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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인의 가인 공연에 참여하는 박초선, 서현숙, 남혜숙 명창(왼쪽부터)
ⓒ 김문성 제공

초야에 묻힌, 살아있는 전설적인 소리꾼들의 녹록치 않은 실력을 감상할 수 있는 특별 이벤트가 마련된다. 국립국악원 2007년 기획공연의 일환으로 오는 3월 15일, 16일 예악당에서 열리는 '우리가 기억해야할 3인의 가인(歌人)'공연이 그것이다.

국립국악원이 상반기 기획공연중 하나로 무대에 올리는 이 공연은 현재 왕성하게 활동하는 소리꾼 가운데 실력은 출중하면서도 제도적 보호를 받지 못하고 있는 이른바 '재야인간문화재'로 추앙받는 소리꾼들을 한 무대에 세우는, 화합·상생·포용의 의미를 지닌 공연이어서 벌써부터 국악계의 많은 관심과 주목을 끌고 있다.

이날 무대에는 판소리, 민요, 정가(가곡·가사·시조) 분야의 독보적인 3명의 현역 여류명창이 오르게 된다.

박초선 명창은 첫날 스승 박록주 명창의 특장인 단가 '백발가'와 흥보가중 '박타는 대목', '제비후리는 대목'등 동편소리를 들려주며 둘째날은 서편제로 단가 '적벽부','만고강산'과 춘향가의 결정판으로 불리는 김여란제 '춘향가'를 선보인다. 서현숙 명인은 평시조 '청산리 벽계수야'를 비롯해, 중허리시조, 반각시조,우조시조 등 시조의 멋을 이틀에 걸쳐 선보이게 된다. 남혜숙 명창은 첫날 서도잡가 '제전', '관동팔경', 경기잡가 '제비가'.'집장가'를 부르며 둘째날 휘모리잡가 '장기타령', 경기잡가 '유산가'와 '평양가' 그리고 김옥심 명창의 전매특허인 김옥심제 '정선아리랑'을 부른다.

3인의 가인, 3색 사연

이날 무대에 오르는 3인은 제각각 다른 사연을 가진 여성 소리꾼들.

▲ 박초선과 스승 김여란, 박초선은 김여란에게서 정정열제 춘향가를 사사받았으며 이 춘향가로 22년째 준보유자에 머물고 있다
ⓒ 김문성 제공
단연 화려한 경력을 자랑하는 박초선 명창이 눈에 띈다. 1931년 화순에서 태어난 박초선 명창은 7세의 나이에 신동소리를 들으며 판소리에 입문한 소리꾼으로 광주조선성악연구회에서 조상선을 사사하고 월북한 명창 임소향에게서 무용을 배웠다. 김종기에게서 가야금산조를 배웠으며 50년대에 상경해 박록주, 김소희 등을 사사했다. KBS전속으로 활동했으며 서울시국악관현악단 수석을 지내기도 했다.

김일구에게서 아쟁을, 성금연에게서 가야금을, 김월하에게서 지름시조를 배웠으며 박록주의 수제자로 흥보가를 배워 박동진 명창에 이어 1970년 여성 최초로 판소리 완창발표회를 가졌다. 이후 김여란에게서 춘향가를 사사, 1975년 다시 완창발표회를 열었으며 소리꾼으로는 처음으로 국악과가 아닌 단국대 국문학과 석사를 마치기도 했다.

70년대말 국악계에 '국악'용어대신 '전통음악'으로 바꾸자는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며 85년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정정열-김여란제)로 보유자 후보로 인정되었다. 60년대 이미 대중적 인기를 구가하던 여성국극이 쉽게 소릿길을 타기 때문에 판소리의 법통을 망친다며 국극계와 대립했고, 80년대에는 판소리의 상품화가 판소리를 망친다며 공연장에서 모습을 감추고 제자양성에만 힘쓸 정도로 판소리의 가치와 법통을 중시한다. 박초선 명창은 타고난 명창이라는 말대신 노력하는 명창이라고 늘 스스로를 내린다.

고 이성천 서울대 교수는 입버릇처럼 '언젯적 박초선이냐'는 말로 박초선의 소리내력을 존중했으며 고 정광수 명창 역시 '판소리를 상품화하지 않은 유일한 명창'이란 말로 그의 예술세계를 존중했다. 그러나 그녀의 튀는 언행은 많은 국악인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고 그것이 화근이 돼 결국 '왕따'로 낙인찍히며 부암동 자택에서 제자들을 가르치며 외로운 말년을 보내고 있다.

▲ 1967년 발매된 서현숙과 유종구의 '가곡 시조' 음반. 표지인물이 서현숙이다.
ⓒ 김칠이
서현숙 명인은 1940년 대구에서 태어나 대구여중 시절 국극 공연을 보고 국악에 입문했다. 이후 지인의 권유로 대구국악원에서 시조사범으로 있던 유종구에게서 가곡과 시조를 사사, 3년 만에 마산 전국시조가곡경창대회에서 우승한데 이어 이후 참가한 4개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며 대구에서 천재났다는 평을 받았던 명인. 1967년 동아일보 주최 전국시조가곡경창대회에서 다시 우승해 명인의 반열에 오르며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

음반취입, 각종 방송활동, 공연 등의 쇄도에 부담을 느껴 70년대 중반 잠시 시조계를 떠나 있다가 스승 유종구의 권유로 80년대 초 세상에 나왔고 85년에는 부여백제문화제 전국대회에서 다시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유종구의 시조가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데다 본인 역시 지방문화재의 권유를 고사하고 혈혈단신 서울로 상경, 향제시조보급에 매진하고 있다. 김금파 등 그녀의 제자들은 이미 지방에서 문화재로 인정되어 활동하고 있어 문화재가 아니면서 문화재를 많이 배출한 스승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남혜숙 명창은 1942년 경기 가평생으로 1960년에 김순태에게서 경기민요를 사사했으며 1968년 이창배의 청구고전성악학원으로 옮겨 강사로 있던 스승 김옥심을 사사했다.

김옥심은 국악사에 전해지는 몇 안 되는 전설적인 소리꾼으로 일제하 주수봉에게서 가사, 시조, 잡가를 배웠으며 해방후 KBS와 대한국악원 민요부원을 지냈고 1958년 제1회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김월하, 한애순 등을 물리치고 1등상을 받았으며 1968년 제1회 세종상국악경연대회에서 경서도창부 1등을 차지한 명창. 1969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와 함께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후보가 되었다.

▲ 전설적인 경서도 소리꾼 김옥심
ⓒ 김문성 제공
남혜숙은 1971년 민요백일장에 김옥심과 함께 출연한 것을 계기로 방송에 자주 출연했으며 서도명창 지관팔일행으로 있으면서 지방과 일본 등을 돌며 공연했다. 1975년 제2회 선소리산타령 및 12잡가발표회와 3회 발표회에서는 김옥심과 함께 소춘향가를 부르기도 했다. 김옥심의 배려로 명창 지연화에게서 창부타령, 노랫가락 등을 배우기도 했다.

1975년 김옥심이 경기민요 문화재 지정에서 탈락하면서 많은 제자들이 이탈해갔으나 김옥심 곁에 남아 김옥심의 소릿제를 이었고 1980년초 부터는 은평에 학원을 설립해 김옥심제 소리를 이어가고 있다. 지난 2004년에는 김옥심제 잡가를 중심으로 음반을 취입하기도 했다. 서울소리보존회를 만들어 50여명 이상의 제자를 가르치고 있으며 대학교를 찾아가 학생들에게 무료로 민요를 가르치며 또한 농촌봉사활동 등에도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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