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책 겉그림
책 겉그림 ⓒ 새론북스
어느 조직이나 내부의 승계나 승진에 대해서 경쟁력이 심한 것은 마찬가지다. 요즘 인기 있는 의학드라마 <하얀거탑>을 보면 의사들의 세계도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흔히 의사들은 환자들을 위해 희생만 하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는 듯하다. 오히려 의사들의 조직세계나 서열제도가 일반 조직보다 더 은밀하고 더 폐쇄적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의사인 민병철씨가 자서전 식으로 쓴 <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새론북스·2006)를 통해 그러한 의사들의 서열제도를 낱낱이 들여다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의사들의 알력다툼만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최고 수장이 되기까지 그가 겪었던 고난과 인내, 병원장으로서 풀어나가야만 했던 갈등국면을 통해 바람직한 의사의 상이 무엇인지 일깨워 준다.

"미국에 유학 가서 인턴을 세 번씩이나 한 것, 미 외과 전문의 자격을 얻고도 미국에 영주하지 않고 한국에 돌아와 살았던 것, 서울대 의과대학 교수직을 적정한 시점에서 사임한 것, 필연적인 동기를 가지고 신영병원을 시작했던 것과 충분한 상승세의 시점에서 그만 둔 것은 결과적으로 옳았다."(서문)

사실 그랬다. 서문에서 밝히는 것처럼 그는 해군 군의관 시절 중위로서 복역하다 곧장 전역하여 유학길에 올랐다. 이 때의 유학이라 함은 레지던트로 가는 길이었는데, 미국에서는 레지던트가 아닌 인턴으로 일해야만 했다. 보통 미국의 의학계에서는 인턴 기간을 길게는 3년 잡고, 그 다음 레지던트로 올라가고, 그리고 치프 레지던트 단계까지 올라간다. 그곳에서 그는 무려 세 차례나 되는 인턴생활을 해야 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험난한 고통과 연단을 잘도 견디어냈다. 레지던트 선발에 있어서도 우리나라의 원통형 선발과는 달리 미국의 피라미드식 선발도 쉽지 않는 길이요, 유색인종이라는 차별과 갈등도 난관 중의 난관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오로지 불철주야로 환자들을 대하는 성실함과 무엇에든 부족함 없는 실력으로 마침내 치프 레지던트까지 올라섰다. 그리고 얼마 뒤 한국인으로서는 최초로 미 외과 전문의 자격까지 따냈다.

"이 사건은 환자와 환자 가족들에겐 희소식이었지만, 내게는 보이지 않는 압박의 정점에 서는 계기가 되었다. 못나도 말이 많고 튀어도 말이 많은 걸로 치면 이 나라 이 땅, 한국이 세계 최고의 금메달감이라는 서글픈 생각을 지을 수가 없었다."(110쪽)

@BRI@미국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한국에 들어왔지만 그는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 당시만 해도 독일 의학풍을 따르고 있어서 미국 의학계는 뒷전으로 밀려난 상태였다. 더욱이 서울대병원이나 다른 병원들도 대부분 학연과 지연이라는 고리가 연결돼 있어서 그 속을 뚫고 들어가기가 쉽지 않았다. 그 까닭에 서울대학병원의 강단과 수술실에 들어가 집도하는 것도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난 뒤였고, 수술마저도 여러 의사들의 견제와 알력다툼 때문에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 뒤 그는 신영병원을 설립하는데 갑자기 부도를 맞게 된다. 하지만 빛 더미에도 굴하지 않고 최고경영자 몫을 감당해 낸 뒤 적절한 시점에 인계하고, 이어 고대부속 구로병원장에 취임한다. 그곳에서는 그야말로 세계 최고의 의료진을 구성한 뒤 그만큼의 의료서비스를 환자와 주민들에게 돌려준다. 또한 정주영 회장과의 만남을 통해 서울 아산병원장에 취임하게 되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난 홍수 속에서 환자들의 생명을 건져낸 그의 위기극복 과정은 두고두고 세간의 화제가 되어 있다.

"나는 이제 의사가 된 지 53년이 된다. 나에게 누군가가 '바람직한 의사의 상'이 어떤 것이냐고 물으면, 미국의 서부활극에 나오는 시골마을의 늙은 의사가 제일 먼저 연상되더구나. 진료를 필요로 하는 환자에게는 의사가 되고, 인생살이 고민이 있는 사람에게는 좋은 상담자가 되고, 마을에서는 존경받는 장로 같은 존재이기도 한 그 시골 의사가 의사로서의 가장 올바른 모습이라고 생각한다."(239쪽)

이는 이 책의 끝머리에 있는 글로서 의학도에 들어선 자신의 조카에게 쓴 편지이다. 그렇지만 이는 자신의 조카뿐만 아니라 이미 의학계에 접어든 모든 히포크라테스들에게 던지는 말이 아닐까 싶다. 그것은 전문의가 된 이후 조직 내부의 승계나 승진의 발판을 삼는데 혈안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시골 무명의 사람들에게까지 칭찬 받을 수 있는 참된 의사가 되어야 한다는 목소리이다.

그렇지만 오늘날의 세태 속에서 참된 의사가 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칭찬 받는 의사들이 없는 것만도 아니다. 우리 사회 어디서나 밀알이 되는 사람들이 있듯이 의사들의 세계에서도 권력에 눈먼 사람만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사회적으로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희생하며 환자들을 제 몸처럼 돌보는 참된 의사들이 존재하는 까닭에서다.

나는 대한민국 외과의사다 - 젊은 히포크라테스에게

민병철 지음, 새론북스(2007)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