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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호에서 바라본 노고산
대청호에서 바라본 노고산 ⓒ 김유자

오늘(19일)은 직동 마을 동쪽에 있는 대전광역시 기념물 제19호 노고산성을 가려고 아침 일찍 집을 나섰습니다.

이곳이 얼마나 처절한 싸움터였을까. 마을 이름마저 피골이라고 부르만큼 백제와 신라가 접전을 벌였던 직동마을. 그러나 지금의 직동 마을은 평화롭기만 합니다. 마을 앞 대청호수가에 늘어선 버드나무 숲은 새순을 틔우느라 홀로 바쁠 뿐 낯선 길손을 경계하는 개짖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습니다.

마을 앞 3거리에서 우측으로 난 길을 따라 마을 동쪽에 있는 노고산으로 올라갑니다. 산으로 오르면서 힐끔 산꼭데기를 한 번 쳐다봅니다. 삼국시대에 쌓은 노고산성은 해발 250m의 노고산 산봉우리에 위치하고 있는데 마을에서 올려다 보면 성터 중간에 있는 할미바위가 보인답니다.

남문지 좌측의 석축. 남아있는 성벽중 가장 양호한 성벽입니다.
남문지 좌측의 석축. 남아있는 성벽중 가장 양호한 성벽입니다. ⓒ 김유자

남동쪽 석축. 석축 바로 앞에 꽤나 큰 화살나무가 서 있습니다.
남동쪽 석축. 석축 바로 앞에 꽤나 큰 화살나무가 서 있습니다. ⓒ 김유자

남아있는 서북벽. 응달에 있어 파랗게 낀 이끼가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남아있는 서북벽. 응달에 있어 파랗게 낀 이끼가 세월을 말해주는 듯 합니다. ⓒ 김유자

남문지를 통해서 성터로 들어 갑니다. 이곳은 지금도 산성으로 진입하는 통로로 이용되고 있으니 석축은 허물어졌지만 그 기능만은 살아 있는 셈이지요.

남문지 왼쪽엔 약 7~8m가량의 석축이 남아 있습니다. 자연 암석을 최대한으로 이용해서 쌓았는데 자연할석의 바깥면을 맞추어 쌓았습니다. 석축의 높이는 제 키보다 약간 낮습니다.

남문지의 오른쪽 남동벽에도 거친 성돌을 사용해서 조잡하게 쌓은 석축이 조금 남아 있습니다. 남동벽 바로 앞에는 노박덩굴과의 낙엽관목인 화살나무 한 그루가 서 있습니다. 화살나무는 가지 끝에 날개가 달려 마치 화살처럼 보이는 나무지요. 가을에 꺾꽂이 재료로 쓰이기도 합니다. '혹시 죽은 옛 병사의 넋이 화살나무로 환생한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다가 얼른 지우고 말았습니다.

서북쪽에도 약간의 성벽이 남아 있습니다. 그 성벽 옆엔 커다란 생강나무가 노란꽃을 흐드러지게 피워내고 있습니다. 생각나무 꽃이 이 밋밋한 산성에 풋풋한 무늬를 만들어 냅니다.

남서쪽으론 계족산성과 이현동산성이 있고 남동쪽으론 마산동산성, 북쪽으론 성치산성이 가까이 있어 노고산성과 서로 유기적인 관계를 맺고 있는 듯이 보입니다.

노고산성(老姑山城)에 대한 한자 표기

산성에서 내려다본 우피골 마을
산성에서 내려다본 우피골 마을 ⓒ 김유자

성 북쪽에서 본 할미바위. 멀리 계족산성이 보입니다.
성 북쪽에서 본 할미바위. 멀리 계족산성이 보입니다. ⓒ 김유자

성터 중간엔 할미바위가 우뚝 솟아 있습니다. 대전 향토사료관 <지명의 유래>라는 항목은 할미바위에 유래에 대해서 “모양이 할미처럼 생겼다고 ‘할미바위‘라고 부르기도 하며, 노고할머니가 명주치마에 돌을 담아 쌓았다고 붙인 이름이라고도 한다.”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왠일인지 저는 처음 이 산에 와서 할미바위를 봤을 때부터 제법 크고 웅장한 이 바위와 할미바위라는 이름과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습니다.

노고산이란 이름은 우리나라 곳곳에 많이 있습니다. 서울에도 노고산동이 있습니다. 이재권이 쓴 <서울의 전래동명>이란 책은 노고산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합니다.

서강대학교 뒷편에 있는 노고산의 이름에서 연유한 것으로 북(鼓)이 화가 났다는 말이 되는데 이것은 전투가 벌어 졌을 때 신호수단으로 북을 울리는데 둥둥둥 울리는 북소리를 북이 화가 났다는 뜻으로 표현한 것이다.

북이라는 말을 표현함에 있어서 노고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이러하다. 만약 북을 의미 한다는 뜻으로 그냥 고산이 라고 썼다면 이것은 높은산 이라는 高山으로도 해석할수 있으며 또 북산으로 썼다면 동서남북의 북(北)과 혼돈할 수 있기 때문이라 하겠다.


제가 볼 땐 서울 노고산동에 대한 설명을 이곳 노고산에 대한 설명으로 원용해도 별 무리는 없을 것 같습니다. 북이 화가 났다는 의미인 노고(怒鼓)의 의미가 세월이 흐름으로써 차차 뜻이 왜곡돼 할머니로 잘못 해석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따지고보면 노고(老姑)의 의미도 늙은 시어머니라는 뜻이지 그냥 할머니라는 뜻은 아니지요.

북이 노했다 해서 노고산(怒鼓山)이 맞을까요? 아미면 할미바위가 있다 해서 노고산(老姑山)이 맞을까요?

할미바위  틈으로 내려다본 대청호
할미바위 틈으로 내려다본 대청호 ⓒ 김유자

ⓒ 김유자

ⓒ 김유자

성에서 바라본 대청호 동남쪽 풍경. 제일 뒤쪽에 있는 산이 옥천 장용산입니다.
성에서 바라본 대청호 동남쪽 풍경. 제일 뒤쪽에 있는 산이 옥천 장용산입니다. ⓒ 김유자

노고산성은 제 부질없는 물음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습니다. 아직 연혁이 짧은 대청호는 이런 이야기가 무척 고리타분한 모양입니다. 날이 개었다 흐렸다 하기 때문일까요? 오늘 바라보는 대청호는 평소보다 푸르게 보이지 않습니다. 날씨가 맑아서 시계가 좋은 날은 이곳에서 멀리 옥천- 문의간 도로도 볼 수 있습니다.

아마도 노고산성은 가까이 있는 금강의 수로를 지키고 옥천이나 문의 쪽에서 침투해 오는 적을 감시하던 역할을 하던 계족산성의 전초기지가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희망의 씨앗이 숨겨진 역사의 기억창고

성곽은 힘들고 고된 노역의 결정체이며 자신과 자신이 속한 나라를 위하여 싸웠던 수많은 사람들의 피와 땀이 서려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합니다. 성곽에 목숨을 의탁하고 적과 싸우던 병사들에겐 성이야말로 삶의 보루이자 희망이었을 것입니다.

시간은 많은 것들을 소멸시키고 말지만 삼국시대에 쌓은 저 산성만은 아직도 역사의 창고로 남아 있습니다. 산성에 와서 역사의 창고를 뒤지는 것은 아마도 옛 사람들이 품었던 희망의 씨앗들이 만나고 싶기 때문일 겁니다. 성이 무너지는 최후의 일각까지도 끝내 놓치지 않았을 삶의 끈 같은 것 말입니다.

대청호를 바라보며 서 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우군처럼 호수로부터 봄이 스물스물 기어올라오고 있습니다. 성 터엔 생강나무 꽃이 화사하게 피어나고 진달래꽃도 벌써 망울을 맺고서 여차하면 피어날 채비를 갖춘 듯 합니다. 저 진달래는 제 더욱 마음이 깊어지길 기다렸다가 툭, 하고 망울을 터트려서 천지간에 자신만이 가진 향을 피우겠지요. 문득 도종환 시인의 '산벚나무'라는 시를 읊조리고 싶어집니다.

아직 산벚나무 꽃은 피지 않았지만
개울물 흘러내리는 소리 들으며
가지마다 살갗에 화색이 도는 게 보인다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
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
묵묵히 그것들의 한복판을 지나왔을 뿐이다
산벚나무가 그러듯이
겨울에 대하여
또는 봄이 오는 소리에 대하여
호들갑떨지 않았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고 경박해지지 않고
길이 보이기 시작한다고 요란하지 않았다
묵묵히 묵묵히 걸어갈 줄 알았다
절망을 하찮게 여기지 않았듯
희망도 무서워할 줄 알면서*

* 마지막 행은 루신의 글 <고향>에서 인용
-도종환 시 '산벚나무 ' 전문


"나무는 희망에 대하여 과장하지 않았지만/절망을 만나서도 작아지지 않았다"라는 구절을 읊조릴 때마다 언제나 마음이 뜨거워집니다. 그냥 "담담하게 살았다"라고 해도 되었겠지만 만일 그렇게 표현했다면 이렇듯 생생하게 마음에 와 닿지는 않았을 테지요.

올 봄 저도 시인이 보았던 그 나무처럼 살아야겠다고, 아니 삶과 희망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적과 싸웠을 삼국시대의 병사처럼 살아야겠다고 마음을 다지며 서서히 산성을 내려 갑니다.

덧붙이는 글 | ☞찾아가는 길 

신탄진→대청호 보조댐→ 검문소 삼거리 우측 길→효평동 삼거리에서 좌회전→직동마을 노고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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