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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준비. 양관, 위먼관을 들러 막하연적 사막을 통해 둔황을 떠나는 날이다
출발준비. 양관, 위먼관을 들러 막하연적 사막을 통해 둔황을 떠나는 날이다 ⓒ 오창학
이제 둔황을 떠야하는 날이기에 아침이 소란스럽다. 차량 점검하랴, 물 실으랴, 비상식량과 부식물 점검하랴, 짐칸 뒤 현창 위에 예비연료 확인하랴 7명 모두 맡은 역할대로 출발 준비를 서두른다. 오늘은 그냥 뜨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양관(陽關), 위먼관(玉門關)을 거쳐 막하연적 사막에 들어가야 한다. 내일이나 모레쯤은 무사히 사막을 건너 하미에 닿아 있을 것이다.

차량의 차고를 높이고 다목적 타이어(AT타이어)를 끼우고 윈치를 적재하고 전후 차동제한장치(ARB)까지 설치하며 튜닝에 힘쓴 이유가 다 오늘을 위함이었다 해도 과언은 아니다. 양관과 위먼관까지는 조악하나마 사막 사이로 도로가 이어져 있어 걱정이 없다. 그러나 위먼관을 나서면 약 300km 이상 길 없는 사막을 온전히 건너야 한다.

둔황에서 120km의 유원을 거쳐 다시 유원에서 하미까지 300여km 가량 이어지는 312도로를 버리고 사막을 가로질러 직선으로 하미에 닿는 계획이다. 바로 이 노선이 과거 현장과 혜초가 밟았던 길이거니와 비록 낙타와 말 대신 자동차라는 현대 문명의 이기를 이용하지만 마음만은 그 옛날 구법승과 대상의 느낌을 느껴보고자 함이다.

그러나 걱정스러운 것은 사막을 향해 떠나는 지금이 순간까지도 사막구간 300여 km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오로지 아는 정보라곤 7세기 무렵 현장이 이 사막을 지나며 "가도 가도 끝이 없었다. 머리 위로는 새 한 마리 없고 발밑으로는 벌레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물 한 줌, 풀 한 포기 찾아볼 수 없다"고 말한 내용과 차가 움직일 수 있는 위먼관 근처의 사막지형에 대한 정보뿐.

구글 위성지도를 통해 검토해 봐도 사막 표면의 상태에 대해선 알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국내에서 누가 그 곳을 지났다는 사람도 없고 심지어 중국 내에서 조차 그 구간에 대한 정보를 공개적으로 게시한 자료를 확인할 수 없으니 막상 부딪힌 후 내 눈으로 판단해야할 일이다.

혹여 차가 지날 수 없는 부드러운 모래땅은 아닐까? 와디나 산맥에 의해 가로막히지는 않을까? 차가 문제를 일으키지는 않을까? 연료는 충분할까? 별의별 걱정이 꼬리를 물지만 오히려 적당한 두려움이 심장박동을 빠르게 해서 좋다. 부딪혀 보는 거다. 어차피 이 날을 대비해 작년 한 해 만만의 준비를 했고 유사시 312도로와 둔황-투루판 간 기찻길 방향으로 대피할 계획까지 다 수립되지 않았나. 이젠 행동하는 일만 남았다.

영화세트장으로 되살아난 둔황 고성. 1987년 건설되었다.
영화세트장으로 되살아난 둔황 고성. 1987년 건설되었다. ⓒ 오창학
차량과 대지에 채찍질하듯 내리쬐는 햇살이 아침을 조롱하는 것 같다. 도로 위로 피어오르는 가르며 양관으로 이동한다. 둔황 시가지를 빠져나와 사막 외길로 30여km쯤 달려왔을까? 밍사산 끝자락이 보일 때쯤 왼편에 둔황고성이 보인다. 일본소설 <둔황>을 영화화하기 위해 1987년 중일합작으로 송(宋)대의 성곽을 촬영장으로 복원한 곳이다.

중국영화 <신용문객잔>과 우리 드라마 <해신>의 촬영지이기도 하다. 고증이 제법 잘 되어 있다는 소리를 들은 바 있어 들러볼까 하는 마음이 일었으나 그냥 지나쳤다. 진품이 앞에 있어 마음이 급한데 지금 '모조품'에 눈 돌리랴 싶은 마음이다.

겨우 흙벽으로 남았을 양관과 위먼관은 내게 큰 의미를 갖는다. 자위관에서 느낀 변방요새의 감회 못지않게, 아니 더 극명하게 세상과 세상을 가르는 지경. 더욱 외진 변방의 정회를 느낄 수 있는 곳이 지금 가는 양관과 위먼관이기에 20세기 둔황고성이 눈에 차지 않는 모양이다.

양관가는 길. 이렇게 양관까지 70여 Km가 곧게 뻗은 길이다
양관가는 길. 이렇게 양관까지 70여 Km가 곧게 뻗은 길이다 ⓒ 박재익
사막, 사막, 사막... 아까도 사막이었고 지금도 사막이다. 좌우를 둘러보아도 오로지 시야가 가리지 않는 평지의 삭막한 땅이다. 그 사이로 검은 아스팔트가 호스처럼 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가는 동안 점점이 봉화대를 발견한다. 그 예날 최전방 양관과 위먼관에서 포착한 이상 징후를 신속하게 전달하기 위한 최단거리 통로가 맞나보다. 잠시 차를 세우고 올라가 보니 봉수대는 짚과 흙을 섞어 켜켜이 쌓은 무더기임을 알겠다.

사막에 간간이 보이는 봉수대
사막에 간간이 보이는 봉수대 ⓒ 오창학
현장법사가 갈증으로 죽음의 위기에 이르렀을 때 구해준 이가 혹 이 봉수대의 초소장이 아닐까도 의심해 본다. 그러나 하미(이오)에 이르는 동안의 다섯 망루라는 게 봉수대와 혼용된 것인지를 알 길 없으니 이곳과는 연고를 생각함은 그저 상상에 불과하리라. 20세기 초 그 길을 탐험한 스타인은 현장이 쓰러졌던 다섯 번째 망루 부근이 하미 도착 전 190km라 하였으니 현장과의 연관성은 더더욱 찾을 길 없다.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사막. 사막 가운데 있는 마을의 어귀를 알리는 문이 보인다
봉수대에서 내려다 본 사막. 사막 가운데 있는 마을의 어귀를 알리는 문이 보인다 ⓒ 오창학
도무지 따라잡을 수 없을 것 같은 지평선을 향해 달린 지 70여km. 양관 직전에 오아시스가 나타난다. 황토흙을 건조시켜 어긋나게 쌓아 통풍이 잘 되게 한 포도건조장도 지나고 온통 방풍·방사림으로 뒤덮인 녹색의 지대를 지나니 황량한 사막 초입에 나타나는 옛 요새의 위용.

양관(陽關). 이 황량한 벌판을 바라고 그가 묵묵히 서 있다. 여기서 옥문관까지 이어지는 경계선이 진정한 한나라의 영역이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의 서쪽 영역을 흔히 '서역'이라 이른다. 파미르고원을 넘어 타클라마칸마저 살아서 건넌 자들이 양관에 도착하면 비로소 중국에 도착한 것이 된다.

양관. 테마공원으로 복원되어 있다
양관. 테마공원으로 복원되어 있다 ⓒ 오창학
어쩌면 누란이 보일 것 같은 전경. 불룩한 고지대에 옛 흔적이 남아있다 엄밀히 말하면 양관의 옛 흔적은 다 바스러져 흙으로 남았고 고지 위의 저 축조물은 봉수대이다. 봉수대만으론 썰렁했던지 양관의 모습을 테마공원처럼 잘 복원해 놓았다.

장안을 떠난 대상대가 하서주랑을 통과하여 고비사막의 오아시스 둔황에 이르면 타클라마칸을 우회하기 위해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북쪽 길은 사막을 건너 3주 거리의 하미를 거쳐 톈산산맥 남쪽 기슭의 오아시스 도시들인 투루판 쿠차 악수 튬슉 카슈가르로 이어지는데 이 길을 흔히 '천산남로' 혹은 '서역북로'라 한다. 남쪽 길은 티벳 북쪽의 산맥과 사막 가장자리 사이 오아시스들 즉 미란, 엔데레, 니야, 호탄을 지나 카슈가르로 이어지는데 이 길 '서역남로(오아시스 남로)'라 부른다.

이곳 양관으로 나가게 되면 서역남로에 이르는 것이고 위먼관으로 나간다면 서역북로에 접어드는 것인데 결국 두 길 모두 카슈가르에서 만난다.

우리의 여정은 사막 북쪽 길을 통해 하미, 투루판을 거쳐 카슈가르에 이른 후 오아시스 남로를 역류해 카슈가르-호탄-핀펑-치에모-뤄창까지 오되 둔황으로 들어오지 않고 '하늘길'이라 불리는 티벳 쪽 실크로드를 향해 아얼진산을 넘는 것이다. 쉽지 않은 여정이로되 벌써 1/3을 넘겨 움직였다.

양관의 봉수대 유적. 저 멀리 고비 너머 타클라마칸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양관의 봉수대 유적. 저 멀리 고비 너머 타클라마칸을 응시하고 있는 듯하다 ⓒ 오창학
붉은 모래 언덕의 유적을 보고 있노라니 "서쪽 양관에 나가면 아는 사람이 없으리니." 이 한 귀절이 절실하다. 시안을 떠나올 때 왕유의 이별가 '송원이사안서(送元二使安西)'를 떠올리긴 하였으나 그 글귀가 이곳에서 이토록 절절하게 애를 끊을 줄 몰랐다.

渭城朝雨浥輕塵 위성 아침비가 가벼운 먼지를 적시우니
客舍靑靑柳色新 객사에 푸릇푸릇 버드나무빛 싱그럽다
勸君更盡一杯酒 그대에게 권하노니 다시 술 한잔 다 마시게
西出陽關無故人 서쪽으로 양관을 나서면 친구가 없으리니


왜 양관에 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에 이 시가 새겨져야 했는지 이제는 알겠다. 특히나 우린 시안을 나서 이별장소인 위성(渭城)을 거쳐 육로로, 육로로 차를 몰아 여기 양관에까지 도달한 이들이 아니겠나. 더구나 최초 출발지는 장안보다도 먼 한국이다.

한반도 인천을 떠난 차가 4000Km를 달려 양관에 닿았다
한반도 인천을 떠난 차가 4000Km를 달려 양관에 닿았다 ⓒ 오창학
비록 장안(시안)을 떠나올 때 술 한 잔 받은 처지 아니나 서쪽 양관에 나서면 아는 이 없으리란 건 알았다. 그러나 한반도에서 예까지 그리 먼 길을 달려 막상 황량한 가운데 놓이니 쓸쓸한 감회가 가득하다.

양관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쪽 사막. 이대로 향하면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고 그곳엔 누란왕국의 유적이 있다
양관 봉수대에서 바라본 서쪽 사막. 이대로 향하면 타클라마칸 사막에 이르고 그곳엔 누란왕국의 유적이 있다 ⓒ 박재익
이 문을 넘어서 서쪽으로 서쪽으로 나아가면 누란 왕국이다. 열기가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사막 저편에, 지금은 모래 속에 잠든 왕국 누란이 있다. 오아시스 남로 상에서 중계무역으로 번영한 도시인데 교통의 요지라서 부를 얻었던 만큼 주변 강대국의 시달림에 바람 잘 날 없었다. 중국과 흉노사이에서 힘겹게 양다리 외교로 명을 이어야했던 안쓰러운 역사. 그러나 불행히도 역사가 언제나 깡패들의 편이 아닌 적 있었는가.

기원전 108년 한무제의 군대에 굴복한 누란왕은 한나라 장수 앞에 끌려와 한나라의 부하가 될 것을 서약하고 장남을 인질로 빼앗긴다. 그러나 한의 군대가 철수하기 무섭게 흉노가 쳐들어와 충성서약을 받아내고 급기야는 흉노의 강압에 못 이겨 흉노와 한나라의 싸움에 출병한다. 불행한 누란왕은 전투에 패하고 장안으로 압송되는 운명을 맞는다.

아, 이것이 어디 변방 오아시스 도시들 중 누란에 국한된 운명이었겠으며 고대 2100년 전 이야기에 머무르는 것이겠는가. 누천년 세월이 흐른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약탈의 역사는 계속된다.

양관을 나서 위먼관으로
양관을 나서 위먼관으로 ⓒ 박재익
변방에 선 황량함과 역사 반복의 슬픈 상념을 털고 양관을 떠난다. 차 머리를 위먼관에 두고 힘차게 가속패달을 밟는다. 사막의 모래를 무겁게 튕겨내는 바퀴의 느낌이 그대로 전해진다.

위먼관-하미 구간 막하연적 사막 횡단 계획도

▲ 막하연적 횡단 계획도

둔황에서 양관으로 70Km 이동 후 사막구간 도로를 통해 위먼관으로 80Km이동.

위먼관에서 숨을 고른 후 현장법사가 넘었던 막하연적 사막 진입. 약 300여 Km 구간을 1박2일, 혹은 2박3일 소요로 하미까지 횡단할 예정임.

연료부족 및 차량 결함, 장애물 출현 시 기차길이 있는 오아시스 지대로 진입하여 312도로를 타고 하미에 도착할 계획. / 오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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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서.화에 능하고 길떠남에 두려움이 없는 생활인. 자동차 지구 여행의 꿈을 안고 산다. 2006년 자신의 사륜구동으로 중국구간 14000Km를 답사한 바 있다. 저서 <네 바퀴로 가는 실크로드>(랜덤하우스,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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