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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 대덕구 장동 산디마을.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정겹다.
대전 대덕구 장동 산디마을. 옹기종기 모여있는 집들이 정겹다. ⓒ 김유자

대전에서 가장 전통이 살아있는 마을을 꼽는다면 어느 곳일까. 그것은 아마도 대덕의 진산인 계족산 자락 뒤에 있는 산디마을이 아닐까 싶습니다. 산디라는 이름은 아마도 (계족)산의 뒤에 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인 듯 싶습니다.

계족산 북쪽은 골짜기가 좁고 길어서 십리가량 되는데 그 어름에 열 몇 개의 마을이 있어 열두산디라고도 부른다고 합니다. 그 중에서도 계족산 정상 제일 가까운데 있는 마을이 바로 산디마을입니다. 한 층계 한 층계 올라가면서 층층이 집을 지어서 마을 모양이 마치 벌집처럼 생겼다고 하여 붤터라고고 한다더군요. 아무튼 이 산디마을에서는 지금도 해마다 탑신제와 산신령제를 지낸답니다.

음력 정월 대보름을 하루 앞둔 지난 토요일(3.3), 산디마을의 대보름 풍습을 엿보고 싶어 길을 나섰습니다. 마을 들머리에서 좀 떨어진 곳에다 차를 주차시킨 다음 마을로 걸어 들어갑니다.

마을 들머리에 있는 할아버지 탑과 할머니탑.
마을 들머리에 있는 할아버지 탑과 할머니탑. ⓒ 김유자

마을로부터 100m가량 떨어진 이곳 들머리를 마을 사람들은 숲거리라고 부른답니다. 숲거리 길에서 언덕 쪽으로 서 있는 것이 할아버지 탑이지요. 할머니탑을 보려면 길 옆으로 흐르는 내를 건너야 합니다.

탑은 둘다 막돌을 이용해서 원뿔 모양으로 쌓았습니다. 탑 윗돌을 가리켜 '상두석'이라 부른답니다. 정월 열나흘날, 마을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탑제를 지내는데 그때 이 상두석을 백지로 감싸고 왼새끼로 묶어서 옷을 입힌다고 합니다.

탑제를 지내기 열흘 쯤 전에는 제를 주관할 고양주(제관)을 뽑는다고 합니다. 고양주는 집안에 어린아이가 없고 임신한 여인이나 월경하는 여자가 없고 병자도 없어야 된다고 하니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지요?

고양주로 뽑히면 제를 지내기 사흘 전부터 집에 금줄을 치고 황토를 펴서 외부인의 출입을 막고 비린내나는 음식도 먹지 않으며 매일 찬물로 목욕을 한다고 합니다. 그리고 고양주는 낮에 왼새끼 금줄을 꼬아서 탑에 두르고 마을 입구 양쪽에 연결해서 금줄을 칩니다. 저녁 때가 되면 집집마다 불을 밝히고 풍물패는 고양주집에서부터 고사를 지내며 마을을 돌아 탑으로 갑니다. 그리고 고양주는 제물을 진설하고 향을 피우고 제를 올리게 됩니다.

아직 시간(오후 4시)이 일러서인지 마을은 조용하기만 합니다. 예전에 논 가운데 세웠던 달집조차 보이지 않습니다. 동네 마을 회관으로 찾아가 어르신들께 달집은 어디에 세웠는지, 달집 태우기는 하는지 조심조심 여쭤봅니다. 그러나 올해는 달집태우기는 하지 않는다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옵니다. 그러니 탑제는 올리는지, 올린다면 언제쯤이나 하는지 여쭤볼 엄두를 못내고 마을회관을 하릴없이 물러납니다.

마을 뒤쪽에서 올려다 본 사적 355호 계족산성.
마을 뒤쪽에서 올려다 본 사적 355호 계족산성. ⓒ 김유자

별 소득없이 마을을 빠져나오다가 계족산성이 있는 성재를 올려다 봅니다 성재는 산디 동쪽에 있는 높이 431m되는 산봉우리지요. 계족산성이 있는 고개라서 성재가 되고, 성재를 가진 산이어서 산 이름도 고개 이름을 따서 성재라 하였다고 합니다.

산디마을 사람들이 산산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
산디마을 사람들이 산산에게 제사를 지내는 산제당. ⓒ 김유자

산제당 옆에 있는 옻샘.
산제당 옆에 있는 옻샘. ⓒ 김유자

마을 뒤로난 산길을 따라서 계족산성을 바라고 걸어 갑니다. 십여 분가량 산자락을 허위허위 올라가면 계족산을 가로지는 임도가 나오고 그 임도 바로 아래에는 산디마을 사람들이 산신령에게 제를 지내는 산제당이 자리하고 있지요. 매년 음력 10월 3일에 제를 지내는데옛날에는 살아있는 돼지를 당까지 끌고가 잡아서 제를 지냈다고 하는데 요즈음은 잡은 고기를 가지고 가 산제를 지낸다고 합니다.

산제당의 문을 굳게 닫혀 있습니다. 이곳에 여러 차례 왔지만 안을 들여다 볼 기회는 아직 없었습니다. 아마 산신당이니 산신령께서 살고 계시겠지요? 혹 산신령께서 숲거리에서 열리는 탑제 구경을 가셨느지도 모를 일입니다.

산제당 오른쪽 언덕받이에는 샘이 있습니다. 산신께 제사를 지내기 전 이곳에서 목욕제계를 하는가 봅니다. 탑제가 마을의 남녀노소가 다같이 참여하는 대동제의 성격을 띤 것이라면 산신제는 몇몇 제관들과 유지들만이 참석하는 신성한 제의라는 점이 다르다고 합니다.

성재산길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남문과 성벽.
성재산길에서 바라본 계족산성 남문과 성벽. ⓒ 김유자

다시 임도로 올라서서 계족산성으로 올라가는 산길을 찾아 듭니다, 이내 임도에서 똑바로 올라가는 길과 성재를 따라 이어진 길이 만나고 산봉우리 하나를 올라채자 계족산성이 모습을 드러냅니다.

계족산성은 해발 420m의 봉우리에 테를 두르듯 돌을 쌓아 만든 삼국시대 산성으로 성 둘레가 1037m인 대전에서 가장 큰 산성입니다.

금강 하류의 중요한 지점에 위치하고 백제시대 토기조각이 많이 출토되고 있어 백제의 옹산성이 아닌가 추측한답니다. 백제가 멸망 한 뒤 백제부흥군이 이 산성을 근거로 한때 신라군의 진로를 차단시키기도 하였고, 조선 말기에는 동학농민군의 근거지가 되기도 하였다고 전합니다.

남문 근처에 있는 봉수대 자리에서 바라본 대청호 풍경.
남문 근처에 있는 봉수대 자리에서 바라본 대청호 풍경. ⓒ 김유자

남문을 통해서 성안으로 들어갑니다. 조금 더 위로 올라서자 저 멀리 대청호가 한눈에 들어 옵니다. 옛적에 이곳에 봉수대가 있었답니다. 봉수대란 위급함을 연락하는 옛 통신망입니다

동쪽으로는 옥천군 군북면 환산성에 있는 봉수대와 연결되고, 북쪽으로는 청원 문의면 야미산의 봉수대와 연락을 취했다고 하니 아주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던 것이지요. 현재 계족산성에 남아있는 봉수대는 직경이 약 20미터라고 합니다.

봉수대 터에 대한 간략한 안내판이라도 서 있다면 이곳에 오르는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발굴 조사중인 동문 근청의 우물과 저수지.
발굴 조사중인 동문 근청의 우물과 저수지. ⓒ 김유자

동벽 낮은 데에 위치한 우물지와 저수지를 찾아 길을 내려갑니다. 우물지와 저수지는 벌써 몇 년 째 발굴조사중이지요.

계족산성의 성벽은 대개 납작한 자연 할석을 석재로 사용한 내탁공법으로 축조하였습니다. 그러나 동쪽 성벽 약 200m정도는 안과 밖 모두 석재로써 쌓아 올리는 내외협축공법을 이용하였습니다. 저수지 옆에 있는 성벽 사진을 보시면 안쪽 역시 돌로 쌓았다는 걸 알겠지요?

전통의 맥 오래도록 이어졌으면

오랫만에 찾은 산성 구경이 결코 나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산디마을의 탑제나 달집 태우기 등 민속행사를 접하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가슴 한켠에 뭔지 모를 아쉬움이 남는 걸 어찌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가 민속놀이를 볼 때마다 가슴이 따스해지는 건 삶의 뿌리가 거기에 닿아 있기 때문이겠지요. 만약에 이런 민속이 점점 희미해지고 마침내 사라진다면 우리네 삶의 원형을 복원해주는 기억장치들을 잃어버리는 게 될 테지요.

원형이 잘 보존돼 있어 대전광역시 무형문화재 제5호로 지정되기까지한 탑제가 오래도록 보존되었으면 하고 기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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