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국사봉에서 바라본 무수동 마을. 배나무골로 들어오는 길이 선명합니다.
국사봉에서 바라본 무수동 마을. 배나무골로 들어오는 길이 선명합니다. ⓒ 김유자
대전의 남쪽에 있는 높이 457.6m인 보문산은 품안에 여러 마을과 문화재를 품고 있습니다. 지난 10일 보문산 남쪽 골짜기에 있는 고려시대의 절터인 보문사지를 찾아 발길을 옮겼습니다.

동물원 가는 길과 무수동 가는 길이 갈라지는 3거리 언고개에서 왼쪽으로 난 산길을 타고 갑니다. 왼쪽에 동물원 철책을 끼고 인적이 드문 산길을 허위허위 2km가량 걸어가니 대전시 문화재자료 제38호인 국사봉이 고개를 내밉니다.

@BRI@이 유적은 언고개 바로 옆 사정산성에서 경계를 위해 설치한 보루라고도 하는 얘기도 있지만 산성으로 보기에는 규모가 작고 흙으로 만든 조각난 말 따위가 출토된 것으로 보아 제사 유적이 아닌가 추정합니다.

동서 8m, 남북 5m, 둘레 25m의 크기로 돌을 쌓아 만들었다는데 지금은 무너져 자취를 찾기 힘들지요. 무너진 돌들은 이제 몇 개의 돌탑이 되어 옛터를 지키고 있습니다.

바라보니 저 멀리 무수동 마을이 한눈에 들어 옵니다. 원래 물과 무쇠가 많이 나는 마을이라 하여 무쇠골 또는 수철리라 부르던 곳인데, 조선조 숙종때 대사간 권기가 이곳에 정착하면서, 그의 호인 무수옹을 따라 마을 이름도 무수리라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마을의 초입을 지나 왼쪽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면 배나무골에 이르게 됩니다.

배나무골. 무수동에서 들어오는 길과 국사봉에서 내려온 길이 만나는 곳에 있었던 마을이랍니다.
배나무골. 무수동에서 들어오는 길과 국사봉에서 내려온 길이 만나는 곳에 있었던 마을이랍니다. ⓒ 김유자
국사봉에서 내려오면 임도가 나옵니다, 임도 아래로 난 길을 따라 산을 내려오면 지금은 폐촌이 된 배나무골에 도착합니다.

아직도 군데군데 남아있는 축대와 대나무숲과 감나무들, 그리고 버려두고 간 장독들이 옛 마을의 흔적을 말해줍니다. 지금의 풍경으로 보면 꽤나 운치있는 마을이었을 것 같은데 왜 폐촌이 되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보문사지 전경.
보문사지 전경. ⓒ 김유자
배나무골 동쪽 계곡을 건너고 고개를 넘어서 보문사지가 있는 절골을 향해 갑니다. 산길이 그리 험하지 않아 걷는 맛을 만끽하게 해줍니다. 두 번째 고개 모퉁이를 돌아들자 보문사지가 빼꼼히 얼굴을 내밉니다.

남향한 경사면을 계단식으로 만들어 3단의 축대를 쌓아 거기에 절집을 지었나 봅니다. 사역이 동서 약 70m, 남북 약 50m 정도라고 하니 그리 큰 절은 아니었던가 봅니다.

여기서 바로 보문사지로 가서는 한 가지 놓치기 쉬운 게 있습니다. 남쪽을 흐르는 계곡 언덕 위에 당간지주가 있기 때문이지요. 여간 눈여겨 보지 않으면 놓치기 십상이지요.

보문사 당간지주.
보문사 당간지주. ⓒ 김유자
당간지주에 새겨진 명문.
당간지주에 새겨진 명문. ⓒ 김유자
절에 법회나 큰 행사가 있음을 알리는 당을 거는 장치를 당간이라고 합니다. 당간지주는 당(幢)을 거는 긴장대인 당간을 지탱하기 위해 세운 돌기둥을 말합니다. 보문사지 당간지주는 한쪽은 깨트려지고 한쪽만 남아있습니다.

당간지주에는 '석수영찬'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 '영찬'이라는 분은 이 근방에서 꽤나 유명한 분이었던 모양입니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여경암 석조에도 그의 이름이 새겨져 있으니 말입니다.

보문사 터 금당지.
보문사 터 금당지. ⓒ 김유자
당간지주를 돌아보고 난 다음 천천히 보문사지를 돌아봅니다. 보문사의 창건 시기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금당지 발굴 결과로는 나말여초로까지 추정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또 출토유물인 암막새에는 '강희 16년'이란 명뭉이 있어 1677년 중창되었음이 확인되기도 했습니다.

3단의 축대 가운데 제일 아랫단에 1개소, 중간에 2개소의 건물터가 남아 있는데 아랫단에는 길이 10여m, 높이 1m에 달하는 축대가 쌓여 있으며, 이곳에 앞면 6칸, 옆면 2칸의 건물이 있었던 흔적이 보입니다. 주춧돌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습니다.

두 번째 단에도 2개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되나 파괴가 심해 확인할 도리가 없습니다. 제일 윗단에는 주춧돌은 보이지 않으나 대웅전이 있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대웅전 위에는 사람 키를 넘는 시누대숲이 자라고 있어 이 폐허의 풍경에 윤기를 더해 줍니다.

금당 괘불지주.
금당 괘불지주. ⓒ 김유자
괘불지주에 새겨진 명문.
괘불지주에 새겨진 명문. ⓒ 김유자
금당 축대 바로 밑에는 높이 90㎝, 한변 길이 16㎝×35㎝로 20㎝의 간격을 두고 괘불지주 한쌍이 서 있습니다.

지주에는 '강 삼십팔년 기묘 화주 옥순 석수 이외동'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외동이라는 석수가 이 괘불지주를 조성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해 주지요.

보문사지 동쪽 계곡에 있는 돌확과 연자방아와 석조.
보문사지 동쪽 계곡에 있는 돌확과 연자방아와 석조. ⓒ 김유자
보문사지 동쪽 계곡에는 돌확과 연자방아와 석조가 일직선 상으로 놓여 있습니다. 그중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0호인 석조는 사찰 옆에 흐르는 개울물을 담아두던 시설이랍니다.

화강암으로 만들어진 석조는 밑바닥을 평평하게 다듬고 물이 빠지는 구멍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윗 부분에는 넘치는 물이 흘러내리도록 하는 여수구(餘水口)를 주전자 꼭지 모양으로 만들어 놓아서 흐르는 물이 아름다운 곡선을 이루도록 해놓았습니다. 석공의 조그만 수고가 자칫 밋밋할 뻔한 석조를 멋스럽게 만들어 놓았지요?

보문사는 언제 폐사 되었을까

이렇게 해서 '그 까이거 대충' 보문사지 답사를 마쳤습니다. 그런데 보문사는 언제, 왜 폐사된 것일까요?

조선시대 후기에 세워진 대전 탄방동의 도산서원 <연혁지>에 1958년과 1859년 사이에 보문사가 동학사, 고산사, 율사 등과 함께 도산서원을 세우는데 승군을 보내 출역케 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반면 철종 10년(1859)에 편찬된 <공산지> 사찰조에는 보문사가 공주부의 동쪽 50리에 있다가 없어졌다고 나옵니다. 거의 같은 해에 쓰여진 두 기록이 상반되니 어느 쪽을 믿어야 할지 난감하기만 합니다.

보문사가 화재 등 불가항력적인 힘에 의해 급작스럽게 폐사되었기 때문에 양측에 전달된 정보의 속도 차이가 이렇게 엇갈린 기록으로 나타난 게 아닌가 싶습니다. 사역 곳곳과 건물지 주변에는 육안으로도 보일 정도로 불에 그을린 지층이 나타나 있습니다.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집.
안동권씨 유회당 종가집. ⓒ 김유자
마음 같아선 보문산 등산이라도 더 하다 가고 싶지만 일기 예보에 오후부터 약간의 비가 내린다는 소식이 있어 하산을 서두릅니다. 배나무골로 다시 와서 아까 국사봉에서 보았던 그 길을 따라 무수동을 향해 갑니다.

그냥 지나칠까 하다가 길목에서 가까우니 안동 권씨 유회당 종가집에 들렀다 가기로 합니다. 고택은 앞에 연못을 팠는데 그 옆으로 정자와 수령 150여년 쯤 된 느티나무와 은행나무 등이 있어 꽤 고풍스럽습니다.

고택 앞 정자에 앉아서 폐사지를 찾는 의미를 생각해 봅니다.

폐사지 답사는 문화재 답사의 블루오션?

요새 유행하는 '블루오션'이라는 말을 떠올립니다. 잘은 모르지만 차별화와 저비용을 통해 경쟁이 없는 새로운 시장을 창출하려는 전략이 블루오션 전략이라면 어쩌면 폐사지 답사야말로 문화재 답사의 블루오션인지도 모릅니다.

고풍스런 전각이 들어찬 절도 좋지만 아무 건물도 없는 폐사지를 거닐며 역사의 흥망성쇠와 덧없음을 마음에 담아 가는 것도 그럴 듯 해보이지 않는지요?

유회당 종택을 나서려는데 슬슬 가는 실비가 내리기 시작합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