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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을 깔아 주고 있는 모습
짚을 깔아 주고 있는 모습 ⓒ 김현
지난 3월 1일, 딸아이는 일어나자마자 태극기를 찾더니 베란다 창문을 열고 태극기를 달았다. 아들은 학교에서 유관순 열사에 대한 책을 읽어 오라고 했다면서 책을 읽는 시늉을 한다. 넌지시 바라보니 대충대충 읽는다. 그런 아들을 바라보고 아내는 뭐라 잔소릴 하지만 아들은 듣는 둥 마는 둥 한다.

아침을 먹고 시골로 향했다. 소나무밭에 지푸라기를 깔아주고 물꼬를 손보기 위해서다. 작년에 처가의 밭을 빌려 소나무 500그루를 심었다. 그중에 50여 그루가 말라죽었다. 주로 물 빠짐이 안 좋은 곳에 심은 나무들이었다.

@BRI@죽은 나무야 다시 심어도 되지만 나무를 관리하는 일이 여간 일이 아니었다. 소나무밭의 풀 때문이다.

작년엔 소나무 밭의 풀을 매기 위해 처남 식구들과 우리는 땡볕에 쪼그려 앉아 세 번이나 풀을 매었다. 풀을 매는데 아이들까지 동원되었다. 아이들이야 잠시 하다가 지루하면 그만두고 이내 놀이를 하지만 어른들은 꼬박 잡초를 뽑아대도 이틀 정도가 걸렸다.

중학교 졸업 때까진 매일 하다시피 한 일이지만 고등학교 입학 후엔 띄엄띄엄 농사일을 도와주었다. 그러다 결혼 후엔 주말에나 조금씩 바쁜 농상 일을 거들어 주었지만 작년처럼 종일 잡초를 제거하거나 농약을 준 적이 없었다. 다만 내가 원해서 나무를 심은 것이라 요령도 피울 수가 없었다.

ⓒ 김현
경운기로 마당에 있는 지푸라기를 밭에 실어 날랐다. 짚 다발을 차곡차곡 경운기 짐칸에 쌓다 보니 어릴 때 소가 끄는 달구지나 손수레에 볏단을 쌓아 날랐던 기억이 새롭다.

아버지가 쌓은 볏단은 높이 쌓아올려도 무너지지 않고 목적지까지 갔는데, 어린 내가 쌓은 볏단은 이십 미터도 못 가 한쪽으로 기울고, 급기야 길바닥에 무너져 다시 쌓곤 했다.

그때 아버지는 "아무렇게나 쌓는 것 같아도 그렇지 않은 것이여, 요령이 있어야 혀"라면서 "금방 되는 것이간디" 하시며 껄껄 웃으셨다.

생각해보니 아버지는 짚단을 참 잘 쌓으셨다. 노적가리를 쌓을 때도 동네 사람들은 아버질 찾았고, 타작이 끝난 후 짚단을 마당 한쪽에 쌓을 때도 아버지를 찾았다. 특히 지붕보다 높이 짚단을 쌓는 모습은 경이롭기까지 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반듯하게 짚단이 하늘을 향해 올라가는 모습은 어린 나에게 대단해 보였다.

경운기에 짚단을 싣고 밭에 가서 중간마다 던져 놓으면 아내와 처남댁은 양편 밭고랑에 앉아 소나무 사이에 지푸라기를 촘촘히 깔았다. 일을 도와준다며 따라온 아이들은 밭고랑에 앉아 쑥을 캐며 키득거린다. 아이들이나 어른이나 종알종알 이바구(이야기)를 한다.

"언니, 이번엔 고생 덜 하겠죠?"
"이거 깔면 풀 맬 일은 없겠지. 약 주는 일이야 남자들이 하면 될 테고."
"근데 오늘 다 할지 모르겠네요."
"하는 데까지 해 봐야지. 못하면 다음에 해야지 뭐."


처남댁은 아내를 형님이라 하지 않고 언니라고 불렀다. 결혼하기 전부터 부른 호칭을 결혼 후까지 사용하지만 모두 편안하게 생각해서인지 부담 없이 받아드린다.

쑥을 캐며 놀고 있는 아이들
쑥을 캐며 놀고 있는 아이들 ⓒ 김현
처남댁은 서울 토박이다. 서울에 태어나 서울에서 학교를 다녔고, 그곳에서 직장생활을 하면서 처남을 만났다. 그러다 결혼 전에 갑자기 장인께서 돌아가시자 혼자 남은 어머니를 걱정하는 처남의 뜻에 따라 결혼 후에 장모님이 계신 곳으로 이사를 왔다. 그런데 시골 생활을 상당히 좋아한다. 밭일 같은 것도 익숙하지 않은 데도 밭에 나가서 감자를 캐거나 고추를 따고 풀을 매고 하는 것들을 싫어하지 않는다.

지금은 장모님과 함께 살지는 않지만 근방에 살면서 매주 시골에 간다. 그리고 일손을 돕는다. 그래서인지 시골의 일에 서툴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이 좋은지 장모님도 처남댁 칭찬을 자주 한다.

짚단을 나르고 있는데 아이들이 쑥을 한 줌 캐서 보여준다. 조막만 한 손으로 커다란 칼을 들고 쑥을 캐는 모습이 귀엽다. 아들 녀석은 옆에서 구경만 할 뿐 쑥 캐는 일엔 직접 뛰어들지 않는다.

"야, 아들! 너도 하지 왜 안 해?"
"재미없어. 여자들은 놀지도 않고 쑥만 캐고…."
"그럼 너 아빠랑 짚단이나 나르자. 할 수 있겠어?"
"좋아. 나 해 볼래. 나 힘 세다고."
"그래, 그럼 저기 소나무 사이사이에 갔다가 놓아라. 얼마나 잘하나 보자."
"오우케이."


나도 힘 세다구요
나도 힘 세다구요 ⓒ 김현
아들 녀석은 짚단 한 다발을 들고 가서 소나무 사이에 놓는다. 힘들지 않으냐니까 "힘 하나도 안 들어" 하며 뛰기까지 한다. 얼마나 갈까 싶은데 포기하지 않고 한다. 그 대견함에 볼에 뽀뽀를 해줬더니 씩 웃으며 "나 잘하지" 한다.

가만히 보면 일이나 공부나 아이들은 칭찬에 약하다. 어디 아이들뿐이겠는가. 그 누구나 무슨 일을 하는데 조금 부족해도 칭찬을 하면 더 열심히 잘하는 걸 볼 수 있다.

소나무 사이에 짚단을 펴서 꼼꼼히 깔고 있던 아내와 처남댁에게 아이들이 달려가 새참 없느냐고 투정을 한다. 그러고 보니 물 한 모금 안 마시고 한나절을 일한 것 같다. 딸아이에게 가게에 가 음료와 과자를 사오게 하고, 아들에겐 집에 가 물을 가져오게 하여 잠시나마 빈약한 새참을 먹으니 그 맛도 새롭다.

해가 질 때까지 여자들은 짚을 깔고 남자들은 물꼬를 냈다. 오랜만의 삽질에 허리와 어깨가 뻐근하지만 기분만은 좋았다. 어둠이 깔리자 아이들이 집에 가자고 보챈다.

"날도 어둑한데 그만 허고 가드라고."
"그래요. 못한 건 다음에 하게."
"그래도 많이 했네. 올 여름엔 쪼깨 편하겠구먼."


소나무를 등지고 논길을 따라 집에 오는 길. 아이들은 처남이 모는 경운기를 타고 가면서 무어가 좋은지 노래를 부른다. 도시에서 사는 녀석들이 언제 경운기를 타 보았겠는가. 아이들에게 이런 시골생활의 체험은 먼 훗날 괜찮은 추억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본다. 소나무가 큰 병 없이 커 주길 생각하면서.

ⓒ 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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