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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마이뉴스 조경국
어릴 적 살던 경상도에선 이런 얘기들을 많이 했다. "전라도에 가면 모두 김대중을 일러 김 선생님 김 선생님 한다지. 그리고 주유소에 가서 기름 넣어 달라고 해도 경상도 차량이면 기름도 안 넣어주고 말이지."

외가가 전남 나주라 당시 매년 2-3회 정도는 꼬박꼬박 그 곳을 방문하던 나로선 그게 사실이 아니란 것을 알고 있었다. 전혀 전라도를 방문하지 않은 발언의 당사자들에게 '사실이 아님'을 알려줘도 별로 먹혀들지 않았다. 똑같은 사람들이 별로 다르지 않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웃 사람들은 잘 받아들이지 못했다.

@BRI@오영진(37)의 신간만화 <평양 프로젝트>는 그런 점에서 흥미로웠다. 그에게 북한은 특별히 대단한 곳도 아니고, 특별히 비난할 만한 곳이 아니었다. <똘이장군>에 나온 것처럼 '붉은 돼지'나 '살인마'의 모습은 아니었고, 만민이 평등한 '유토피아'의 모습은 더더군다나 아니었다.

저자가 만약 '북한도 사실 살 만하다'느니 '북한 체제 이게 문제'라느니 같은 잣대를 들이댔다면 책을 '휙' 던져버렸을 것이다. 그런 이야기를 워낙 많이 들어서 신물이 나는데다 별 흥미도 없기 때문이다.

아, 그런데 이 책 술술 읽힌다. 한전 직원으로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의 경수로 건설 업무를 위해 오랫동안 북한에 머무른 저자는 경험담과 각종 자료를 토대로 북한 이야기를 풀어놓는다.

만화 속에서 북남교류협력 사업으로 평양의 협력단에 파견나가 취재활동을 벌이는 남측 작가인 주인공 '오공식'(저자의 분신). 그는 북한 담당관에게 '스타크래프트' 게임을 권유하는가 하면, 인민배우에게 사인을 요구하다 망신을 당하기도 한다. 재미있는 것은 오공식의 눈에 비친 북한이다.

그의 눈에 비친 북한 사람들은 남쪽 상표에 '혹'하고, 송혜교 머리를 흉내내며, 드라마에 '푹' 빠져 하루의 피로를 푼다. 뭐야 남쪽 사람들과 별 차이 없잖아? 이렇게 일상의 눈으로 독자들을 무장 해제시킨 뒤 북한이 가진 현실들을 '툭툭' 던져놓는다. 그 속에 '반북'이니 '친북'이니 들어설 여지는 별로 없어 보인다.

좌충우돌하는 오공식의 넉살 앞에 허물어지는 북남교류협력단 총책임자 조동만, 당성이 충실한 김철수, 중학교 교원으로 협력단에 파견 나온 리순옥 등 북한사람들의 모습을 실감나게 묘사한 작가 오영진을 만났다.

"남북 어디에도 치우치지 않은 상식의 눈으로 보고자 했다"

ⓒ 오마이뉴스 조경국
- 책이 재밌다. 북한을 다룬다고 하면 진보나 보수 상관 없이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게 있다. 그런 게 없어서 좋았다. '상식의 눈'으로 북한 보기를 했다는 느낌이다.
"일상의 눈으로 보고 싶었다. 우리는 반공 만화를 보고 자란 세대다. 북한에 대해 잘못된 지식과 인상이 강하다. 이제 시대가 변했으니까, 그에 걸맞은 만화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2004년 말부터 기획을 했다."

- 오공식이라는 주인공이 아주 유쾌한 인물이다. 북에 대해 애정을 갖고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부정적이지도 않다. 북쪽 사람들과 종종 부딪히지만 그 정도의 부딪힘은 사실 우리 일상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이다. 오공식의 자유로움이 만화 전체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맞다. 만약 북한에 대해 애정이 있고, 이해가 깊은 사람이었다면 갈등요소가 없었을 것이다. 대신 재미도 없었겠지. 독자들도 주인공을 자신과는 다른 사람이라고 생각했을 것이고."

- 상식의 눈으로 보고자 해도 사실 균형을 잡기가 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부담감이 많았다. 말투와 단어 선택을 조금만 잘못 해도 '누구 편'이라고 오해를 살 수 있다. <오마이뉴스>에 연재한 것은 그런 점에서 도움이 됐다. 독자들 반응을 보면서 내가 균형을 잘 잡고 있는지 못하는지 판단할 수 있었다."(오영진 기자는 2005년 7월 1일부터 2006년 4월 18일까지 오마이뉴스에 '신북한기행'을 연재했다.)

- 등장인물들 외모가 무척 재미있다. 갈고리처럼 긴 턱, 몸통에 비해 무척 갸냘픈 다리, 얼굴 절반을 덮는 큰 입 등 무척 독특하다.
"만화가 극화체 희화체 뚜렷하게 나눠지는데, <평양프로젝트>는 두 가지 요소가 다 있다. 얼굴은 희화체로 표현했다. 그래서 재미있는 반응들이 많았다. '벌레를 의인화한 것 아냐?' '그림이 이뻤으면 좋겠다'와 같은 반응들이 있었다. 부모들이 우스꽝스런 외모 때문에 아이들 책인 줄 알고 구입했다가, 자신들이 열심히 보고 있다고 사연을 보내오기도 했다."

- 연령대를 어디에 맞춘 것인가.
"<오마이뉴스>에 연재할 때는 솔직히 연령을 고려하지 않았다. 책으로 내면서 청소년들이 재미있어할 만한 에피소드를 많이 넣었다. 스타크래프트 같은 게 대표적인데...중2, 3 이상이면 읽는데 무리가 없다고 본다."

ⓒ <평양프로젝트>
- 재밌게 읽긴 했지만 솔직히 이게 다 사실인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북한 학생들이 TV를 좋아하고, 젊은이들이 우리나라 드라마를 보며, 어린들이 연속극에 푹 빠져 있는 모습은 남쪽과 별 다를 바가 없었기 때문이다.
"거의 대부분 사실이다. 90% 정도. 내 경험과 수기를 참고했으니까."

- 10% 허구는 어떤 부분인가.
"개그적 요소 부분이다. 술 문화와 회식 문화도 상상을 발휘한 부분이고. 그 쪽을 잘 모르겠더라. 누가 어떻게 계산하는지 물어보기도 그렇고."

- 하고 싶은 말을 만화에서 다 표현했나.
"유럽 사람들이 무척 가보고 싶어 하는 도시가 평양이다. 초대형 건물이 많아 도시 자체가 무척 이색적이기 때문이다. 그런 모습을 만화에서 표현하지 못했다. 화보로 만들자는 이야기도 오고 갔는데, 결국 만화로 가는 게 좋다고 결론이 났다."

"아침 달리기 하니 배부른 짓이라며 이상하게 생각해"

- 오공식은 오영진 기자의 분신이다. 비록 한쪽 시각에서 벗어나려고 했다지만 줄곧 남에서 살아왔다. 아무래도 문화적 차이가 없을 순 없지 않겠나. 재미있는 에피소드가 많았을 듯한데.
"아침 달리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아주머니가 아주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왜 뛰냐'고 물었다. 먹을 게 없어 식량난을 겪는 북한 입장에서 볼 때 달리기는 아주 배부른 짓이었다. 그리고 12월 25일이 '크리스마스'라고 말했더니, 사람들이 '그게 뭐냐'고 묻더라. '예수 생일'이라고 했더니, 또 '예수가 누구냐'고 묻더라."

ⓒ 오마이뉴스 조경국
- 북과 남의 차이를 많이 느꼈을 것 같은데.
"우리는 일을 시키는 입장이었고, 북쪽 사람들은 일하는 입장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북쪽 사람들은 게으르고 숙련도가 떨어졌다. 하지만 북쪽 사람들은 '괜찮다. 우리 열심히 한다'고 대답한다. 사회주의 문화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람들은 지금껏 집단적으로 움직였으니까 급할 게 없었던 거다."

- 북한에서 취재는 쉬웠나.
"쉽지 않았다. 북한은 여전히 통제가 심하다. 북한에서 보여주는 집은 거의 뻔하다. 냉장고가 두 대씩 있거나 텔레비전이 있는 집들."

- 자료 수집도 어려웠을 것 같은데.
"어려웠다. 통일 관련 자료는 많았는데, 대부분 정책관련이었다. 실실생활과 관련된 내용이 없었다. 무엇보다 친북, 반북 자료로 뚜렷이 갈려 자료 선택이 어려웠다."

"의무적인 집 배당 정책 부러웠다"

- 북쪽에 오래 머물면서 부럽다고 느낀 점은 없었나.
"음...... 주택정책이 무척 합리적이었다. 북한에선 일정 연령이 되면 기업소에 취직을 시키는데, 기업소 근처에 집을 구해준다. 신혼부부는 방 1칸, 노부모를 모시면 방 2칸 식으로 준다."

- 우리도 그렇게 하면 좋겠다.
"공급면에선 본받을 만한데, 질적으로 보면 좀 따져봐야 한다(웃음). 엘리베이터가 거의 없고... 평양에선 대부분 아파트마다 장작을 땐다. 닭, 돼지도 키우고. 아파트라고 해서 우리쪽 아파트를 생각하면 안 된다."

저자 오영진은 누구?

1970년 전북 정읍에서 태어났다. 대학 재학 시절 만화무크지 <봄>에 작품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했다. 1995년 제1회 서울국제만화애니메이션페스티벌(SICAF) '피어나는 9인전'에 참가했고, 1999년 동아LG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문구점 살인사건>으로 가작을 수상했다. 지은 책으로 <테러리스트>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 <사이시옷>(공저) 등이 있다. 작가의 북한 체류 경험을 바탕으로 쓴 <보통시민 오씨의 548일 북한체류기>는 2003년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제작지원공모작(출판만화 부문)으로 선정되었으며, 제8회 SICAF 코믹어워드 특별상, 2004 대한민국 만화대상 특별상을 수상했고, 일본에서 번역 출판되기도 했다.-<평양프로젝트> 저자 소개 중에서
- 여전히 빈곤한 모양이다. 90년대 중반 대흉작 이후 여전히 빈곤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인가.
"98년 함경남도 신포 함흥평야쪽에 첫 출장을 갔다. 당시 식량부족으로 인해서 북한이 '고난의 행군'을 하던 기간이었는데 참담했다. 함흥평야가 곡창지대였는데도 땅이 바짝 마른 상태였다. 개울가에서 몸을 씻고 있는 모자를 봤는데, 몸이 비쩍 마른 모양을 보니 눈물이 났다. 옆에선 돼지가 물을 마시고 있었다. 당시 북쪽 노동자들이 경수로 현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는데, 점심 한 끼만 먹는데도 살이 찌는 게 보이더라. 그러니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굶주리고 있겠나."

- 마음이 많이 아팠겠다.
"그래서 언젠가 그 사람들 먹으라고 빵을 살짝 놔둔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이 배가 고플 텐데도 먹지 않고 신고를 하더라. 최소한의 자존심이란 생각이 들었다."

- 북한에 또 가고 싶나.
"일 때문에 가고 싶지는 않고(웃음), 배낭여행을 했으면 한다."

이날 오영진 기자와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오 기자는 시종일관 침착한 어조로 보일 듯 말 듯한 웃음을 보이며 북한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속엔 뜨거움도 차가움도 아닌 온화함이 있었다. 그 온도가 <평양프로젝트>의 온도다. 중요한 것 한 가지. 왜 이 책을 냈는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책 첫머리에 나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상을 해본다. 남과 북이 평양과 서울에 작가를 파견한다. 파견된 작가는 현지의 생활상을 취재해 서울과 평양으로 보내온다. 그를 통해 현지와는 낯선, 그러나 동질성 회복을 위해 꼭 필요한 예방주사를 미리 맞는다. 재미있지 않을까?"

평양프로젝트 - 얼렁뚱땅 오공식의 만화 북한기행

오영진 지음, 창비(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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