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사회적 약자의 인권을 보호할 책임이 있는 법원이 이들의 눈물을 흘리게 해서야 되겠느냐."

광주지방법원 형사2부 재판부가 "장애인에 대한 방청권을 보장하지 않고 있다"고 비판을 받고있다. 재판을 방청하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을 제지했기 때문이다.

재판부 "방청객 위한 것 아니다"... 이미 배치된 통역사 통역 제지

▲ 지난 23일 광주지법 형사2부는 인화학교 성폭력 사건에 대한 심리공판을 진행하면서 배치된 수화통역사의 통역을 제지해 장애인들로 부터 항의를 받았다. 이에 대해 청각장애인 전아무개씨는 알권리 침해라며 인권위에 진정서를 제출했다. 사진은 23일 대책위가 사건 피고인에 대한 엄정 처벌을 요구하는 기자회견 모습.
ⓒ 광주드림 안현주
지난 23일 오후 광주지법 201호 법정에서 열린, 인화학교 장애학생 성폭력(성추행) 사건과 관련 피고인 5명에 대한 심리공판은 방청객과 재판부의 마찰로 진행이 잠시 중단됐다. 이 과정에서 청각장애인 한 명이 강제 퇴장되기도 했다.

대책위 등에 따르면,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는 공판이 진행되는 동안 재판부에 "방청 청각장애인을 위해 수화통역사를 배치해 달라"고 요청해 왔지만 재판부는 아무런 답변도 없이 통역사를 배치하지 않은 채 진행했다. 통역사 배치가 거부된 것이다.

그러나 23일 재판부는 수화통역사 한 명을 배치했다. 청각장애인인 피고인 박아무개씨의 심문을 위한 조치다. 박씨는 심리가 시작된 후 10여분 동안 법정에 모습을 보이지 않았고, 수화통역사는 방청석을 향해 통역를 했다.

이에 대해 재판부는 '수화통역사는 피고인 심문을 위한 통역을 하는 것이며 방청객에게 할 필요가 없다'는 취지로 통역을 제지시켰다. 곧바로 방청석에서 항의가 이어졌다. 인화학교총동문회 청각장애인들은 고함을 지르며 "수화를 통해 통역을 해주지 않는 것은 청각장애인들을 무시하는 것"이라며 "우리도 재판 진행 내용을 알권리가 있다, 통역을 계속 해달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형사2부 부장판사는 "통역사는 자리에 앉으세요"라며 "재판 진행을 방해하는 방청객은 퇴장시키겠다"고 말했다. 10여명이 청각장애인들이 통역을 요구했지만 "수화통역은 재판부, 검찰과 변호인 심리를 돕기 위한 것이지 방청객을 위한 것이 아니"라며 거부했다.

청각장애인인 박모씨가 15분여 후에 법정에 도착한 후 심문 과정에서 통역사가 재판부의 심문을 박씨에게 통역했고, 일부 방청객만 이를 볼 수 있었다. 때문에 대책위 한 관계자와 대학생 봉사자 2명이 주위 청각장애인에게 수화 통역을 해줬는데, 이 중 1명은 법원 직원에 의해 수화통역을 제지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장애인의 알권리 침해... 비장애인들 귀 막는 것과 똑같다" 인권위 진정

▲ 대책위는 수화통역을 제지한 것에 대해 광주지법의 사과와 함께 제도개선을 요구했다. 사진은 한 선거유세장에서 청각장애인들을 위해 수화통역을 해주고 있는 통역사 모습.(자료사진)
ⓒ 오마이뉴스 권우성
법원이 이 처럼 청각장애인을 위한 수화통역 요청을 거부하고 이날 통역을 제지하고 나선 것은, 이에 대한 강제규정이 없기 때문이다. 현행 형사소송법에서는 피고인이 농아자인 경우에 통역인을 제공하고, 소요 경비는 국가가 부담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그러나 청각장애인의 방청에 대한 규정은 없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는 "재판부가 형사소송법 181조 규정을 들어 방청객을 위한 수화통역사를 배치하기는커녕 이를 제지한 것은 청각장애인들의 알권리를 심각하게 침해한 것"이라며 "청각장애 방청객을 위한 수화통역을 제공하지 않는 것은 비장애인들에게 귀를 막고 듣지 말라는 것과 같다"고 비난했다. 대책위는 "법원은 23일 인권침해와 관련 사과하고 모든 장애인들이 평등한 사법행정 서비스를 제공받을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개선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특히 대책위는 재판부가 공개재판을 국민의 기본적 인권으로 보장하고 있는 헌법과 '장애인·노인·임산부 등의 편의증진 보장에 관한 법률'이 규정한 장애인들의 권리를 위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편의증진 보장 법률 '제16조의 2' 1항에는 '장애인은 대통령령이 정하는 공공건물 및 공중이용시설을 이용하고자 할 때에는 시설주에 대하여 안내서비스·수화통역 등의 편의제공을 요청할 수 있다'고 규정돼 있다.

또 1항에 따라 '장애인으로부터 편의제공을 요청받은 시설주는 정당한 사유가 없는 한 이에 응하여야 한다'고 의무 사항임을 적시하고 있다. 형사소송법 규정만을 앞세워 재판부가 통역을 제지하고 통역사 배치 요청을 거부한 것이 쉽게 이해되지 않는 것은 여기있다.

인화학교성폭력대책위 윤민자 공동집행위원장은 "청각장애인에게 공개재판을 받을 권리라는 것은 방청석에 앉아 있을 수 있다는 의미가 아니라 진행 내용을 정확히 알 권리를 의미한다"며 "23일 재판부의 행위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인식을 전형적으로 보여준 사례"라고 비판했다. 이어 "편인증진법률에도 통역사를 요청할 수 있는데 기왕 배치된 통역사에게 통역을 제지하고 나선 것은 장애인을 무시한 처사"라며 "이에 항의하는 것이 재판부 권위를 훼손시키는 것이냐"고 반문했다.

박찬동 공동집행위원장은 "법정에서 재판부의 태도를 보고 눈물을 흘렸다"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법과 재판부의 권위를 세우자는 것인지 의문"이라고 말했다. 특히 그는 "이번 재판이 일반적인 형사사건도 아니고 장애 학생들에게 가해진 성폭력에 대한 인권침해를 다루는 재판을 하면서 이렇게 장애인들이 인권을 무시할 수 있느냐"고 되물었다. '사법은 인권의 최후 보루'라는 사명을 오히려 재판부가 스스로 거부했다는 것이다.

형사소송법 등 제도개선 필요... 법원 "법을 떠나서 아쉽다"

이에 대해 25일 청각장애인 전아무개(34)씨는 국가인권위원회 홈페이지 진정·민원상담실을 통해 진정했다. 전씨는 진정서에서 "재판의 공정성 투명성을 전제로 하는 공개재판의 취지를 훼손할 뿐 아니라 청각언어장애인과 관련된 재판으로써 방청객인 청각언어장애인들의 재판진행과정을 알아야 할 권리를 침해한 심대한 인권침해"라고 강조했다.

'공개재판'이 비장애인에게는 '법정 출입'만으로 그 목적이 모두 달성되지만, 청각장애인들에게 법정 출입을 허용되는 것만으로는 '공개재판'의 목적과 취지를 달성했다고 볼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지난해 7월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은 방청 청각장애인들에게 수화통역 서비스를 제공하도록 의무화 하는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을 대표발의해, 지난 10월 법사위에 상정됐다.

이 이원은 "현행 형사소송법에는 피고인 농아자인 경우에 통역인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지만 청각장애인의 방청에 관해 아무런 규정이 없다"며 "재판공개의 원칙이 충분히 이뤄지지 않고 있다"고 발의 배경을 밝혔다. 이어 "장애인복지법 등에서 장애인의 처우개선을 위해 국가 등이 노력하도록 규정하는 것과 배치된다"며 "법원은 방청을 하는 청각장애인의 신청이 있는 경우 수화통역을 하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의원실 한 관계자는 "장애인들을 위해서 법원에서 점자안내 길을 만들고 휠체어 길을 만드는 것과 통역를 제지하는 행위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며 "재판부의 행위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비판하고 "올 2월이나 4월에는 개정안에 대한 심의가 진행될 것"이라고 밝혔다. 한편 대책위는 오는 29일 광주지법 형사2부 재판부와의 면담을 요청하고 사과 등을 요구할 예정이다.

이에 대해 광주지법 한 관계자는 '편의제공 증진법' 규정과 관련 "그 규정 취지는 장애인들이 법원을 방문했을때 시설이용에 불편을 겪지않도록 하는데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재판 운영과 진행에 관한 권한은 재판장에게 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23일 상황에 대해서는 장애인 배려라는 측면에서 개인적으로 아쉽다"면서 "법원도 국민을 위해서 존재하는 기관인데 할수만 있다면 통역사를 배치하고 싶지만 현실적 제약이 있을 수 있다"고 덧붙였다.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