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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김수영 시선집 <거대한 뿌리>. ⓒ 민음사
이미 많이 알려진 익숙한 시들이 우선 보인다. '눈', '폭포', '사령(死靈)', '푸른 하늘을',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풀' 등등.

'사령(死靈)'을 다시 한 번 읽어보고 싶어진다. 사전적으로야 '죽은 사람의 넋'이라는 뜻이겠는데 예전에 읽을 때에는 어딘지 시원스럽지가 않았다. 아마도 '활자'라는 시어에서부터 막혔던 것 같다.

물론 시가 시원스럽게 풀이되는, 풀이할 수 있는 그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렇다고 시가 그저 단어의 나열은 아닌 이상 어떤 형태의 것이든 간에 전하고 있는, 전하려 하는 것은 분명 있을 것이다.

하여 시를 읽는 가운데 점점이 이어보기도 하고 낯선 시어는 찾아보기도 하며 와 닿는 구절은 되읽어보기도 한다. 이때 시행의 순서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 어떤 곳을 먼저 읽어도 상관없다. 그러한 가운데 어떤 부분은 떠올라 또렷해지고 또 어떤 부분은 가라앉아 흐릿해진다. 말하자면 문자의 굵기가 달라지고 소리의 크기가 달라진다.

…활자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나의 靈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벗이여/그대의 말을 고개 숙이고 듣는 것이/그대는 마음에 들지 않겠지/마음에 들지 않아라//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이 황혼도 저 돌벽 아래 잡초도/담장의 푸른 페인트 빛도/저 고요함도 이 고요함도//그대의 정의도 우리들의 섬세도/행동의 죽음에서 나오는/이 욕된 교외에서는/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마음에 들지 않아라//그대는 반짝거리면서 하늘 아래에서/간간이/자유를 말하는데/우스워라 나의 영은 죽어있는 것이 아니냐 (시집 45~46쪽)

'사령'에는 '마음에 들지 않아라'가 되풀이된다. 심지어 "모두 다 마음에 들지 않아라"라고 한다. 왜일까? "영이 죽어 있"기 때문이다. "행동의 죽음" 때문이다.

김수영의 시적 주제는 '자유'라고 김현은 발문에 쓰고 있다. 이 시에도 자유는 나온다. 그러나 활자처럼 반짝거리며 간간이 말하는 그런 자유는 분명 아닐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푸른 하늘을'에서 말하고 있는 '고독해야 하는 혁명'인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시인은 또 다른 시 '그 방을 생각하며'에서는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은 안되고 나는 방만 바꾸어버렸다"라고. "나는 모든 노래를 그 방에 함께 남기고 왔을 게다"라고. 그리고는 "나는 인제 녹슨 펜과 뼈와 광기――/실망의 가벼움을 재산으로 삼을 줄 안다"라고 조금은 우울한 목소리를 낸다.

그럼에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라고 말하는 데서 항존(恒存)하고 있는 어떤 시적 기운을 감지하게 되기도 한다. 그것은 아마도 '그 방'이라는 역사적 경험에서 비롯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많이 알려진 '눈'이라는 시 외에 또 '눈'이라는 6행으로 된 짤막한 시가 있다. 음미하고 되뇌기 좋은 시라는 생각이 든다.

눈이 온 뒤에도 또 내린다//생각하고 난 뒤에도 또 내린다//응아 하고 운 뒤에도 또 내릴까//한꺼번에 생각하고 또 내린다//한 줄 건너 두 줄 건너 또 내릴까//폐허에 폐허에 눈이 내릴까 (시집 118쪽)

김수영의 시에는 무어랄까 '적의감' 같은 것이 감지되기도 한다. '적'이라는 시에서 '적'은 일단 '더운 날 해면같은 것'이고 '나의 양심과 독기를 빨아먹는 문어발같은 것'이다. 그런데 적의 속성을 한 꺼풀 벗기고 보면 그리 간단치가 않다. 양면적이다. 불분명하다.

金海東 ―― 그놈은 항상 약삭빠른 놈이지만 언제나/부하를 사랑했다/ 鄭炳一 ―― 그놈은 내심과 정반대되는 행동만을/해왔고, 그것은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였다/더운 날/적을 運算하고 있으면/아무데에도 적은 없고//시금치 밭에 앉는 흑나비와 주홍나비 모양으로/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 (시집 78~79쪽)

"더운 날 눈이 꺼지듯" 쉽게 화해하기도 하고 쉽게 지워버리기도 한다. 과거는 과거일 뿐 깨끗이 지워버리자고 훌훌 털어버리자고 그래봐야 무슨 소용이 있느냐고 하면서. 그러나 그렇게 해놓고 보면 과거만 없어지는 게 아니라 미래도 없어진다는 사실을 김수영이 말하려 했던 것은 아닐까? "나의 과거와 미래가 숨바꼭질만 한다"고 말이다.

김수영은 또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고 쓴다. "사나웁지도 않"고 "악한이 아니"며 "선량하기까지도 하다"고 말한다. '하…… 그림자가 없다'라는 시이다.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영화관에도 가고/애교도 있다/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시집 54~57쪽)

그러고 보면 다름 아닌 시인 자신도 적인 셈이다. 내가 나를 향하여 겨누고 있는 시선인 셈이다. 그래서 김수영의 시세계를 누군가 '소시민적 성찰'이라고 했던가. '구름의 파수병'이라는 시가 이에 대한 하나의 답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만약에 나라는 사람을 유심히 들여다본다고 하자/그러면 나는 내가 시와는 반역된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라는 시구를 읽으면서 오히려 따끔거리는 것은 바로 내 자신이다.

덧붙이는 글 | * 지은이: 김수영 / 펴낸날: 2003년 12월 1일(개정판11쇄) / 펴낸곳: 민음사


거대한 뿌리

김수영 지음, 민음사(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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