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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대 바로 앞 대기석 모습. 동양에서 온 아이들은 외모에서 우선 뚜렷하게 구분이 된다.
ⓒ 이상직
"아빠∼∼"를 불러대는 아이 목소리가 오늘따라 심상치 않다. 예상했던 대로 아이는 무엇엔가 골이 나 있다. 차근차근 물어보니 화를 낼 만도 했다. 자신의 얼굴은 친구들에 비해 옆 모습에 볼륨이 없다는 것이 오늘 우리 딸 아이가 화를 낸 이유다.

두 번째 이유는 다소 생경하다. 피아노, 춤, 노래 모두 잘할 자신이 있는데, 왜 하필이면 학예회에서 리코더를 불어야만 하는지 이유를 모르겠다는 것이다.

유인물 한 장

이야기의 발단은 지난 4일 아이가 유인물 한 장을 달랑 가져온 날로 돌아간다.

친애하는 부모님!

대강당에서 연례 음악의 밤이 개최되니 오는 15일 목요일 밤 7시까지 부모님은 부디 참석하시어 학생들이 그동안 준비한 공연에 격려 아끼지 말아주십시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도 이런 행사가 있었던 것이 기억났다. 당시, 아이는 또래 친구들이 군무를 하고 수준 낮은 합창을 준비하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보더니 코웃음을 쳤었다. 피아노와 노래에 재능을 보이는 아이를 또래 친구들이 알아보고 합창반에서 함께 노래하자며 졸라대던 것을 한사코 거절하며 야릇한 만족감에 사로잡혔던 아이다.

총 리허설과 리코더

공연이 있기 이틀 전인 지난 13일 아이가 집으로 돌아와 한참을 쉬더니 리코더를 챙겨 집을 나선다. 총 리허설이 있는데 자신은 리코더를 하기로 했단다.

아이는 올해 4년째 이 학교에 다니고 있다. 애초 레바논에서 1년 외국 학교를 경험한 뒤 이곳 아부다비로 왔을 때는 미국 학교에 등록할 계획이었다. 최소한 6개월은 기다려야 자리가 날지도 모른다는 말에 어쩔 수 없이 차선책으로 이 학교를 다니게 되었지만.

지난해 합창반원들에게 한껏 배짱을 부리더니 합창반이 중심이 되어 준비한 올해 행사에서는 오리알 신세를 면할 길이 없었나 보다. 레바논과 유럽에서 온 아이들 몸매를 도저히 따라갈 자신이 없는 우리 아이가 발레 수업을 위해 몸에 꽉 끼는 무용복을 입을 리가 없으니 무용반 아이들과도 전혀 어울리지 못했다.

▲ 듀엣으로 노래를 부르고 있는 7학년 쉐나니와 시바
ⓒ 이상직
뮤직 콘서트

행사 당일 아이를 먼저 보내고 어스름 저녁 시간인 7시가 조금 못된 시각에 학교에 도착했다. 먼저 온 사람들로 공연장이 붐비는 가운데서 아이를 찾았더니 얼굴이 예상외로 밝다.

아이가 다니는 학교는 레바논 계통으로 프랑스식 시스템이 도입된 국제 학교이다. 중동 대부분의 국가는 물론, 미국, 캐나다 등지에도 분교를 가지고 있는 100년이 넘는 전통을 가진 이 학교는 유치원부터 고등학교 3학년까지 3000명이 넘는 학생들이 한 캠퍼스에서 생활한다. 규모로 치자면 웬만한 대학보다 더 크니 행사도 많고 경쟁도 심할 수밖에 없다.

인도 파키스탄 아이들이 학업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반면 레바논 계통의 아이들은 예능에서는 단연 독보적이다. 서너 명밖에 되지 않는 아시아 계통의 아이들은 공부는 뒤지지 않지만 아무래도 사회성이 다소 떨어진다고 한다.

왕따를 당하거나 하는 일은 없지만, 그렇다고 하고 싶은 말을 다 하고 살지는 못한다고 하는 걸 보면 아직도 언어로 인한 핸디캡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 게 아닌가 싶다.

▲ 무함마드 하사발라가 'The Greatest Love of All'을 열창하는 모습.
ⓒ 이상직
레바논 독무대

그리스 출신의 7학년 아이 안티파스가 '백조의 호수'를 피아노 독주로 무대를 열더니 곧이어 7학년 아이들의 합창이 이어졌다.

'엘리제를 위하여' 피아노 독주에는 아이와 친하게 지내는 스리랑카 출신의 살롬이 솜씨를 뽐냈다. 문외한인 기자의 감으로도 여러 번 실수가 있었지만 관객들은 개의치 않는다. 벌써 흥이 오른 분위기다.

관객도 그러하지만 함께 준비하고 자기들 차례를 위해 기다리는 아이들의 태도가 참으로 대견스럽다. 같이 어깨를 들썩이며 흥을 돋우다 차례가 끝나면 우레와 같은 박수를 보내주며 격려하는 문화가 참으로 보기 좋다.

리코더와 합창이 또 한 차례 이어진 다음 마카레나 음악에 맞춘 군무를 위해 여러 명의 아이들이 검은 의상을 멋지게 차려입고 무대로 오르자 관중의 환호는 절정에 올랐다.

루마니아 출신의 마사 아버지는 자신의 딸이 무대로 등장하는 모습을 사진에 담느라 정신이 없다. 아이들의 춤사위에 신이 난 엄마들도 함께 어깨를 흔들며 자리에서 일어나자 무대와 관객의 구분이 모호해져 버렸다.

여러 명의 아이들이 솔로로 나와 유행하는 팝송을 구성지게 부른 다음 마지막 프로그램인 전원 합창 바로 직전에 레바논 출신 6학년 무함마드 하사발라가 마이크를 잡았다.

검은 바지에 흰 셔츠를 캐쥬얼하게 걸치고 짧은 머리에 레바논 특유의 섬세함을 온몸 가득히 담은 채 'The Greatest Love of All'의 첫 가사가 무함마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객석은 금방 숨을 멈추고 말았다.

가사 한 소절 한 소절에 귀를 기울이던 관객들의 시선이 무대에 꽂히고 가끔 산만하던 홀 전체가 어느덧 무대 위 12살 무함마드에게 모두 집중됐다. 그런 가운데 무함마드가 레바논 출신의 유명 여가수 낸시 아즈람을 비웃기라도 하듯 고음을 자유자재로 요리하기 시작하자, 무대는 바야흐로 흥분의 도가니로 빠져들기 시작했다.

앙코르가 터져 나오고 아일랜드 출신 스미스 선생님의 찬사가 뒤를 따르는 가운데 모든 아이들이 "무함마드!"를 연호하며 그렇게 콘서트는 막을 내렸다. 솔로와 듀엣으로 출연한 수십 명의 아이들 가운데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함마드와 같이 레바논 출신이라는 사실도 새롭게 알았다.

▲ 5, 6, 7학년 아이들이 한꺼번에 무대에 오른 마지막 합창 장면.
ⓒ 이상직
바야흐로 낸시의 후예들이 탄생하는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준수한 외모와 몸에 밴 매너 옥타브와 옥타브를 넘나드는 가창력을 느끼며 레바논과 시리아 사람들이 중동 전역 엔터테인먼트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이유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절로 든다.

우리 아이에게도 레바논 친구들이 몇 있다. 이 친구들의 공통점은 가무에 능하다는 것이다. 아이들이 예쁘고 꾸미기를 좋아하는지라, 어디를 가도 눈에 띈다. 하긴 5년 전 아이가 레바논에 살 때 그때 나이로 기껏해야 8살 되는 친구 집에 생일 초대를 받아 갔더니 그 자리에서 아이들이 모여 춤을 추는 것을 보고 너무 놀랐다는 말이 거짓이 아니었구나 싶다.

나라 전체가 이스라엘의 침략으로 초토화되고 국가 내부가 정쟁으로 하루도 편할 날이 없는 가운데서도 레바논 사람들이 늘 행복하고 자유로운 그 원동력은 무엇일까. 세계 10위권의 경제력을 가진 우리나라가 자살률 1위로 CNN과 알 자지라에서 발표되는 현실은 또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세상일이란 모름지기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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