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김재록 인베스투스글로벌 전 회장.
김재록 인베스투스글로벌 전 회장. ⓒ 인베스투스글로벌 제공
"결국 이 법원에 제출된 증거나 자료들로만 가지고는 피고인을 금융질서를 문란케 한 거물금융브로커라고 단정하기에 부족하고, 오히려 피고인은 상당한 정도의 전문지식을 가진 금융 전문가로 인정받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지난 16일 서울 중앙지방법원 형사합의 23부(문용선 부장판사·49)가 내놓은 판결문 일부다. 작년 3월 '제2의 최규선 게이트'라며 온 나라를 들썩였던 이른바 '김재록 게이트'의 법원 판단은 사뭇 달랐다. 적어도 1심 판결로만 보면, 어디에도 '게이트'를 붙이기 어려울 정도다.

문용선 판사는 이날 선고공판에서 판결문을 읽기에 앞서 자신의 생각을 내비쳤다. 이례적인 구술 판결이었다.

그는 "김씨는 악질 죄인이 아닐 수도 있고, 선처받을 만한 사정이 드러날 수 있었다"면서 "한번 피고인이 입은 명예의 손실, 고통, 치욕, 사회에서 입은 상처는 설사 재판에서 무죄 판결이 난다 해도 보상받거나 치유될 수 없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문 부장판사는 그동안 공무원 뇌물 사건에 중형을 선고하는 등 사회지도층 범법행위에 대해선 엄한 처벌을 내려왔다. 또 지난 23일 국민적 관심이 높았던 인혁당 사건에 대해서도 무죄를 선고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를 잇는 거대금융스캔들로 지목됐던 이른바 '김재록 게이트'는 어디로 갔을까. 지난 10개월여 동안 검찰과 김재록 인베스투스글로벌 전 회장, 법원에선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졌을까.

검찰의 전격체포와 6개월간의 초강도 수사

@BRI@검찰의 김 전 회장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는 작년 1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검 중앙수사부는 1월 17일 그를 극비리에 소환하고, 다음날엔 서초동 집과 사무실에 대한 전면적인 압수수색을 진행했다. 당시 금융 시장에선 김 전 회장의 검찰 조사를 두고, 온갖 추측과 루머가 나돌았다.

금융권의 한 고위임원은 "그때 시장에서 서초동(검찰)에서 김 회장을 겨냥하고 있다는 설(說)이 돌았다"면서 "1월에 검찰 수사를 받고 있다는 이야기가 듣고, '사실이구나'라는 생각을 했다"고 회고했다. 그는 이어 "얼마 후 김 회장이 검찰에서 나왔는데, '(검찰에서) 오해가 있었지만 소명이 됐다'는 말을 간접적으로 들었다"고 전했다.

20일께 김 전 회장은 풀려났다. 그리고 두 달이 지난 3월 24일 검찰은 다시 그를 긴급체포했다. 혐의는 크게 두 가지. 지난 2002년 S투자사의 정아무개씨로부터 신동아화재 인수 부탁을 받고 1억 6500만원을 받은 혐의와 2005년 서울 신촌 민자역사와 부천 쇼핑몰 건설 과정에서 자금 대출 청탁을 받고, 이를 성사시켜준 대가로 13억원을 받았다는 것이다.

검찰은 이례적으로 '사안이 중하다', '여죄가 많다'는 표현까지 써 가며, 강도 높은 후속 수사의지를 보였다.

채동욱 대검 수사기획관의 브리핑이 이어졌다. 채 기획관은 "경제부처 관료나 정치권 인사 등에 대한 금품 로비가 있었는지가 수사의 초점"이라고 말했다. 다음날인 25일 검찰은 그를 전격 구속했다.

대다수 언론들은 '거물 금융브로커, 정관계 로비 의혹', '김재록 게이트 터지나' 등을 써가며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일부 보수 언론은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등 2대 정부를 거친 거대 금융스캔들이라며 배후권력 세력을 밝히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김 전 회장을 상대로 검찰의 강도높은 수사는 6개월여 동안 진행됐다. 검찰청사와 서울 구치소를 오가며 조사를 받은 김 전 회장은 정·관계 로비 의혹에 대해 강하게 부인했다. 그는 10여일이 넘도록 단식과 금식을 하기도 했다.

'찻잔 속 태풍'으로 끝난 정·관계 로비 의혹... 법원 "신빙성 없다"

이 과정에서 재계 2위인 현대자동차 그룹에 대한 전격적인 압수수색이 진행됐다. 그룹 비상장 계열사인 글로비스 사장이 구속됐다. 현대차 그룹 비자금 장부와 일부 내용이 공개되면서 여론의 관심은 현대차 비자금 수사로 급격히 옮겨갔다.

채동욱 수사기획관은 당시 "현대차 수사는 큰 지류에 불과하고, 김씨의 정·관계 로비 수사가 본류"라고 말했다. 하지만 검찰의 김재록 전 회장에 대한 수사는 큰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대신 현대차 수사는 정몽구 회장 소환과 구속 등으로 급물살을 탔다. 이후 검찰은 올해 1월16일 1심 법원에서 정 회장에게 징역 6년을 구형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김 전 회장의 정·관계 로비 의혹은 어떻게 됐을까. 검찰 수사가 진행되면서, 법조계와 재계에선 김 전 회장과 친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알려진 전직 경제 고위관료인 L씨를 비롯해, 정부산하 기관장인 O씨, 전 국회의원인 K씨 등의 이름이 거론되기도 했다.

실제로 검찰도 신동아화재 인수건과 관련해 S투자회사의 정아무개씨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정치권 실세인 P씨와 전직 경제 고위관료인 L씨, 경제부처 고위인사인 L씨 등과 친하게 어울렸다는 진술을 받아냈다. 검찰은 이후 김 전 회장이 정씨에게 신동아화재 인수 부탁을 받고 1억 6500만원을 받았다고 밝혔다.

하지만 법원은 검찰의 이같은 주장을 "신빙성이 없다"면서 무죄를 선고했다. 이유는 유력한 증거였던 정씨의 진술이 검찰과 법원에서 오락가락하면서 진실성이 크게 떨어졌기 때문이다. 검찰에서 '김 전 회장에게 로비자금으로 수억원을 줬다'던 정씨는 법원에서 입장을 바꿔 버렸다. 정·관계 인사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법정에서 허위로 진술한 이유에 대해 "검찰이 집요하게 질문하면서, 귀찮게 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법원은 "정씨 진술의 진실성이나 태도의 성실성을 의심스럽다"고 밝혔고, 검찰 스스로 법원 공판 과정에서 정씨에 대한 검찰 조서를 증거로 신청했다가, 철회하기도 했다.

금융권 한 고위인사는 "검찰에서 김 전 회장을 구속하면서 로비 대상자로 정·관계의 내로라하는 사람의 이름들이 나돌았지만 제대로 밝혀진 것이 거의 없지 않나"라면서 "지금 생각해보면, 본류(현대차 수사)와 지류(김재록 수사)가 뒤바뀐 게 아닌가 싶다"고 말했다.

지난해 3월 김재록씨 구속 관련 주요 일간지 보도.
지난해 3월 김재록씨 구속 관련 주요 일간지 보도. ⓒ 조선·중앙일보PDF
10개월 만에 '거물금융브로커'서 '금융전문가'로

작년 9월 20일. 법원은 이례적으로 김 전 회장의 보석을 허가했다. 이유는 검찰이 제기한 공소사실 가운데 법리상 다툼의 여지가 있어, 충분한 방어권을 보장하기 위한 것이었다.

당시 법원쪽에선 "김씨 사건이 검찰 수사 초기만큼 비리 실체가 크지 않은 것 같다"는 반응이 흘러나왔다. 법조계 일부에선 검찰이 '거물 금융브로커'라고 했던 김 전 회장의 혐의들이 일부 회계법인에서 별다른 의식없이 이뤄져 온 것들인데, 언론을 통해 사건을 키운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같은 반응은 3개월 후인 지난 1월 16일 법원의 1심 판결에 그대로 드러났다. 문용선 부장판사는 "김씨가 수사단계에서부터 마치 불법을 자행하며 돌아다닌 '악질 브로커'로 알려진 것은 유감"이라며 검찰을 비판하기도 했다.

그는 이어 "(김씨는) 악질 거물 브로커가 절대 아니고, 오히려 금융전문가로서 새로운 금융기법을 도입해 우리나라 경제 회생에 기여한 점이 인정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논란이 됐던 불법적인 대출 알선 여부에 대해서도 법원은 검찰과 다른 입장을 보였다. 법원은 김 전 회장의 자문 수수료가 모두 회사 계좌로 처리된 점과 김 전 회장 개인이 수수해 사용하지 않은 점, 자금 조달 회사나 조달해 준 금융기관 모두 이익을 얻은 점을 들었다.

법원은 특히 전문적인 신종 금융기법을 통한 자금조달 과정에서 전통적인 의미의 불법적인 대출 알선과 자문 행위의 경계가 명확하게 확립됐다고 볼 수 없는 점을 강조했다. 문 판사는 "금융시장이 선진화되면서 국내 회계법인들은 우리 법이 어디까지 합법의 영역인지 고민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면서 "김씨에 대한 검찰 공소 사실이 대부분 이 애매한 영역에 속한다"고 말했다.

법원이 김 전 회장에 대해 유죄로 인정한 부분은 단순한 편의 제공을 넘어 직접 해당업체와 금융기관 임직원을 중개하거나 자금 조달 자체를 알선하고, 대가로 돈을 받은 경우였다. 결국 법원은 김 전 회장에 대해 일부 알선 수재 혐의를 인정해,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했다.

사라진 김재록 게이트가 남긴 것

법원의 선고에 대해 검찰은 불쾌한 반응을 숨기지 않았다. 검찰의 피의사실 공표에 따른 인권 피해부분에 대해서도, "법원에 기소한 다음에 사건 진행과정을 설명하는 것은 피의사실 공표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알선수재 혐의가 애매하다는 법원 판단에 대해서도, "적법하게 기소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검찰은 고등법원에 항소했다.

김 전 회장쪽은 일단 법원의 판단에 대해 존중한다면서도, 외부와의 접촉은 피하고 있다. 금융계 한 고위인사는 "IMF 이후 경제 전반에 걸쳐 구조조정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선진 금융기법에 따른 각종 자문 행위가 이뤄져 왔다"면서 "이것을 두고 일부에서 불법 알선이라고 하지만, 현행법이 금융 시장의 변화를 좇아가지 못한 측면도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판사의 말대로 이번 판결이 일정하게 금융시장에 가이드라인이 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이 과정에서 김 전 회장에 대해 언론이 제대로 현상을 짚어 보지 않고, 일방적으로 보도하는 바람에 개인과 가족, 회사는 그동안 큰 상처를 입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김 전 회장과 가족들은 그동안 심한 정신·육체적 스트레스를 겪은 것으로 전해졌다. 또 그가 운영해 온 글로벌인베스투스 회사 역시 직원 절반 이상이 떠나는 등 회사 경영에 어려움을 겪었다.

김 전 회장의 한 측근 인사는 "(김 전 회장의) 자녀 가운데는 대인기피 증세를 보이는 등 심한 충격을 받은 것으로 안다"면서 "이번에 일부 명예가 회복된 점도 있지만, 그동안 가족과 회사 등이 입은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라고 토로했다.

1심 판결로만 보면, 10개월 전 거대금융브로커를 통한 대형 정·관계 로비 의혹 사건은 말 그대로 실체가 없는 '의혹'으로 끝나고 말았다. 물론 앞으로 2심 재판 과정에서 어떤 결론이 내려질지 모른다.

그럼에도 김 전 회장 사건은 우리 사회에 여러 시사점을 던져준다. 검찰의 피의자에 대한 인권 보호 중요성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급변하는 경제환경과 경제주체들의 활동에 대한 위법성 논란, 언론들의 여전한 '선정적인 접근'과 '부풀리기식' 보도 태도 역시 마찬가지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대공황의 원인은 대중들이 경제를 너무 몰랐기 때문이다"(故 찰스 킨들버거 MIT경제학교수) 주로 경제 이야기를 다룹니다. 항상 배우고, 듣고, 생각하겠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