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최장집 교수.
ⓒ 오마이뉴스 권우성
노무현 대통령이 또다시 새로운 의제를 던지며 논쟁의 중심에 섰다. 묵은 의제, 새 의제를 거푸 던지며 담론을 이끄는 능력이 탁월하다. 올 1월 9일 개헌 의제를 제기한지 불과 5주 만에 진보진영의 성찰을 촉구하는 의제를 제기한 것이다.

진보진영의 반응이 궁금하던 차에 우석훈 교수의 반론이 <레디앙>에 올라왔다. 우 교수의 글은 반론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기 때문에, 최장집 교수의 주장과 대비하여 내 견해를 피력해 보겠다.

정권이나 정책에 대한 평가는 접어두고 노무현 대통령의 글과 최장집 교수의 주장에 대해서만 평가하도록 하겠다.

대통령은, "학자들이 현실을 해석함에 있어서 현실의 중요한 변수를 외면할 수도 있고 자유로이 온갖 가정을 동원할 수도 있어서 부럽지만,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각오해야 한다"며 서운함을 표명했다.

학자의 이상론과 현실론

학자들의 역할이란 본래 이상론을 설파하는 것이다. 이상론에 입각한 비판이 있어야 퇴보하지 않고 발전할 수 있다. 현실의 정책 입안자들은 그런 비판 중에 수용할 것은 수용하고 버릴 건 버리면 된다. 매사에 일일이 민감하게 반응할 필요는 없다. 이 점을 제외하면 대통령의 견해에 대체로 동의한다.

대통령은 정의감만으로 시국사건 변론을 맡으면서 심오한 이론이 담긴 원론서, 종속이론, 사회구성체이론, 민족경제론,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 식민지 반봉건사회론 등을 섭렵했고 그 이론에 따라 실천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이후 우리 현실은, 우리가 읽고 말하던 이론이 예언했던 방향과는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고 한다.

대통령은 "그동안 제가 들어왔던 논리가 틀렸거나 현실이 논리를 배반한 경우가 많았던 것"이라고도 했다. 또 자신은 논리를 좋아하는 사람이지만, "논리에 빠져 현실에 맹목이 되지 않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 경계해 왔다"며 진보진영의 성찰을 권유했다.

이론은 현실에서 배태되며, 그 이론은 현실에 적용되는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화하는 법이다. 절대적인 이론도, 절대적인 진리도 없다. 남미의 종속이론은 우리 실정에 맞지 않는 이론으로서 80년대 초 잠시 유행하다 사라졌다.

사회구성체론은 하나의 참고서에 불과했다. 식민지 국가독점자본주의론이나 식민지 반봉건사회론은 한국사회의 성격을 규명해보고자 하는 연구자들의 이론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대통령은 "사상체계의 완결성을 신봉하거나, 현실을 사상과 논리체계에 억지로 끼워 맞추는 일"을 경계했다. 학자들도 본받을만한 정신이다.

대통령은 이라크 파병과 농업 개방, FTA, 노동의 유연성, 양극화, 전시작전권, 주한미군 등의 사례를 들어 진보진영을 비판했다. 생각은 다를 수 있어도 틀렸다고 몰아붙이기에는 간단하지 않은 현안들이다. 그러나 진보진영은 과거의 논리와 방식으로 목소리를 높인다.

진보진영에서는 운동의 차원에서 틀렸다고 공세를 취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현안에 따라서는 진보진영의 의제로 수용하여 보수·수구세력과도 전선을 형성할 필요가 있는 게 있다. 복지예산 증액에 따른 세제개편이나 전작권이 그렇다.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이 세금인상과 관련하여 이율배반의 논리로 국민을 현혹하고, 퇴역장성들과 또 역시 '조중동'이 전작권 환수를 반대하는 여론몰이를 할 때 진보진영은 무엇을 했는가? 이런 사례가 한둘이 아니다. 개헌 의제도 마찬가지다.

민주화 세대는 아무 것도 남긴 게 없을까?

@BRI@다음으로 최장집 교수의 주장을 보자. 최 교수는 오로지 '민주화, 정당민주주의'라는 프레임으로 모든 가치를 평가한다. 최 교수는 지난해 9월 29일 <프레시안> 창간 5주년 기획강연에서 '권력화한 386'과 노무현 정부를 신랄하게 비판했다. 그는 "산업화 주도 세대, 냉전 반공 군부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한국 사회에 지울 수 없는 변화를 가져왔다, 그러나 민주화 세대는 무엇을 남기고 있는가?"라고 질타했다.

정말 민주화 세대는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아무 것도 남긴 게 없을까? 이건 너무 극단적인 사고가 아닐까? 노무현 정부에 대한 증오는 극에 달했지만 정작 하는 일 없이 발목이나 잡는 한나라당이나 '조중동'의 잘못은 하찮게 취급하고, 오로지 노무현 정부 책임론만 설파한다. 다음 주장을 보자.

"민주정부가 들어섰다고 하더라도 정책결정은 관료나 전문가들이 다 한다. 그들이 국내 문제를 스스로 찾아 정책을 만들고 해결하려 하는 것도 아니다. 문제는 거의 외부로부터 주어지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까지도 거의 외부에서 주어지니 관료들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합리적인 정책이냐 여부를 성찰하기보다는 외부의 대안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결정해 온 것이 지금 우리가 안고 있는 문제의 원인이 됐다."

절대적으로 맞는 말이다. 나도 참여정부가 관료들, 특히 경제 관료들에 의해 휘둘리는 모습이 안타깝다. 그런데 그 '외부'라는 게 어디일까? 나는 가장 영향력을 크게 미치는 '외부'는 '조중동'이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대책은 자명하다. '조중동'이라는 고리를 끊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최 교수는 거꾸로 본다. 이런 주장이 이어진다.

"나는 조중동이 완전히 독립적인 변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민주주의를 통해 국가권력이 제대로 잘 작동된다면 조중동의 비합리적 논조가 미치는 영향은 굉장히 축소될 수 있다고 본다. 민주주의가 잘 되면, 민주주의를 가이드하는 정부의 정책이 좋으면 우리 사회의 많은 문제들의 중요한 고리인, 거시적 정치 수준에서 경쟁의 건강한 틀을 만들어 낼 수 있고 이것이 연쇄 반응을 일으켜 사회 미시구조의 갈등이 풀려나가는 틀을 만들 수 있다고 본다. 물론 중요한 고리가 풀린다고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렇겠지. 그런 가정 하에선 '조중동'의 영향이 축소될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조건이 아니지 않은가?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게 하는 독립변수가 '조중동'이다. 적어도 '조중동'을 먼저 제어하지 못하면 민주주의가 제대로 작동될 수 없다. 최 교수의 지론인 정당 정치가 제대로 작동되지 않는 원인을 제공하는 것도 '조중동'이다. 한나라당은 '조중동'의 의제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이 마당에 "민주주의가 잘 되면…"이란 가정에서 논리가 전개돼야 할까?

부동산 정책을 두고 보자. 당초 정부는 불로소득 환수를 기조로 하는 정책을 내놓았는데, '조중동'이 공급확대론으로 받아치자 경제 관료들이 흔들렸고 국회는 알맹이 빠진 법을 만들어주었다. 그 후 우여곡절 끝에 망국병의 하나인 부동산이 이제 겨우 잡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것도 국회 태도를 지켜보아야 한다. 지금 부동산정책을 실패라고 규정할 수 있는지, 그래도 되는지, 이 사회 지배 엘리트이기도 한 부동산부자들을 대변하는 '조중동'이 독립변수가 아닌지에 대한 토론이 필요하다.

최 교수는 1998년 <조선일보>가 대통령자문 정책기획위원장이던 자신의 한국전쟁 논문을 터무니없이 왜곡하여 공격하자 소송을 제기한 바 있다. 이 사태에 대해 시민사회단체들은 '<조선일보> 허위왜곡보도 공동대책위원회'를 만들어 대응하였다. 그러다가 최 위원장이 불쑥 소송을 취하함으로써 맥 빠지게 한 일이 있다.

만일 최 교수가 그때 시민사회와 보조를 맞추어 끝까지 대응하고, 정책기획위원장으로서 대통령을 잘 보필하였다면 지금의 상황은 많이 다를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시 국민의 정부는 외환위기 극복을 명분으로 부동산 규제를 모조리 풀어 건설경기를 진작시켰고, 가계대출과 신용카드 남발로 소비를 부추겨 경기를 살렸다. 그 짐을 모두 참여정부가 지고 시작했다고는 생각하지 않은지? 그 대책이 적절한지는 별개로 하고 말이다.

노무현 정부가 잘하든 못하든, 그와는 별개로 진보진영은 진보진영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 해야 할 일은 하지 않고 모든 걸 노무현 탓으로 돌리는 한 한국사회엔 희망이 없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한국언론정보학회 회장, 한일장신대 교수, 전북민언련 공동대표, 민언련 공동대표, 방송콘텐츠진흥재단 이사장 등 역임, 리영희기념사업회 운영위원. 리버럴아츠 미디어연구회 회장, MBC 저널리즘스쿨 강사, 한국미디어리터러시스쿨 강사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