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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인 이야기> 15권
<로마인 이야기> 15권 ⓒ 한길사
내가 처음 <로마인 이야기>와 마주쳤던 것은 1998년 7월이었다. 동네 맞은 편의 대형서점에 들렀을 때였다. 당시 그 서점의 인문 코너 한쪽에 <로마인 이야기>가 1권부터 6권까지 가지런히 놓여있었다.

호기심이 생기기는 했지만 그때는 그냥 '저런 책도 있나보다'라고 생각하고 말았다. <로마인 이야기>를 쓴 일본작가 시오노 나나미가 누구인지도 몰랐고, 하다못해 이 작가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조차도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후로도 그 서점에 자주 드나들었고, 난 그때마다 이상하게도 한쪽에 진열되어있는 <로마인 이야기>에 눈길이 가기 시작했다. 당시에 난 <로마인 이야기>가 6권으로 완간되어있는 상태인줄 알고 있었다. 진열되어있는 시리즈 중에서 6권의 제목은 '팍스 로마나'였다. 마지막 권의 제목으로는 꽤나 그럴듯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하지만 난 그때 당시 여전히 <로마인 이야기>의 구입을 망설이고 있었다. 로마의 역사에 대해서라면 세계사 시간에 배운 것과 영화에서 보았던 것들이 거의 전부나 마찬가지인 시절이었다. 로마에 특별히 관심이 있던 것도 아니고,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가 믿을만한 사람인지도 알지 못했다. 그때 나의 마음은 망설임 그 자체였다. '살까 말까, 저 책을 사면 다른 책을 못 살 텐데...' 하는 우유부단함이 당시 나의 심정이었다.

1998년 9월, 시오노 나나미와 만나다

그러다가 결국 구입한 것은 1998년 9월이었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난 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와 2권 '한니발 전쟁'을 동시에 구입했다. 지금도 1권의 맨 뒷장에는 '1998년 9월 3일' 이라고 내가 적어놓은 구입일자가 남아 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는 열심히 그 책을 읽었다. 읽으면서 내가 미처 몰랐던 것을 한 가지 알게 되었다. 이 책은 6권으로 완간된 것이 아니었다. 시오노 나나미라는 작가는 1992년 부터 시작해서 1년에 한권씩, 2006년에 총 15권으로 이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완성할 예정이라는 것이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1937년생이다. 1998년 당시에도 이미 60세를 넘긴 나이였다. '이야기'라는 제목이 붙은 책이지만 <로마인 이야기>는 엄연히 역사책이다. 적지 않은 나이임에도 역사책을 1년에 한권씩 써서 2006년에 15권으로 완간하겠다니, 이건 전투에 나가면서 스스로 배수의 진을 치는 거나 마찬가지 아닌가. 작가가 스스로 공언을 했기 때문에 성공하면 본전이고, 실패하면 시쳇말로 개망신 당할만한 일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작가의 계획을 알고 나서 내 머릿속에 떠오른 첫 느낌은 '정말로?'라는 의문이었다.

하지만 그런 의문과는 관계없이 나는 정신없이 <로마인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무엇보다도 재미있었기 때문이다. '이야기'라는 제목처럼 이 책을 읽다보니까 마치 입담 좋은 이야기꾼이 내 앞에서 나에게 실제로 이야기를 들려주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시오노 나나미는 당시의 사료뿐만이 아니라 풍부한 지도와 그림 그리고 유쾌한 가정과 추측으로 로마의 역사를 재미나게 풀어가고 있었다. 여러 가지 상황에서 '이랬다면 어땠을까?'라고 가정하기도 하고, '이때 이 사람의 심정은 이렇게 않았을까'라고 짐작하기도 한다.

즐거움과 안타까움을 동시에 준 <로마인 이야기>

<로마인 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
<로마인 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 ⓒ 김준희
그리고 그런 재미의 결정판은 2권 '한니발 전쟁'과 3, 4권 '율리우스 카이사르' 였다.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 중에서 이 세 권은 거의 대부분이 전쟁의 이야기다. 그만큼 박진감이 넘치고 현장감 또한 생생하다. 마치 독자가 칸나에 평원에 서있는 한니발 장군을 바라보는 것처럼, 루비콘 강을 앞에 두고 갈등하고 있는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처럼 당시의 상황을 실감나게 묘사하고 있다.

전투 상황을 묘사하는 것도 그렇다. 2차 포에니전쟁 당시 한니발은 어떤 포진을 사용했고, 이에 맞서는 로마군단은 어떻게 진형을 세웠는지 일일이 그림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니발은 어떻게 코끼리 부대를 이용해서 적진을 혼란시켰는지, 그 후에 어떻게 기병을 이용해서 포위섬멸 전술을 펼쳤는지가 눈앞에 나타난다.

그리고 이런 과정을 통해서 나는 그동안 마치 전설처럼 들어왔던 인물들에 대해서 어느 정도 알게 되었다. 한니발과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 등. 시오노 나나미는 격렬한 전쟁과 전투를 묘사한 뒤에는 항상 남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2차 포에니전쟁 이후에 쓸쓸하게 죽은 한니발 장군 그리고 '배은망덕한 조국이여, 그대는 나의 뼈를 갖지 못할 것이다'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은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 한때 영화를 누렸지만 로마에 멸망당한 카르타고를 바라보는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이야기까지.

나는 98년 가을, 당시에 출간되었던 <로마인 이야기> 여섯 권을 그렇게 순식간에 읽어버렸다. 그리고 그 이후에는 기다림이었다. <로마인 이야기> 7권은 1998년 말에, 8권은 1999년 말에, 9권은 2000년 말에 각각 출간되었다. 1년에 한권씩 나오는 이 시리즈를 기다리는 것은 즐거움이자 동시에 안타까움이기도 했다. 새로운 편이 나왔을 때쯤이면 이전 편의 내용이 머릿속에서 많이 사라진 상태라서, 다시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서 이전 편을 들추어보아야만 했던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몇 해가 지나면서 나는 시오노 나나미의 다른 책들도 찾아서 읽기 시작했다. <전쟁 3부작> <바다의 도시 이야기> <나의 친구 마키아벨리> <체사레 보르자 혹은 우아한 냉혹> 등. 시오노 나나미는 <로마인 이야기>에서처럼 다른 작품들에서도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있다. 그리고 역시 유쾌한 가정과 추측을 곁들여서 이야기를 풀어간다. '이랬다면 어땠을까?', '이런 행동 뒷면에는 이런 생각이 있지 않았을까?'

그렇게 10여 년 동안 책 읽는 재미를 나에게 던져주었던 <로마인 이야기>가 드디어 15권으로 완간되었다. 15권 '로마세계의 종언'을 다 읽은 후 나는 '드디어 끝났구나'란 생각을 했다. 해마다 연말이 되면 '언제 다음 시리즈가 출간되나'하고 마음 졸였던 것도 끝났고, 새로 나온 책의 표지를 바라보고 손으로 만져보면서 책을 펼쳐볼 때의 두근거림도 끝났다. 무엇보다도 이 재미있는 시리즈를 읽는 시간이 끝난 것이다.

시오노 나나미의 또 다른 이야기를 기대하며...

물론 <로마인 이야기>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들에 던져진 비판도 있다. 하지만 이 세상 모든 책들 중에서 비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책이 얼마나 될까. 비판의 일리 있는 면을 수용하면서, 시오노 나나미가 펼쳐놓는 로마의 역사와 인간, 자유로운 역사적 상상력을 즐길 수 있다면 좋지 않을까?

시오노 나나미는 27살에 이탈리아로 건너간 후, 어떤 공식교육기관에도 속하지 않고 혼자서 공부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로마인 이야기> 시리즈를 처음 읽을 당시에 나에게 떠올랐던 많은 의문중 하나는 '주류 역사학자들은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을 어떻게 평할까?'라는 것이었다.

지금은 이런 의문 같은 것은 갖고 있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처럼 심지가 굳은 여자라면 역사학자들이 뭐라고 말을 하건 꿈쩍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기 때문이다. 시오노 나나미정도라면 역사학자들을 앞에 놓고 혼자서 일대 설전을 벌일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도 든다. 갈리아 평원과 소아시아의 전장을 충격과 열광으로 휘젓고 다녔던 율리우스 카이사르처럼.

그렇다면 나도 시오노 나나미의 팬으로서 그런 의문 따위는 접어두는 것이 예의일 것이다. <로마인 이야기>는 이것으로 끝나지만, 시오노 나나미는 또 다른 재미있는 '이야기'를 마련해줄 것이라고 믿는다. 떡줄 사람은 생각지도 않는데 김칫국부터 마시는 식의 기대일지 모르지만, 그래도 이 바람만큼은 접고 싶지 않다. 10여 년 동안 시오노 나나미의 작품을 열심히 읽어온 팬인데, 나에게도 이런 기대정도는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지 않을까?

로마인 이야기 1 (1판 1쇄) -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

시오노 나나미 지음, 김석희 옮김, 한길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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