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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 기슭의 절벽
바다 기슭의 절벽 ⓒ 김대갑
마을은 발칵 뒤집혔다. 백주 대낮에 처녀가 바다 속으로 빠져 죽다니. 그것도 나이 어린 기생이 삶의 터전인 앞바다에 빠져 죽었으니 사단도 이런 사단이 없었다. 예로부터 처녀가 물에 빠져 죽으면 마을에는 재앙이 생기기 마련이다. 큰일이 난 것이다. 빨리 시체를 찾아 원혼을 달래주는 굿을 지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마을에는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재앙이 닥칠 것이다.

마을 사람들은 그날부터 안간힘을 쓰면서 해랑의 시체를 찾는 일에 몰두했다. 시쳇말로 돌이 갓 지난 아이와 곧 죽을 노인을 제외하고는 온 마을 사람들이 총동원되었다. 사흘 밤낮을 횃불을 지피며 시체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해랑의 넋이 빠져나간 육신은 찾을 수 없었다. 장차 이 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해령산
해령산 ⓒ 김대갑
결국 어민들은 관아에서 이 문제를 해결해 줄 것을 간청했다. 그들은 연일 명주관아를 찾아가 해랑의 넋을 달랠 방도를 물어보았다. 관아에서도 여간 골치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백성들의 민원도 민원이지만 해랑이 관기인지라 그 관리 소홀의 책임을 누군가가 져야 했다.

그러나 아무도 물에 빠져 죽은 관기의 죽음에 대해 선뜻 해결책을 내놓으려 하지 않았다. 서로 눈치만 볼 뿐이었다. 명주 현감은 어민들과 아전들의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가만 쳐다보다가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들은 현감의 최종적인 판단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해는 어느덧 뉘엿뉘엿 긴 그림자를 끌며 서쪽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동헌 마당에 지핀 횃불에서 붉고 노란 불땀들이 하나 둘 켜졌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을까. 마침내 현감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해랑의 시신 찾는 것을 포기하라. 대신 해랑이 떨어졌던 자리에 해랑당이라는 사당을 지어 그의 넋을 위로하라. 그리고 그가 처녀로 죽었으니 처녀의 혼을 달래기 위해 남자의 신(腎)을 바쳐야 할 것이다.'

나무로 만든 남근
나무로 만든 남근 ⓒ 김대갑
마을 사람들과 아전들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모두 현감의 절묘한 대책에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렇게 하면 되겠구나.

그 후 해랑이 그네를 타던 절벽 위에는 해랑당이라는 작고 아담한 사당이 설치되었다. 사당 안에는 붉은 치마와 초록 저고리를 입고 머리는 땋아 내린 해랑의 초상화가 걸렸다. 그리고 그 해랑의 옆에는 향나무로 만든 남근을 새끼줄로 매달아 놓았다. 처녀로 죽은 해랑에게 남근을 바쳐 음양의 조화를 이루도록 만든 것이었다.

그 후 마을에서는 1년에 2번, 즉 정월 보름과 구월 구일에 해랑을 달래는 굿을 지냈으며 굿을 할 때는 반드시 목재로 깎아 만든 남근을 바쳤다. 마을은 늘 풍요로웠으며 풍랑과 해일은 마을을 비켜가곤 했다. 모두 생업에 성실하였으며 이 모든 것은 마을을 굽어보는 해랑당의 영험이라고 굳게 믿었다.

안인진리 전경
안인진리 전경 ⓒ 김대갑
그런데 해랑은 목재로 만든 남근에만 만족하지 못한 것 같았다. 근대(60년 전)에 들어 갑자기 어떤 부인이 실성하더니 해랑당을 오르내리면서 해랑과 김대부를 혼인시켜야 한다고 지껄이기 시작했다. 해랑이 그 부인에게 빙의라도 했는지, 자신은 김대부와 혼인하고 싶으니 혼인시켜달라고 연일 성화였다.

마을은 다시 발칵 뒤집혔다. 해랑의 음원(陰原) 탓인지는 몰라도 잔잔하던 앞바다에 거센 풍랑까지 일기 시작했다. 방법은 오직 하나. 해랑을 정식으로 시집보내는 것이었다. 문제는 김대부를 어떻게 모시느냐였다.

고민하던 마을 사람들은 결국 도포에 갓을 쓴 김대부의 초상화를 장만했다. 또한 김대부지신위라는 위패를 만든 후에 정식으로 해랑과 영혼 결혼식을 시켜주고 해랑의 옆에 함께 모셨다. 그랬더니 실성한 부인이 제정신으로 돌아오게 되었고 이 후에는 남근을 깎아 바치는 습속을 폐지하게 되었다. 만일 해랑에게 남근을 바친다면 이는 간통을 시키는 거나 마찬가지기 때문이었다.

살짝 엿보이는 성황당
살짝 엿보이는 성황당 ⓒ 김대갑
1968년의 일이라고 한다. 울진의 후릿배(2~3명이 타고서 전어를 잡는 소형배) 업자가 풍어를 바라면서 해랑당에 남근을 바치는 제를 올렸다고 한다. 그런데 제를 마친 업자가 해령산에서 내려오다가 바로 피를 쏟고 죽고 말았다는 것이다.

해랑이 이미 결혼한 몸인 줄 몰랐던 업자가 본의 아니게 해랑에게 간통죄를 범하게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대목에서는 유교식 사고방식이 진하게 배어나온다. 칠거지악이라는 미명하에 아녀자의 행위를 엄격히 제한했던 조선식 유교주의가 한적한 어촌의 샤머니즘 제사에까지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위 이야기는 강릉시 강동면의 한적한 어촌인 안인진리에 전해져 오는 이야기다. 안인진리는 1리와 2리로 나뉜다. 서낭제를 주도하는 마을은 안인진 2리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지역에서는 지난 1996년에 잠수함 침투 사건이 벌어진 바가 있다. 인근에 이 잠수함을 전시한 통일공원이 있어 오가는 사람들의 발길을 잡기도 한다.

안인진리는 고성군의 문암리, 삼척시 갈남리와 더불어 대표적인 남성기 봉납 제의가 행해졌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부부신을 좌정한 터라 문암리와 갈남리와는 달리 남성기를 봉납하지 않는다. 울진의 후릿배 업자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는 것은 남성기 봉납 제의를 더 이상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한 경고의 뜻도 들어 있는 것이다.

강원 어촌 지역의 남성기 봉납 제의에 대해서는 여러 학자들이 활발하게 연구했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학자는 아무래도 국립민속박물관 연구과장을 지낸 김종대 박사일 것이다. 그는 우리 나라 성민속에 관한 다양한 저술활동을 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한국 민간 신앙의 실체와 전승>이란 책은 조사 규모나 내용의 깊이에 있어서 타의 추종을 불허할 것이다.

안인진리에 대한 이야기는 위 책 중 <강원도 해안지방의 성기신앙의 형성과 그 전승적 특징>에 잘 나와 있다. 그외에 김태곤씨의 <한국민간신앙연구>라는 책에도 잘 나와 있다.

나무로 만든 남근을 깎아 바쳤던 성기봉납제의에는 원통하게 죽은 처녀신의 원을 풀어줌과 동시에 풍어를 기원하는 민초들의 염원이 함축되어 있다. 가장 중요한 삶의 터전인 바다에서 일어날 사고를 방지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보장해달라는 원이 숨어 있는 것이다. 예로부터 음양의 조화를 최고로 쳤던 우리 조상들의 열린 성의식이 묻어 있는 것이 바로 남성기 봉납 제의인 것이다.

아쉽게도 현재 해랑당과 성황당은 일반인이 출입할 수 없다. 해령산의 꼭대기에는 24시간 돌아가는 레이더와 해안을 감시하는 군부대가 있기 때문이다. 아쉽고 또 아쉽지만 먼 발치에서나마 해랑당과 성황당의 지붕 끄트머리만 볼 수밖에.

이 땅에 전쟁의 기운이 완전히 가시는 날, 해랑당은 그 붉은 치마의 향내를 아름답고도 소박하게 보여줄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유포터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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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스토리텔링 전문가. <영화처럼 재미있는 부산>,<토요일에 떠나는 부산의 박물관 여행>. <잃어버린 왕국, 가야를 찾아서>저자. 단편소설집, 프러시안 블루 출간. 광범위한 글쓰기에 매진하고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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