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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인 산문집-따뜻한 밥 한 그릇(큰나,2006)
김사인 산문집-따뜻한 밥 한 그릇(큰나,2006) ⓒ 큰나
독자 여러분, 어떻습니까? 참 좋은 말씀이지요. 이 말씀을 옮기다 나도 모르게 어투가 경어체로 옮겨졌습니다. 그렇습니다. 좋은 말씀 한 자락이 사람의 가슴 속에 닿아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행동을 바꾸기도 합니다.

벌써 매화꽃은 폈고 좀 있으면 벚꽃들이 가득 피어오르겠지요. 세상의 사물을 보면서 "천지간의 섭리가 우리에게 드러내는 큰 공붓거리를"를 만나는 일, 책 한 권을 읽으면서 그것을 깨닫는 일은 우리의 큰 안복(眼福)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 김사인 시인의 이런 말씀과 마음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흑백사진이 또한 그러합니다. 이 빼어난 흑백 사진은 국내외 많은 상을 수상한 원로 사진작가 신철균 선생의 작품입니다.

또 김사인 시인의 귀한 말씀 한 자락을 전해 올리겠습니다.

낮에 잠깐 짬이 나 도봉산 자락을 좀 걸을 수 있었습니다. 크고 작은 바위며 나무들이 흰 눈을 쓴 채로 마치 깊은 묵상에 든 듯이 보였습니다. 계곡 물도 제 꺼풀만 두꺼운 얼음으로 벗어놓고는 본래의 자신 속으로 깊이 돌아가 있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뭐라고 설명하기 어려운, 결코 함부로 할 수 없는 숙연함 같은 것이 겨울 산에는 있는 듯합니다. 겨울 산에는 여름의 끈끈한 치정(癡情)이나 봄가을이 허락하던 얼마간의 어리광스러운 감상, 이런 것이 없습니다. 저 불모의 혹한에 맞서서 바위도 초목도 짐승들도 죽음같이 깊은 잠으로 견디고 있는 듯합니다.

그때 겨울잠은 얼마나 높은 순도의 것일까요. 열반이라는 말의 의미의 한쪽은, 저런 잠의 깊이와 절실한 순수성으로 형상을 드러내는 것이 아닐까요. 저 겨울잠이야말로 존재의 가장 깊은 삼매가 아닐까요. 우리가 치르는 나날의 잠과 한 생애의 죽음이라는 것 또한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닐까요. 혹한과 죽음을 건너가는 섭리 같은 것이 겨울 산의 깊은 잠, 깊은 명상 속에는 있음을 보고 돌아왔습니다. - '겨울 산' 전문.


겨울 산을 산행하다가 "우리가 치르는 나날과 한 생애의 죽음"에 대한 큰 명상을 얻어내는 시인의 순도 높은 말씀이 큰 공부로 다가옵니다. 김사인의 산문집 <따뜻한 밥 한 그릇>은 시각장애우를 위한 CD북으로도 함께 제작되어 전국 장애우 시설에 무료로 보급된다 하니 얼마나 아름답고 따뜻한 일입니까.

김사인 시인의 그 특유의 고귀한 말씀이 전국의 힘든 장애우들게 작은 용기로 다가가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판매 수익금 2%를 '밥퍼나눔운동(다일공동체)'에 기부한다는 일도 참 소중하고 아름다운 일이기는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인연도 크게 다를 바 없겠지요. 서로 길듦과 편해짐이 어느 만큼 깊어지고 길어지면, 어떤 형식이건 작별이 오는 것이겠지요. - '낡은 신발'부분.

우리가 고단한 삶을 살아가면서 자신도 모르게 자꾸 사나워지려고 할 때, 옛날 사진첩들을 꺼내 흑백사진 시절부터 다시 한 번 가만가만 넘겨보는 일도 한 처방이 되지 않을는지요.
- '옛 사진' 부분.

"사람마다 한 숟가락씩 열만 보태면 한 사람 몫의 밥 한 끼니가 된다는 것." 어찌 이렇게 훈훈한 산수(算數)가 있을까요. 모두를 두루 살리는 이처럼 슬기로운 산수가 또 있을까요. - '십시일반' 부분.

삼천 원짜리 슬리퍼 하나와 군밤 천 원어치를 주머니에 넣고 남대문 시장에서 돌아오며, 문득 산다는 건 참 엄숙한 것이라는 생각들이 묵직하게 가슴에 와 닿았습니다. - '남대문시장' 부분.

"산색이 초승달 같다"는 말과, "따뜻한 바람은 향기로운 술과 같다"는 비유입니다. 솜털 오르는 것 같은 봄의 산색을 초승달 같다고 볼 수 있는 감각과 따뜻한 봄바람을 기품 있고 향기로운 술과 같다고 본 감각이 무릎을 칠 만큼 섬세합니다. - '풀과 나무' 부분.


지면의 여유가 없어 길게, 여럿을 인용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김사인 시인의 첫 산문집 <따뜻한 밥 한 그릇>은 앞만 향해 정신없이 달려온 우리들에게 발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는 여유를 주는, 삶의 향기를 전해주는 책입니다. 현대인의 피곤에 지친 삶에 말 그대로 '따뜻한 밥 한 그릇'입니다. 여러분과 그 밥 같이 나누고 싶습니다.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

글-김사인 
시인 김사인은 1955년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했으며, 1982년부터 시와 문학평론을 발표하였다. 시집 <밤에 쓰는 편지> <가만히 좋아하는>과 <박상륭 깊이읽기> 등 몇 권의편저서를 냈으며, 신동엽창작기금과 현대문학상, 대산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동덕여자대학교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BBS FM-라디오 불교방송의 심야 프로그램 <살며 생각하며>를 여러 해째 진행하고 있다. 

사진-신철균 
사진작가 신철균은 1929년에 태어나 1950년대 말부터 사진에 입문했다. 제17회 대한민국미술대전(국전) 입선, 전라북도 미술대전 특선 수회, 아시아 유네스코 사진전 대상(1978) 등을 수상한 원로 작가이다. 서민들의 일상에 나타난 진솔한 삶의 표정과 어린이의 천진스런 모습을 흑백으로 표현하는 작품을 내고 있다. 항구도시 군산에 머물며 창작생활을 하고 있다.


따뜻한 밥 한 그릇

김사인 지음, 신철균 사진, 큰나(시와시학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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