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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성신문
[김나령 기자]“결혼요? 꼭 할 필요 있나요? 안정된 직장만 있으면 혼자 살래요.”(박지은·13)
“결혼하고 싶은데 아이를 낳긴 싫어요. 하고 싶은 일 하면서 남편이랑 알콩달콩 살고 싶어요.”(이은민· 17)

결혼과 출산에 대한 전통적 가치관이 흔들리고 있다. 미래 가임세대인 10대 여학생 10명 중 1명만 “반드시 결혼”한다고 했고, 9.8%는 “자녀를 가질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BRI@여성들이 결혼과 출산을 꺼리는 현상이 최근 불거진 현상은 아니지만, 미래세대까지 결혼과 출산을 ‘선택’으로 여기는 경향이 심화되는 것으로 나타나 새로운 결혼관과 가정관 정립이 시급하다는 지적이 일고 있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전국의 초등학교 5학년 이상 학생 1만1250명을 상대로 조사한 결과, 여학생이 더 부정적으로 답했다. 남학생의 22.8%가 결혼을 필수조건으로 생각한 데 비해 여학생의 10.8%만 “반드시 결혼한다”고 답했다. 나머지는 안정된 직장(73.1%), 충분한 수입(68.8%), 자아성취(64.5%), 독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60.6%), 결혼생활에 대한 부담(65.6%) 등을 이유로 결혼을 연기·포기했다. 자녀에 대해서도 여학생의 9.8%가 자녀를 출산할 의향이 없다고 답해 남학생(5.8%)보다 자녀 출산 의지가 약한 것으로 드러났다.

연구를 진행한 이삼식 한국보건사회연구원 저출산정책연구팀장은 여학생이 결혼과 출산을 남학생보다 휠씬 더 기피하는 이유로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반발 ▲일과 양육을 병행하기 어려운 사회현실 ▲개인주의 등을 꼽았다.

“여학생들은 부모와 이웃, 매스컴을 통해 보는 가부장적 결혼생활에 반감을 갖고 있습니다. 또 육아와 직장생활을 병행하기 힘든 사회현실에 대한 두려움과 반감도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합니다. 이런 현상은 경제적 어려움과 개인주의 등과 함께 여학생들이 결혼과 출산을 기피하는 요인이 됩니다.”
이 팀장은 또 “청소년들의 53.9%가 ‘남편은 직업을 가지고, 아내는 가정을 돌보는 것이 좋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 전통적인 성분업적 역할관이 우세하다”며 “이것은 여학생들의 가치관 형성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덧붙였다.

이팀장은 “현재도 저출산 문제가 심각해 정부가 32억원이란 막대한 예산을 쏟아붓고 있는데, 미래세대의 가치관이 함께 바뀌지 않으면 저출산 정책도 실효성을 거두기 어렵다”며 “단순히 출산율 증가에만 초점을 맞출 게 아니라 유아기부터 성평등적 가치관을 교육하고, 여성이 일과 육아를 양립할 수 있는 여성가정 친화적인 사회환경을 조성하는 노력이 병행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 팀장은 또 가정과 결혼에 대한 가치관이 변하고 있는 만큼 미래사회 가정에 대한 신사고가 이뤄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형적 유형의 가정 외에도 한부모 가정과 비혼모부 등 다양한 유형의 가정을 인정하고 사회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방안이 모색돼야 한다는 것.

전북대 사회복지학과 윤후식 교수도 “지식기반 사회로 갈수록 가족은 시민의 삶을 결정하는 중요 요인이 된다”며 “다양한 유형의 가정을 인정하고, 여성이 일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만든다는 전제 하에 결혼과 가정의 긍정적 기능과 창조적 기능을 부각시켜야 할 것”이라고 피력했다.

청소년에 물어 봤더니 미혼모·혼전동거 “NO”
입양· 국제결혼은 "YES"

트랜스젠더 연예인 하리수가 결혼을 하고, 사실혼 관계와 비혼모부가 느는 등 다양한 유형의 가정이 생겨나고 있지만, 청소년들은 아직도 전형적인 유형의 가정에 집착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설문조사에 따르면 청소년들은 미혼모, 혼전동거, 한부모가족 등 가족형태에 대해서 각각 21.6%, 33.4%, 33.7%만 찬성하는 등 부정적 태도를 보였다. 반면에 입양(71.7%), 국제결혼(61.3%), 재혼(58.8%)등의 가치에는 긍정적인 견해를 보여 다양한 유형의 가정을 인정하는 데 이중적 잣대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윤후식 교수는 “청소년들은 자기와 관계 있거나 친숙한 항목은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관계 없는 항목에 대해서는 부모님이나 제3자의 전통적인 생각을 그대로 공유하는 경우가 많다”며 “가정과 학교에서 유아기부터 다양한 가정형태를 인정하도록 교육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대중문화, 1020세대 결혼관 좌지우지
결혼·자녀 제치고 ‘일’에 올인

케이블 채널 온스타일의 ‘싱글즈 인 서울’ 시리즈는 현대를 살아가는 싱글 남녀의 일과 사랑, 라이프스타일을 다룬 프로그램으로 시청자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세 번 째 시즌 ‘콘트라섹슈얼’에 출연한 아티스트 낸시 랭은 “가장 젊고 예쁠 때 좋은 남자와 결혼하는 게 인생 최고의 선택은 아니다”라며 “결혼은 선택 사항이지만 일은 필수”라고 말했다. 이를 본 20대 시청자들은 “자신의 롤 모델로 삼고 싶다”거나 “삶의 자극제가 된다”는 소감을 남겼다.

기존 통념을 벗어난 1020 세대의 결혼관에 대중문화가 무시못할 위력을 발휘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사례는 시청률 50%에 육박하며 큰 인기를 모았던 MBC 드라마 ‘내 이름은 김삼순’. 홈페이지 게시판에서는 “독신주의자는 아니지만 결혼을 의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 싱글 여성들의 심리를 반영했다”는 소감이 줄을 이었다.

미디어에 민감한 1020세대 여성들은 드라마 ‘달자의 봄’에서 홈쇼핑MD 달자(채림)나 영화 ‘싱글즈’의 동미(엄정화)를 보며 “꼭 결혼하지 않더라도 자신의 일을 가지고 당당한 커리어우먼으로 살아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여우야 뭐하니’의 병희(고현정), ‘올드미스 다이어리’의 미자(예지원)를 보며 연하의 꽃미남에 대한 판타지를 은연중에 키우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달콤한 나의 도시’, ‘제인 스프링 다이어리’ 등의 ‘칙릿’(Chick Lit, 젊은 여성들을 겨냥한 대중소설)이나 ‘여자생활백서’, ‘서른 살 여자가 스무 살 여자에게’ 등 여성 자기계발서들도 싱글 여성으로서 당당하게 살아가라고 조언한다.

미디어 속에서 보여 지는 여성의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70년대에 등장했던 가부장적 사회 속에서 희생된 여성들, 90년대 후반엔 트렌디 드라마 속의 신데렐라를 꿈꾸는 여성들을 거쳐, 최근엔 결혼에 관심 없이 일에 ‘올인’하며 독립적이 삶을 추구하는 30대 싱글 여성들이 주를 이룬다. 여성의 사회진출이 활발해지면서 등장하게 된 이들은 ‘노처녀’라는 이름으로 비하됐던 싱글 여성들의 당당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는 점에선 긍정적이지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 저출산현상을 가속화시키는 데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의견도 만만치 않다.

지난해 11월 보건복지부는 한국방송작가협회와 함께 ‘저출산 극복을 위한 방송작가 초청 워크숍’을 개최했다. 여기서 발표된 ‘텔레비전 드라마와 수용자 분석을 통한 저출산 현상 연구’에선 1995년 이후 방영된 50편의 드라마를 분석한 결과 “현재 미혼여성들이 결혼보다 일을 중요시하며 사랑이 반드시 결혼으로 이뤄지지 않아도 된다는 가치관을 지닌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특히 2000년 중반 이후의 드라마에선 자아실현 및 자기만족을 위해 자녀를 미루는 상황이 눈에 띄게 증가했다고 보고서는 전했다.

워크숍을 주최한 보건복지부 강도태 인구여성정책팀장은 “사회를 선도하는 역할을 하는 언론이 자연스럽게 가족과 출산, 자녀에 대해 긍정적인 이미지를 그려야 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김원 문화평론가도 “최근 미디어 속에서 비춰지는 결혼생활은 불륜이 오히려 미화되고, 가정을 지키는 주부의 삶은 구질구질하게 그려지는 게 대부분”이라면서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방송작가들은 현실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드라마의 갈등구조를 만들기 위해선 극단적인 예를 가져올 수밖에 없다는 것. 한국방송작가협회 임동호 사무국장은 “방송작가들이 가족드라마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지만 드라마 제작 여건상 가족의 유무는 제작비와 직결되는 문제라서 작가들만의 의지로는 바뀌기가 힘들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싱글 붐 속 나의 ‘반쪽’ 찾기도 계속된다
결혼도 투자 ‘혼(婚)테크’ 공감대 높아…‘사랑’보다는 ‘조건’ 강세

과거에 비해 젊은 세대들에게 결혼이 절실한 문제로 여겨지지는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은 끊이지 않는 화두임에 틀림없다.

결혼에 회의적인 반응을 보일수록 아이로니컬하게도 결혼정보업체의 시장규모는 가파른 신장세를 보이고 있다. 현재 전국에서 영업 중인 결혼정보업체는 소규모 업체까지 포함해 1000여 곳에 이르고, 시장규모도 해마다 늘어 현재 700억원을 상회하고 있다.

정부 산하 문화예술기관에서 홍보업무를 맡고 있는 고은성(34·서울 잠실동)씨는 소위 물이 좋다는 피트니스센터의 멤버십 회원이다. 고씨는 “좋은 사람을 만나는 데 이 정도 투자는 기본”이라며 “한쪽이 기우는 결혼보다는 양쪽이 엇비슷해 시너지 효과를 갖는 게 가장 이상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결혼에 대한 인식이 바뀜에 따라 배우자를 고르는 기준도 뚜렷한 변화를 보이고 있다. 과거에는 ‘사랑’이 결혼조건의 우선순위였다면 요즘은 ‘경제적 조건’을 일차적으로 꼽는다. 특히 만혼이 일반화되면서 경제력을 갖춘 30대의 싱글에게 상대 배우자의 경제력은 기본이다.

제일기획이 지난해 전국의 미혼남녀 400명(25~34세)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상대를 소개받으면 조건을 살피고, 55.8%는 능력이 좋다면 나이는 상관없다고 답했다. 특히 조건이 좋은 사람을 만나기 위한 장소나 모임을 적극적으로 찾는다는 응답자도 46.6%에 이르는 등 ‘조건’은 결혼의 중요 요건으로 떠올랐다.

김혜영 여성개발원 가족지원센터 연구위원은 “로맨틱 러브를 기대하면서도 결혼에 대한 안전장치에 민감해졌기 때문에 소위 조건을 따지는 것도 개인의 ‘취향’으로 용인되는 사회분위기”라며 “여성의 경우 일정의 커리어를 쌓은 후에 결혼 상대자를 찾으려면 이미 결혼시장에서는 약간의 제한이 따르기 때문에 상업화·제도화된 업체를 찾는 경우가 늘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고 지적한다.

고씨와 같은 실속파들의 ‘결혼도 투자’라는 ‘혼(婚)테크’에 대한 욕구는 남녀를 가리지 않고 나타난다. 결혼에 적극적인 ‘혼테크족’들은 상대자의 조건은 꼼꼼히 살피는 반면, 예물·예단 등의 혼수는 최소화하고 청약통장이나 주식, 펀드에 투자하는 것을 더 선호한다.

김태현 성신여대 심리복지학부 교수는 “집값도 급등하고 생활비도 많이 들기 때문에 결혼에 현실적·실리적인 태도를 가질 수밖에 없는 게 현실”이라며 “과거에 비해 집값 부담을 남성에게만 돌리지 않는 것이 단적인 예”라고 지적했다.

“다양한 가족 수용할 법적 사회적 인프라 구축해야”
[전문가 제언] 이대 여성학과 이재경 교수

“이번 설문조사에서도 알 수 있듯이 청소년들은 이미 전통적인 가치관에 얽매이지 않고 다양한 관점에서 결혼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그런데 과연 현재의 우리 사회는 청소년들의 열린 사고를 받아들일 준비가 돼 있습니까?”

이화여대 여성학과 이재경 교수는 결혼과 가정, 출산에 대한 가치관이 급격히 변하고 있는 만큼, 이를 위한 대비가 시급한 시점이라고 지적했다. 이 교수는 우선 과제로 미래세대 아이들의 생각을 담는 법적·사회적 인프라 구축을 꼽았다.

“한국 사회의 변화 속도와 외국 사례로 미뤄볼 때 동거와 혼외출산이 급격히 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런 상황에서 저출산현상에 대응하려면 건강가정기본법 전부개정법률안(가족정책기본법)같이 다양한 가족 유형을 인정하는 법에 힘을 실어줘야 합니다. 다양성을 인정하는 사회적 분위기 조성과 인프라 구축도 필요합니다.”

이 교수는 “결혼중심주의는 머지않은 미래에 없어질 것”이라며 “진보적 사고와 대응이 필요한 때”라고 거듭 강조했다.

가족정책기본법은 기존 건강가정기본법이 정한 ‘혼인·혈연·입양으로 이루어진 공동체’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사실혼에 기초한 공동체 ▲아동을 위탁받아 양육하고 있는 공동체 ▲후견인과 피후견인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로까지 가족의 범주를 확대한 법안으로 현재 국회에 계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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