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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구의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곽재구의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 열림원
곽재구 시인 하면, '사평역에서'라는 마음 싸하게 만드는 시 한 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의 시들 역시 시인 특유의 서정성을 만나게 한다. '별'에서 노래하듯이 시집은 "아름다운 머리칼을 지녔"고 이 "머리칼에 한 번 영혼을 스친 사람"은 "어떤" 마음의 노래를 부른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시는 '도문장터'라는 시이다. 백석의 '여승'과 흡사한 시적 분위기가 연출된다. '여승'이 '두만강변 송계동이 고향인 여인'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BRI@삼월에도 진눈깨비 날리는 도문장터/ 가라오케 간판이 어지러운 거리 모퉁이에서/ 그 여자는 내게 북한 우표첩 한 권을 사 달라고 한다// (…) 그 여자의 고향은 두만강변 송계동에 있었다 한다/ 봉천이랑 하얼빈이랑 블라디보스토크랑/ 진눈깨비처럼 흩날려 다니다가도/ 고향에 돌아갈 생각하면 마음속에/ 송홧가루 펄럭펄럭 날렸단다// 그 여자의 고향은 이제 사라지고 없다 한다/ 남녘 북녘 외딴 골에도 남아 있지 않단다/ 가라오케 불빛 어지러운 도문장터/ 그 여자는 내게 울먹이며 우리 돈 만원 한 장에/ 북한 우표첩 한 권을 사 달라 한다. - '도문장터' 중에서

'0.75평'에서 시인은 "지금은 북쪽으로 간/ 장기수 이인모 노인은" "얼마나 좋았을까" 헤아려본다. 무엇이 좋았다는 것일까? "남쪽 동포가 IMF 구제금융에 점령당하고/ 북쪽 동포가 굶주림에 점령당한 사실도/ 하마 모를 것이다"라 한다. 아마도 이쪽저쪽 이념 어디에도 매여 있지 않은 상황이라는 판단에서이리라.

'고등어장수-연화리 시편 11'에서는 고등어장수와 문답이 오가고, '수제비죽-연화리 시편 12'에서는 나룻배 손님에게 수제비죽을 대접하여 함께 나눈다.

어제 저녁엔 수제비죽을 쑤었습니다/ 내 작은 오막살이 가득 멸치국 내음 가득 찼습니다/ 이 맛있는 내음 함께 맡아줄 이 없어 조금 서운했습니다/ 그때 한 나그네가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 마중을 나간 내게 나그네가 말했답니다/ "이 집에서 나는 향기는 처음 맡는 것입니다"/ 나는 그를 상석에 앉히고 한 대접 수제비를 떠올렸습니다/ 그리고는 그에게 말했지요/ "神이시여, 이 모든 향기가 그대의 은총입니다"/ 그가 나에게 물었답니다/ "그대는 어떻게 나의 이름을 아는가?"/ "내가 끓인 죽 내음을 향기로 부르는 이/ 이 지상엔 한 사람밖에 없습니다 神이시여, 내 그리운 그 사람 외에/ 또 다른 이름이 있다면 그것이 바로 당신 이름입니다."

'수제비죽'을 '향기'라는 은유로 받을 줄 아는 독자는 시인에게 '신(神)'인지도 모른다. 나는 이 시에서 시인과 독자의 관계를 읽는다. 그것은 시인과 독자가 더불어 이야기하는 것이고 더불어 음식을 나누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시인이 바라본 어떤 아름다운 풍경이 있다면 그것을 시로 만들어다가 독자와 함께 바라보는 것이고, 시인이 경험한 어떤 뜻있는 세계가 있다면 이 또한 시로 가져다가 독자와 함께 공유하는 것이리라.

느닷없이 '수제비죽'은 왜 나왔을까? 그 사연을 '시인의 말'에서 찾을 수 있었다. 시인은 섬진강변에서 지낸 적이 있는 모양이다. 섬진강변에 작은 오두막집을 짓고 나룻배를 젓기도 하며 사람이든 자연이든 오는 이들을 맞으며 지낸 적이 있는 모양이다.

나는 그들과 내가 쑨 수제비죽을 나눠 먹기도 하고 내가 쓴 시를 읽어주기도 하며 내가 좋아하는 음악을 들려주기도 한다. 그럴 때 나는 내가 처음 이 강변에 들어섰을 때 경험했던 신비한 꿈들을 그들의 표정에서 읽을 수 있다.

시인에게 '섬진강'의 의미는 무엇일까? "아주 오래 전부터 한 강을 사랑해왔다. 그 강의 이름은 내게 늘 처음이었으며 열망이었다. 삶의 순간 순간, 회복을 꿈꿀 때 나는 그 강을 찾아간다"라는 말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그것은 '늘 처음'이며 '열망'이고 '삶의 회복'이다.

시인은 그곳에서 "고요하게 흘러가는 강물이 소리를 내는 것"을 들었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는 "그 소리에 골몰했"고 "써야 할 시의 목소리를 들었다"고 말한다. 시인의 시 '낮달', '용흥리 석불'도 독자들에게 권하고 싶은 시들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곽재구 / 펴낸날: 1999년 5월 27일 / 펴낸곳: 열림원


꽃보다 먼저 마음을 주었네

곽재구, 열림원(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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