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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에서 만난 현대판 김삿갓
길에서 만난 현대판 김삿갓 ⓒ 이철영

김삿갓(난고 김병연 또는 김립)의 조부인 김익순은 1811년 홍경래의 난 당시 선천 부사로 재직중이었는데 반란군에 항복하였다 하여 삼족이 멸하는 대역죄를 받았다. 김삿갓은 불과 5살이었고 그는 집안의 종인 김성수의 등에 업혀 황해도 곡산으로 도망해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

홍경래의 난이 진압되고 난 후에는 조부 김익순의 죄만을 묻고 나머지 가족들은 패족(천인)으로 사면 되었다. 이후 부모와 함께 살 수 있었으나 아버지 김안근이 홧병으로 죽고 난 후, 그의 어머니는 주변의 멸시와 천대를 피해 자식들을 데리고 아무도 자신들을 알지 못하는 강원도 영월로 이주한다.

그곳에서 그의 어머니는 집안의 내력을 숨긴 채 자식들의 교육에 전념하였고 뛰어난 재주를 가졌던 김삿갓은 그의 나이 20세 되던 해 영월 도호부 동헌 백일장에 나가 장원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질긴 운명의 끈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영월 백일장에서 써야 했던 시제(詩題)는 ‘논 정가산 충절사 탄 김익순죄통우천(論鄭嘉山忠節死 嘆金益淳罪通于天) 즉, 정가산의 충절을 논하고 하늘에 이른 김익순의 죄를 규탄하라였다.

그는 김익순이 자신의 조부인 줄은 꿈에도 모른채 ‘이조의 세신인 김익순아 들어라 가산의 정공은 경대부(卿大夫)에 불과하나 나라에 충사(忠死)치 않았느냐…(후략)’ 며 18수의 시를 일필휘지로 써내려 갔다. 그러나 그의 집안 내력이 드러나 장원은 취소되었고 어머니는 그제서야 조부에 얽힌 가족사를 들려 주었다.

김삿갓이 한많은 방랑세월을 마친 창원 정씨 정시룡 가의 사랑방과 표지석. 집안에서 화순군에 희사해 유적지로 보존중이다.
김삿갓이 한많은 방랑세월을 마친 창원 정씨 정시룡 가의 사랑방과 표지석. 집안에서 화순군에 희사해 유적지로 보존중이다. ⓒ 이철영

온 몸을 찢어 발기는 벼락이 몸을 관통하였고 그는 존재를 상실했다. 스스로가 대역죄인의 손자인데다 젊은 날을 다 바쳐 공부한 철학과 재주로 그는 조부를 다시 죽였다. 그의 몸을 가득 채운 시대의 사상과 끊을 수 없는 혈육의 인연, 집안을 일으키고자 한 출세의 욕망이 충돌했다. 그의 세계는 도저히 화해할 수 없는 모순으로 가득 차 옴짝달싹 할 수 없었다.

방황을 거듭하던 그는 22세 되던 해 1828년 노모와 처, 아들을 남겨둔 채 다시는 하늘을 쳐다 볼 수 없다며 삿갓을 쓰고 방랑의 길을 떠났다. 서당 훈장 , 걸식으로 세상을 떠돌던 그는 4년 후 집으로 돌아와 둘째 아들 익균을 낳고는 다시 유랑의 길을 떠나 돌아가지 않고 길 위에서 인생을 마친다.

정씨 집안에서 세운 망미대 안에 붙여진 김삿갓을 그린 판각(문제선 씨 작품)
정씨 집안에서 세운 망미대 안에 붙여진 김삿갓을 그린 판각(문제선 씨 작품) ⓒ 이철영

당시의 조선은 임진, 병자년의 양란을 거친 후 수공업과 상업이 융성하고 경작지도 늘어나는 등 새로운 사회적 활력이 넘쳐 나는 근대의 전야였다. 새로운 외래문물들이 유입되었으며 실학이 융성하며 근대적 자각이 움트고 있었으나 부와 권력의 편중은 더욱 심화되어 도처에서 민란 또한 끊이지 않았다.

김삿갓은 스스로의 불우한 처지에서 출발하여 세상을 떠돌았으나 그의 인식은 확장되어 백성들의 곤궁한 삶과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사는 양반, 관리들의 부패와 허위의식을 들여다보게 되고 이를 통렬히 비판, 풍자한다.

그는 스스로가 안동 김씨 세도가의 일원이면서도 소외된 양반이 됨으로써 사회적 모순을 뼈속 깊이 느꼈고 드넓은 인도주의의 세계에 발을 담그며 세상의 공명을 넘어선 대자유인이 될 수 있었다. 그는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았기에 벼슬아치나 부자를 거렁뱅이로 보았으며 권세와 부귀를 가진 자들이 그 앞에서는 맥을 쓰지 못했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김삿갓이 '망미대'라는 시를 남긴 자리에 정자와 친필 시비가 세워졌다.
전남 화순군 동복면 구암리, 김삿갓이 '망미대'라는 시를 남긴 자리에 정자와 친필 시비가 세워졌다. ⓒ 이철영

해뜰 제 원숭이가 들에서 나고
황혼에 모기가 처마에 이르렀다
고양이가 지나가니 쥐가 모조리 다 죽었고
밤에 벼룩이 자리에 나와 따갑게 쏜다.
-김삿갓의 '원생원'(元生員)


지방 토호들이 술을 먹으면서 서로 원생원, 문첨지, 서진사, 조석사 하면서 서로 뽐내는 것을 보고 김삿갓이 슬그머니 한 수 지어 한껏 조롱한 것이다. 나이 40세 무렵엔 그의 이름이 조선팔도에 드높았다. 가명으로 과거시험을 보아 몇번의 장원을 하고도 사라져 버리고, 그가 남기고 간 시들이 수 많은 사람들의 인구에 회자되었다.

그러나 세월의 힘은 이길 수 없어 만년의 15년여는 남도 땅에 지친 몸을 의지하게 된다. 가장 물산이 풍부하고도 빈곤한 이들이 많았던 고장, 그래서 저항의 불길 또한 뜨거웠던 땅, 남도. 사람의 태어난 자리가 중요하고 또한 죽는 자리가 중요하듯 병약해진 그는 기후도 따뜻하고 인심도 따뜻한 남쪽나라에서 고단한 삶을 마무리 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삿갓이 최후로 기거했던 사랑채(종명지)앞에 세워진 친필 시비. 정씨 집 사랑방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느낌을 담고 있다.
김삿갓이 최후로 기거했던 사랑채(종명지)앞에 세워진 친필 시비. 정씨 집 사랑방에 대한 묘사와 자신의 느낌을 담고 있다. ⓒ 이철영

새도 둥지가 있고 / 짐승도 굴이 있거든 /
돌아보매 나 홀로 / 평생에 뜬 몸이라 /
짚신 지팡이로 / 수천리를 걸으며 /
물 성품 구름 마음으로 / 사방이 다 집이다 / …. /
실로 남쪽 고을에는 / 예부터 과객이 많아 /
나도 그 속에 끼여 / 부평초 같이 떠다닐 제 / …. /
이리하여 / 천석군 만석꾼이 / 후하고 박한 풍속을 /
골고루 다 맛보는 새 / 몸이 궁할수록 /
세상의 멸시만 늘어가는 /
해 저문 오늘 저녁 / 백발을 탄식하나 /
이제 돌아가기도 어렵고 / 머물기도 난처하니 /
금후 또 몇날이나 / 이렇듯 길가에서 헤멜고/
-김삿갓의 '평생시'(平生詩)·스스로의 인생을 회고한 시


그는 화순 동복 구암마을 정씨가丁氏家의 사랑채에 의탁하여 남도땅을 떠돌다가 1863년 57세를 일기로 그곳에서 한많은 생을 마감한다. 정씨가에서는 김삿갓을 장사 지냈고 3년 후 가족들은 영월 땅으로 그를 모셔갔다.

시가 노래라면 그의 시는 당 시대 최고의 유행가였고, 길 위에서 모순에 찬 한 시대와 대결한 시대비평가요, 예술가, 지사였다. 우리는 모두 생의 길 위에선 나그네가 아니던가. 지금 남도에 봄이 오고 있다.

광주광역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 인근 청풍쉼터에 서 있는 김삿갓의 시비
광주광역시 북구 청옥동 제4수원지 인근 청풍쉼터에 서 있는 김삿갓의 시비 ⓒ 이철영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oil 사보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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