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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일보> 2월 20일자 1면

생각할수록 코미디다.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작 복지부의 야심찬 기획(국가비전 2030 건강투자전략)으로는 물을 먹고, 엉뚱하게 '정치권 풍향 분석'으로 신문의 1면 머리기사로 오른 것도 그렇지만, 보건복지부 기자들의 '사후처리'가 더 그렇다.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들은 어제 회의를 갖고 <국민일보> 기자를 중징계 했다. 엊그제(2월20일) <국민일보>가 보도한 '한나라당 집권 가능성 99%'라는 기사들이 장관과 약속한 오프더레코드(비보도 요청) 약속을 깼다는 이유다.

비보도 약속을 했다면 지켜주는 것이 맞다. 그렇지 않을 경우 취재원과의 신뢰 관계가 크게 위협받게 되기 때문이다. 약속은 꼭 기자와 취재원 관계가 아니더라도 지키는 것이 인간된 도리이다. 약속을 깬 기자에 대한 자율적인 제재도 어느 정도는 수용할 수 있다.

하지만 이때에도 금도는 있어야 한다. 보건복지부 기자들은 그러나 그 금도를 넘어섰다. 취재원과의 약속을 파기한 것 보다 더 소중한 것을 깼다. 기자들로서는 넘어서는 안 될 선을 넘었다.

비보도 약속을 깬 <국민일보> 기자에게 내린 중징계는 이렇다. 보건복지부와 식품의약품안전청, 질병관리보본부 등 3개 기관에 대해 6개월 동안 출입금지, 보건복지부 관련 행사와 모임에서 완전 배제, 모든 자료 배포 금지 등 3개항이다. 한마디로 보건복지부 근처에는 얼씬거리지 말라는 이야기다. 물론 기자가 꼭 보건복지부에 가야 취재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겠지만, 어쨌든 형식적으로는 '완벽한 취재 봉쇄'다. 기자단 간사는 <국민일보> 기자가 교체되더라도 이 징계는 계속 유효하다는 친절한 설명까지 덧붙였다. <국민일보>에 대한 징계라는 뜻이다. 아무리 비보도 약속을 깼다고 하지만 어떻게 이런 극단적인 결정을 할 수 있었는지 의문이다.

보건복지부 출입기자들의 동료 기자 징계... '심하다'

그러나 이런 징계결정이 코미디인 것은 다른 데 있다. 도대체 누가 보건복지부 출입을 금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기자들이 언제부터 청사 출입까지 막을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는가? 보건복지부 관련 모든 행사와 모임에서 배제한다는 것도 마찬가지다. 언제부터 기자들이 행사 참석자들의 리스트까지 작성할 수 있는 권한을 갖게 됐는가? 보도자료 배포 금지 역시 그동안 동료기자에 대한 기자들의 자율 규제 방법으로 흔히 채택돼 왔던 방법이지만 이 역시 따지고 보면 마찬가지다.

더욱 가관인 것은 이 같은 징계조치가 기사를 쓴 기자뿐만이 아니라 <국민일보> 기자 누구에게나 유효하다는 결정이다. 이런 결정의 배경에는 국민일보 데스크와 편집진이 비보도 약속을 깬 데 대해 공동의 책임이 있다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사실 더 복잡해진다. 기자들의 결정 또한 더 신중했어야 했다.

만약 <국민일보> 편집국 간부들이 비보도 약속이 있었음을 알고도 이를 깨도록 했다면 그 책임을 묻는 것은 <국민일보>에 물을 일이다. 왜 애꿎은 기자에게 가혹한 책임을 묻는가? 이번 결정에 '동의'한 기자들이 이번 결정의 정당성을 주장하자면 먼저 자문해 볼 일이 있다.

"당신은 편집국 간부들이 비보도 약속을 깨고 기사를 쓰라고 할 때 거부할 수 있는가?"

<국민일보>와 기자는 나름대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애쓴 흔적이 있다. 설날 굳이 장관 집까지 찾아가 장관의 말을 다시 들은 이유가 무엇일까?(그날 만난 시간과 대화 내용에 대해서는 유시민 장관과 <국민일보> 기자의 말이 각기 다르다.) 보건복지부 기자들은 아마도 이를 비보도 약속을 깨기 위한 '알리바이' 축적용 정도로 생각한 것 같다. 장관의 해명을 더 신뢰했다.

그럴 수 있다. 그래도 그런 알리바이라도 만들기 위해 애쓴 기자나 <국민일보>의 수고는 정상 참작의 여지도 전혀 없는 일인가? 그렇다면 너무 비정하다. (유시민 장관은 해명서에서 설날 찾아온 <국민일보> 기자와의 대화에서 1주년 기념 기자간담회 이상 다른 이야기는 없었다고 했다. 그 정도 이야기는 있었다는 이야기일 수 있다. 유 장관은 기사를 쓰기 위한 취재 여부인지를 물어 그럴 의도가 전혀 없다는 대답을 들었다고 했다. 하지만 기자는 그날 장관이 요청한 비보도 내용은 보도하지 않았다고 달리 말하고 있다.)

징계 동의한 기자들은 편집국 간부의 지시 거부할 수 있나

비보도 약속 파기를 둘러싼 논란은 언론계에서 심심찮게 제기된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비보도 약속을 했다면 그것을 지켜주는 것이 원칙이다. 하지만, 비보도 약속은 남용되어서는 곤란하다. 더구나 그 약속을 깬 데 대한 보복조치로 기자들이 스스로의 존재 이유 까지를 부정하는 '월권적 결정'을 해서는 곤란하다.

기자들이나 유시민 장관이나 이번 '정국전망' 발언 파문의 근원에 대해서 자성이 필요할 듯싶다. 장관 1주년 기념 자리에서 '비보도' 약속까지 하며 은밀히 주고받은 말이 '정국전망'에 관한 것이라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보건복지부 기자들과 보건복지부 장관이 만난 자리치고는 참으로 '부적절한 대화'이자 '엉뚱한 담합(비보도 약속)'이었다.

물론 '대통령의 복심'이자 한 때는 날카롭던 시사평론가였던 유 장관의 정국전망을 들어보고 싶었을 기자들의 호기심을 이해 못할 바는 아니다. 유 장관 또한 평소에 얼마나 하고 싶었던 말들이었을까. 얼마 전 복지부가 내놓은 국가비전 2030 건강투자전략이 언론에서 홀대를 받은 데 격분한 노무현 대통령이 "몇몇 기자들이 딱 죽치고 앉아 기사의 흐름을 주도해가고 만들어나가는 기자실의 담합실태를 조사하라"는 말이 묘하게 겹쳐지는 풍경이다.

태그:#백병규의 미디어워치, #유시민, #오프더레코드, #비보도 요청, #보건복지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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