트
마가레트 ⓒ 안준철

광대나물과 새순
광대나물과 새순 ⓒ 안준철

목련
목련 ⓒ 안준철
봄 햇살이 참 따듯했습니다. 철이 조금 이른 꽃들을 둘러본 뒤 아내의 손을 잡고 징검다리를 건너 다시 집으로 돌아오면서 문득 얼레지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아내 생각도 했습니다. 아내의 손을 잡고 걸으며 마치 멀리 있는 사람을 그리워하듯 아내 생각에 잠겨보는 것도 나쁘지만은 않았습니다. 평생 아내를 외롭게 하지 말아야겠다는 철든 소년 같은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아내와 둘러본 봄에 핀꽃들
아내와 둘러본 봄에 핀꽃들 ⓒ 안준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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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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