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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각의 나비>
<환각의 나비> ⓒ 푸르메
난 통성기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조용한 분위기에서 차분하게 드리는 기도를 좋아한다. 그렇다고 처음부터 통성기도에 거부감을 가진 건 아니다. 예전 교회 봉사에 제법 열심을 내던 고교 시절, 오히려 난 통성기도를 자주 즐겼었다.

원없이 소리를 지르고 난 다음 찾아오는 묘하고도 은근한 쾌감에 끌렸던 것도 있지만, 주위의 기성신자들(우리네 어머니와 아버지들)의 기도 방식에 적응하려는 측면이 크게 작용했을 것이다. 어쨌거나 '시끄러운 기도'가 나와 신과의 소통에 오히려 장애로 인식하기 시작한 그 순간부터 난 통성기도를 그만두었다.

교회 문턱 드나들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한국 교회의 통성기도 문화는 유별나다. 개신교가 뿌리내린 국가에서 우리의 교회처럼 열정적이고 전투적으로 기도하는 나라가 또 있을까?

초신자들이 교회에서 겪기 마련인 첫 문화충격은 대개 피를 토하는 듯한 격정적 기도 방식과 대면했을 때이고, 이른 새벽을 흔드는 시끌벅적한 기도소리가 교회 인근 주민들의 원성을 사는 일도 다반사로 벌어진다. 하나님이 귀머거리는 아닐 터, 꼭 그리 기를 쓰고 소리를 지르며 기도해야 할 이유가 대체 뭘까?

@BRI@오랫동안 이어지던 이 물음의 대답을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2>을 통해 나름대로 구할 수 있었다. 투병중인 '엄마'의 괴기스러운 발광. 아흔이 다 되어 이제 곧 차갑게 식어버릴 노인의 가슴에조차 도무지 바래지지 않는 공포, 원한, 저주의 기억은 도대체 무엇이었나? 그건 바로 우리의 할머니들이 또 어머니들이 고통스럽게 건너야 했던 근·현대의 역사가 아니었을까?

그들은 일제의 억압과 강탈, 해방정국의 혼란, 분단이라는 생이별, 6·25 전쟁의 잔혹함, 군사정권의 암흑시기를 거치면서 수없이 빼앗기고, 밟히고, 찢겨지며 귀신도 곡할 참담한 세월을 살아왔던 것이다. 그 통곡조차 마음 놓고 할 수 없어 안으로 삭이고 또 삭이면서….

우리의 가엾은 할아버지 할머니, 어머니와 아버지들이 가슴에 꼭꼭 숨겨온 통절한 한을 작게나마 풀어놓고 울부짖을 수 있는 공간은 그나마 교회였을지 모른다. 그렇다면 그들의 목소리는 내게 더 이상 소음이 아니다. 그것은 한 시대의 절규어린 증언이다.

<환각의 나비>는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다섯 편이 묶여 나온 책이다. <엄마의 말뚝2> 도 그중 하나다. 박완서 작품을 읽을 때마다, 그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어휘와 사람의 기기묘묘한 감정을 능란하게 글로 풀어내는 능력에 탄복하곤 한다. 40세에 데뷔한 박완서가 그 이전에는 습작 경험이 전무했다니 문학가는 만들어지는 게 아니라 태어나는 거라는 소문이 빈말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환각의 나비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

박완서 지음, 푸르메(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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