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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회사 하원당장군 옆에서 답사지 설명을 하고 있는 조연효 선생님
불회사 하원당장군 옆에서 답사지 설명을 하고 있는 조연효 선생님 ⓒ 전국역사교사모임
"남도 추위도 만만치 않네요."
"예, 많이 춥네요. 그래도 강원도보다는 덜 춥지요?"
"더 추운 거 같은데요."


춥지 않은 겨울에다 남도 답사니까 추위에 고생할 거란 생각은 별로 안 했다. 그런데 옷깃을 파고드는 바람이 매서웠다. 남도 겨울도 추운 날은 강원도 못지않다는 걸 실감하면서 석장승 답사에 나섰다.

처음 만난 장승은 운흥사 석장승 2기였다. 길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서 있는 한 쌍의 장승이다. 왕방울만한 눈에 합죽한 입이 어릴 때 보아온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나무로 만든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의 험상궂은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친근한 모습이다.

운흥사 석장승 - (좌) 하원당장군, (우) 상원주장군
운흥사 석장승 - (좌) 하원당장군, (우) 상원주장군 ⓒ 전국역사교사모임
한 쌍의 장승 중에 할아버지 장승은 '상원주장군', 할머니 장승은 '하원당장군'이란 글자가 몸체에 새겨져 있다.

명색이 장군이면 그럴듯한 위엄과 허세라도 있어야 어울릴 텐데 그런 위엄과 허세는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새겨진 글씨 또한 자유분방하다. 한문을 처음 배우는 아이가 연필에 침 듬뿍 묻혀 공들여 쓴 모습 같다고나 할까.

장군이라기보다는 일상 속의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 그대로다. 대나무로 만든 긴 담뱃대 입에 물려주면 한 모금 달게 빨고 하얀 담배 연기 한숨처럼 내뿜을 것 같다. 어린 시절 할머니의 모습이 그런 기억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천하대장군이나 지하여장군의 험상궂은 표정도 찾아볼 수 없다. 그래도 장군이다. 장승의 생김새도 모양도 천차만별이지만 이름에서만은 공통점이 있다.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 축귀대장군, 토지대장군, 방어대장군, 상원주장군, 하원당장군에서 볼 수 있듯이 모두 장군이란 말이 들어가 있다.

왜 장군이란 명칭을 붙였을까? 주강현의 해석에 의하면 마을이나 사찰을 지켜줄 수호신으로서 장승을 세운 민중들의 바람이 반영된 것이라 한다. 용맹한 '무장(武將)적 수호신'이 되어 마을 또는 사찰을 잘 지켜주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소망이 담겨있다는 것이다.

마을이나 사찰을 지켜주는 수호신인 장승을 해코지 하면 어떻게 될까? 소설이나 판소리의 형태로 전해지는 변강쇠전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볼 수 있다.

천하의 색골 옹녀가 천하의 오입쟁이 변강쇠에게 투정을 부렸다.

"건장한 저 신체에 밤낮 하는 것이 잠자기와 그 노릇 뿐, 굶어죽기 고사하고 우선 얼어죽을 테니 오늘부터 지게 지고 나무나 하여옵소."

옹녀의 투정을 받고서 강쇠가 나무를 하러 갔다. 그런데 하라는 나무는 안 하고 장승을 빼내어 지게에 지고 왔다. 이를 보고 깜짝 놀란 옹녀가 말했다.

"에그 이게 웬일인가. 나무 하러 간다더니 장승 빼어왔네 그려. 나무 암만 귀타 하되 장승 빼어 땐단 말은 듣도 보도 못했소. 만일 패어 때었으면 목신동증 조왕동증 목숨 보전 못할테니 어서 급히 지고 가서 전 자리에 도로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옵소."

그러나 강쇠는 도끼 들고 달려들어 장승을 패어 군불을 지핀다. 이에 함양장승 대방이 발론하여 통문을 보내 조선팔도 장승을 모두 소집하여 장승동증을 발동하여 강쇠를 공격한다. -주강현, 우리문화의 수수께끼 2, 239쪽


변강쇠는 결국 조선팔도 장승들의 공격을 받아 온갖 잡병에 걸려 죽게 된다. 마을이나 사찰을 지켜주는 영물로 장승을 인식하고 있다. 마을이나 사찰을 지켜주는 영물인 장승이 온전하기를 바라는 민중들의 마음이 변강쇠전에 담겨 전하는 것이다.

도교적 민간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산신각
도교적 민간신앙과 불교의 결합을 보여주는 산신각 ⓒ 전국역사교사모임

산신각 내부에 모셔진 영정
산신각 내부에 모셔진 영정 ⓒ 전국역사교사모임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장승은 민간 신앙의 차원에서 이해할 수는 있지만 절을 지키는 수호신으로서의 장승의 의미는 쉽게 수긍하기 어려운 면도 있다. 절에서 굳이 장승을 세워 사찰을 지키는 수호신으로 삼을 이유가 어디에 있었을까?

조선시대 배척의 대상이 되어 지배층 문화에서 소외된 불교가 도교나 민간신앙과 결합해서 신석기 시대 이래의 장승신앙이 부활된 것이라고 한다. 특히 조선 후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 휩쓸고 지나간 시련 속에서 민간신앙과 불교신앙의 결합이 더욱 두드러졌다고 한다.

운흥사, 불회사 등의 사찰 석장승이 대부분 18세기 초에 세워졌다. 이 무렵이 병자호란이 끝난 후 대대적인 절 조성이 이루어지는데 이 시기 절에는 도교적 민간신앙 성격을 내포한 칠성각, 산신각, 삼성각 등이 절 내부에 흡수되어 배치되고 있다고 한다.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이 불교와 결합되어 제작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라고 한다.

불회사 석장승 - (좌) 주장군, (우) 상원당장군
불회사 석장승 - (좌) 주장군, (우) 상원당장군 ⓒ 전국역사교사모임
불회사 석장승도 마주보고 있는 한 쌍이다. 할아버지에 해당되는 장승에 '하원당장군', 할머니에 해당되는 장승에 '주장군'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다. 운흥사 석장승과는 반대였다. 장승의 모습은 운흥사 석장승과 마찬가지로 친근한 할머니 할아버지의 모습이 연상된다.

이들도 장군이다. 당장군, 주장군이 되어 절 입구에서 잡귀, 잡신을 막기 위해 서 있는 것이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뒤 온갖 고통과 시련을 당한 민중들의 마음에 한 발 더 다가서기 위해 도교적 민간신앙의 대상이었던 장승을 절 지킴이로 세우기 시작했다고 한다. 장승의 생김새도 권위적 모습이 아닌 민중 자신들의 모습 그대로였다.

낯선 남도의 칼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어도 운흥사 불회사 석장승은 넉넉하고 여유 있는 표정으로 답사를 하는 선생님들을 말없이 굽어보고 서 있었다.

덧붙이는 글 | 1월 12일부터 1월 15일까지 3박 4일 일정으로 전국역사교사모임이 주관하고 전남역사교사모임이 준비한 자주연수가 있었다. 이번 자주연수의 주제는 '호남 문화의 젖줄, 영산강 문화권을 찾아서'였다. 이 기사는 답사 코스 중의 하나였던 운흥사 및 불회사 석장승을 돌아보고 쓴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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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서 있는 모든 곳이 역사의 현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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