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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무현 대통령은 지난 1월 11일 청와대 춘추관에서 '4년 연임제' 개헌안 관련 긴급기자간담회를 갖고 "이번 개정은 지금 대통령인 저에게는 해당되는 게 아무 것도 없다"며 세간에 떠돌고 있는 정략적 제안이라는 의구심을 일축했다. `개헌올인`때문에 민생문제등이 소홀해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나오자, `멀티태스킹 `이 가능하다며, 비서진을 가리키고 있다.
ⓒ 오마이뉴스 이종호

점입가경이다. 청와대로부터 비난받아야 하는 대상들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조·중·동'을 대상으로 했던 언론 비판은 언론 전체로 확대된지 오래이다. 언제부터인가 청와대는 '보수언론'이 아닌 '언론'을 향한 비판에 목소리를 높여왔다. 노무현 정부 출범에 기대를 갖고 한동안 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던 매체들에서도 노무현 정부에 대한 비판이 늘어나자, 청와대는 이들 역시 역비판의 대상에 포함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그런가하면 최근 들어서는 '지식인'들도 청와대의 비판 목록에 새로이 추가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이 제안한 개헌문제에 대해 '침묵'했다는 이유에서이다.

청와대가 내놓은 '침묵의 카르텔'론

2월 8일자 청와대브리핑은 홍보수석실 명의의 <'침묵의 동맹’이 부른 공론의 위기- 정치권·언론·지식인의 비겁한 개헌외면을 보며>라는 글을 통해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대한민국엔 지금 거대한 '침묵의 동맹'이 형성돼 있습니다. 그 대상은 대통령의 '개헌 제안'입니다. 동맹에는 언론, 야당, 지식인이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이들은 진보, 보수의 이념적 좌표를 훌쩍 뛰어넘어 동맹 안에서 암묵적 연대로 엮여 있습니다."

바로 다음 날, 노무현 대통령은 정치·공법·헌법학회 회장단과 오찬을 가진 자리에서, 개헌문제에 대한 지식인사회의 소극적 태도를 겨냥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런데 지금 전부 다 덮어버리니까, 이걸 흔히 쓰는 말로 침묵의 카르텔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다 덮어버리니까 반대동맹이 있고 '방관의 동맹'이 있고 나머지는 없는 것 같습니다."

물음이 생긴다. 과연 우리 사회의 지식인들이 노 대통령의 '연내 개헌' 제안에 침묵했다는 이유로 '비겁하다'느니, '침묵의 카르텔'이니 하는 야유를 청와대로부터 들어야하는 것일까? 그 정도로 부도덕한 모습을 보인 것일까?

우선 사실관계부터 바로잡자. 내가 아는 한, 지식인들은 개헌 문제에 대해 '침묵'하지 않았다. 청와대가 가리킨 '지식인'의 범주에 어디까지 포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노 대통령이 개헌제안을 한 이래 그들은 여러 언론매체들을 통해 찬성이든 반대이든 자신들의 의견을 개진했다. 개헌제안에 동조하는 찬성 의견이 기대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해서 지식인들이 침묵했다고 말하는 것은 사실과 다르다.

청와대가 말하고 싶은 바는 아마 이런 것이었으리라. 그동안 대통령 4년 중임제 개헌의 필요성을 말해왔던 지식인들이, 왜 이번 제안에 대해서는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입장으로 돌아선 것일까. 그래서 청와대는 지식인들이 비겁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청와대는 지식인 '침묵'의 의미 읽어야

그러나 노 대통령의 개헌제안에 동조하고 나서지 않은 지식인들을 탓하기 이전에, 청와대는 그 '침묵'의 의미를 읽을 필요가 있다.

노 대통령 개헌제안이 다수 지식인들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면, 그것은 지식인들의 비겁함 때문이 아니라, '연내 개헌'이 지금의 최대 정치적 의제가 되어야 하는데 대한 동의를 얻는데 실패했기 때문이다. '대통령 4년 연임제 개헌'은 현행제도에 비해 상대적인 장점은 있을지언정, 절대적으로 좋은 제도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 대통령 자신도 한때 내각제를 선호했었다. 그러던 노 대통령이 이제는 '대통령 4년 연임제'가 안되면 나라가 결단날 것처럼 그러는 것은 선뜻 납득이 되지 않는다. 대통령 4년 연임제가 노 대통령이 이렇게까지 밀어붙어야 할 정도로 절대적으로 지고지선한 제도냐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더 토론이 필요한 문제이다.

더욱이 대통령의 힘이 여전히 강력해서 '대통령 프리미엄'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한국정치의 문화에서는, 4년 연임제는 곧 임기 8년의 대통령제가 되어버릴 위험이 있다. 4년 연임제가 마치 정의의 깃발인양 주장하며, 이에 동조하지 않는 지식인들을 비겁자로 몰아붙이는 것은 문제를 호도하는 것이다.

더구나 '원포인트 개헌'은 시대 변화를 반영하는 헌법 전반에 관한 손질도 아니고, 단지 권력구조문제에 국한된 것이다. 그같은 개헌을 연내에 하지 않는다고 해서 나라가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니다. 12월 대통령선거를 앞두고 심각한 정치적 논란과 갈등을 초래하면서까지 밀어붙여야 할 합리적인 이유를 발견하기 어렵다.

청와대의 바람과는 달리, 지식인사회가 연내 개헌에 동조하고 나서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들이 특별히 비겁해서라기 보다는, 동조할만한 충분한 근거를 찾지 못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소신에 따른 판단을 '담합'이라니?

또 한가지, 지식인들을 비판하더라도 비판의 격은 필요하다. 개헌에 동조하지 않았다고 해서 언론·야당과 함께 '침묵의 카르텔'을 형성했다고 하는 것은 지나쳐도 너무 지나친 말이다. '카르텔'(cartel)이라는 말이 무엇이던가. 결국 지식인들이 개헌논의 공론화를 막기 위해 언론·야당과 연합 혹은 담합했다는 이야기 아닌가. 소신에 따라 찬성하지 않고 있다고 해서, 부도덕한 공모자처럼 공박을 당해야 하는 것인가. 노 대통령식 표현대로라면 '모욕'이다.

말은 똑바로 하자. 언론·야당·지식인이 카르텔을 형성한 것인 아니라, 청와대가 고립되어 있는 것이다. 청와대 식의 담합논리라면, 자신들을 제외하고는 다수의 국민과 언론·야당·지식인이 다 담합하고 있는 것이니, 그러고 나면 남는 것은 누구인가.

근본적인 문제로 돌아가자. 청와대 브리핑의 글은 '침묵의 동맹'을 비판하며 이렇게 주장하고 있다.

"하나의 사안에 대해 좌에서 우까지 이렇게 목소리를 일치시킨 경우는 근래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듭니다."

그렇다. 바로 그 문제이다. 그러나 개헌문제뿐만이 아니다. 노 대통령과 청와대를 향한 비판에 있어서 보수와 진보의 경계가 무의미해지는 현상은 이미 심화되어왔다. "근래 그 예를 찾아보기 힘들었다"면 너무 둔감했다는 이야기이다.

보수와 진보 사이에 표현과 어법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청와대를 향해 비판하고자 하는 내용 자체는 놀라울 정도로 비슷해지고 있는 현상이 전개되고 있다. 보수언론이 비판하는 문제와 진보언론이 비판하는 문제가 같아지고, 보수정당이 비판하는 문제와 진보정당이 비판하는 문제가 같아지고 있다. 어째서 그럴까. 우리 사회의 진보가 훼절하여 '보수'가 설정한 의제를 추종하고 인기영합주의에 빠져서 그럴까.

시간이 갈수록, 보수나 진보 어느 입장에 서든, 마찬가지의 비판을 할 수밖에 없는 사안들이 늘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이나 노선과 관련된 문제 이전에, 국민 일반 눈높이의 상식선에서 제기되는 문제들이 이어지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대통령 리더십의 특성과 스타일, 국정운영 방식, 인사방식 등과 관련하여 이념을 불문하고 문제제기 하게 되는 일들이 잦아지고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럴수록 노 대통령은 자신만의 판단을 더욱 고집하는 모습을 보여 문제를 악화시키고 있다.

현재 진행중인 개헌논란은 이 같은 문제의 절정을 이루고 있다. 개헌문제에서까지 '지식인'이라는 남의 탓을 할 것이 아니라, 왜 그들이 동의를 거부하는가를 돌아보는 청와대의 모습이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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