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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희
ⓒ 왕소희
젠틀 바이삽은 살인자였다. 일을 하다 언덕 아래를 내려다보면 멀리서 마른 풀 숲을 헤치고 하염없이 걸어 다니던 사람. 늘 점잖은 모습과 나직한 목소리 때문에 우리는 그를 젠틀(gentle:신사) 바이삽(brother)이라고 불렀다.

어느 날 나는 그 젠틀 바이삽과 같이 점심식사를 하게 되었다. 오전 일을 마친 대여섯 명의 사람들이 바위에 앉아서 식사준비를 하고 있는데 그가 지나갔다.

"바이삽! 이리 오세요. 같이 식사해요!"
람이 젠틀 바이삽을 불렀다. 하지만 그는 연한 미소만 띄울 뿐 그대로 우릴 지나치려했다.

"그러지 마시고 이리 오세요."
람은 그쪽으로 뛰어가 기어이 그를 붙들고 왔다.

그때 처음으로 젠틀 바이삽을 가까이서 보았다. 늘 조용한 모습만 보고 그를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우연히 그가 살인자였다는 말을 듣고부터는 그가 무서웠던 터였다.

바위에 보자기를 펼치고 짜파티, 가지 커리, 빠니르, 야채샐러드 등을 늘어놓았다. 그중 빠니르는 인도식 치즈로 서민들에겐 꽤 비싼 음식이었다. 람은 눈짓으로 젠틀 바이삽에게 빠니르를 권하라고 했다. 하지만 젠틀 바이삽의 짜파티에 빠니르를 얹어 주는 내 손은 달달 떨리는 듯했다.

"아니, 아니… 괜찮은데."

바이삽은 그 엷은 미소를 지으며 자꾸 사양을 했다. 그러자 람이 빠니르를 듬뿍 집어 그의 짜파티 위에 얹어 주었다. 젠틀 바이삽은 말이 없었다. 우리도 말이 없어졌다.

식사가 끝나고 물 컵 대신 감자 칩 봉지에 물을 따라 마시면서도 나는 은빛 봉지 너머로 힐끔 힐끔 그를 훔쳐보았다. 갑자기 돌멩이라도 집어 들면 어떡해! 그런데 도대체 왜 사람을 죽였을까? 저렇게 평온한 얼굴로. 우리는 바이삽의 비밀을 캐기 시작했다.

ⓒ 왕소희
사실 그에게는 젠틀과는 거리가 먼 비밀이 있었다. 동네사람들은 쉬쉬하면서 이야기를 해주었다.

"그는 아주 좋은 사람인데 사람을 죽였어. 감옥에도 갔었고. 거기서 6년형을 받았는데 3년쯤 살다 나왔을 거야."
"왜요? 바이삽이 착해서 형을 감해줬나요?"
"아니, 인도 감옥에선 하루를 밤, 낮으로 구분해서 이틀로 계산해 주거든."
"네!? 하루가 이틀이라고요?"

하룻밤을 자고 나면 이틀이 지나는 신기한 감옥에서 3년을 아니 6년을 보낸 바이삽은 세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바이삽은 왜 혼자 살아요? 키도 크고 잘생겼고 목소리도 차분한데. 바이삽 나이가 거의 쉰은 넘은 것 같은데…. 결혼했었는데 와이프가 죽었나요?"
"아니, 그는 결혼한 적이 없어. 실은 살인자가 된 것도 그것 때문이고."
"왜요? 왜!"
"아무튼 그래. 하지만 그는 좋은 사람이야. 죽여야 할 사람을 죽였으니까."

우리의 궁금증은 폭발 직전이었지만 이 부분에서 사람들은 갑자기 입을 다물어 버렸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바이삽의 발가락은 모두 밖을 향해서 꺾어져 굳어버렸다. 그 이상을 알 수는 없었다. 확실한건 그가 살인자라는 것 뿐.

하지만 우리는 짐작할 수 있었다. 인도에는 그런 사랑얘기가 많다. 이루지 못한 사랑과 그 때문에 벌어지는 끔찍한 사건들. 아주 예민한 부분이기 때문에 이야기를 꺼내기 쉽진 않지만.

인도에서 결혼을 하려면 카스트, 지역, 종교, 언어 등 복잡한 계산이 따른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도 그런 것을 계산해 놓고 사랑을 시작할 수 없다.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이 있어도 그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눈물의 결혼식을 치르는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젠틀 바이삽도 그랬을 것이다.

ⓒ 왕소희
한참 일을 하다가 언덕아래 들판을 내려다보면 하염없이 걷고 있는 젠틀 바이삽이 보였다. 그는 과거 어디쯤을 헤매고 있는 것일까?

누구든 자신의 사랑을 생각하면 아련하고 마음이 찡해지는 순간이 있다. 난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란 노래를 들을 때마다 눈물이 났다. 가끔 오후에 여유가 생기면 뜨거운 태양을 피해 서늘한 진흙집에 앉아 음악을 듣곤 했다. 노트북에서 흘러나오는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작은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따뜻한 빛처럼 내 마음을 안아주었다.

하지만 바이삽의 추억은 그를 안아 줄 여유조차 없어 보인다. 그는 살인자. 그래도 그의 마음속 알함브라 궁전엔 햇볕이 쏟아져 내리고 있으리라. 어느 한 구석은 따뜻하리라. 젠틀 바이삽은 오늘도 집과 반대 방향으로 목적도 없이 걷고 있었다.

ⓒ 왕소희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미디어 다음, 행복닷컴, maywang.co.kr 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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