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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달팽이들의 포엠콘서트' 공연 장면 -진행을 맡은 나무(박양희) 달팽이가 가 다른 달팽이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들의 포엠콘서트' 공연 장면 -진행을 맡은 나무(박양희) 달팽이가 가 다른 달팽이 가족들을 소개하고 있다. ⓒ 안준철
어릴 적 아버지는 기타 연주자였다. 직업이 공무원이셨지만 마을에서 노래자랑이 열리기라도 하면 아버지는 기타는 매고 무대에 서 계시곤 했다.

가끔 술이 거나하게 취하시면 어린 나를 불끈 들어 벽장에 올려놓고 노래를 시키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신이 나서 노래를 불렀다. 노래 값으로 주신 10원짜리 동전 때문만은 아니었다.

아버지를 닮아 무대 체질인 나에게 벽장은 아주 훌륭한 무대 역할을 해주었던 것이다.

그런 전력(?) 때문일까? 나에게 몇 가지 조건만 갖추어진다면 꼭 하고 싶은 것이 있다. 한 달에 한 번씩 '시를 노래하는 달팽이들의 포엠콘서트(이하 포엠콘서트)' 공연을 보러가는 것, 바로 그것이다.

내가 만약 광주에 살고 있다면, 광주에 살지 않아도 승용차가 있다면, 승용차가 없어도 아내가 집밖에 모르는 방콕이 아니라면, 아내가 방콕이라고 해도 남편이 하루쯤 없어도 무심할 수 있는 여자라면.

@BRI@하지만 나는 광주가 아닌 순천에 살고 있고, 승용차는커녕 면허증도 없는 신세이고, 아내는 이 세상에 집보다 더 좋은 곳을 아직 찾지 못한 듯하고, 그런 좋은 집도 남편인 내가 없으면 오아시스 없는 사막일 뿐이라니 아무리 시와 노래가 어우러지고 시와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또한 얼크러지는 곳이라고 해도 그림의 떡이 될 수밖에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다가 드디어 기회가 왔다. 지난 지난 23일은 광주전남작가회의 정기총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오후 4시에 회의가 시작되었고, 같은 날 저녁 7시에는 광주영상예술센터 영상관에서 포엠콘서트 공연이 있었다. 스물일곱 번째 공연의 주인공은 '5월시' 동인이자 순천작가회의 초대회장을 지낸 바 있는 나종영 시인이었다.

총회가 끝나자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함께 먹고 난 뒤 순천작가회의 식구들과 함께 공연장소로 향했다. 공연장인 영상관 입구에서 입장권을 샀다.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입장권을 사는 단순한 행동을 하면서도 마음은 단순하지가 않았다.

아무리 형편이 어렵더라도 몇 번은 이곳에 왔어야 했다는 그런 생각이 들었던 것일까? 입장권과 함께 건네받은 소책자를 펴자 다음과 같은 글이 얼른 눈에 띄었다.

'포엠콘서트는 2003년 봄에 시작해서 지금까지 스물일곱 번째, 스물다섯 명의 시인들을 조명했고, 그 외 '특별 기획 포엠 콘서트'와 '간이역 시노래 콘서트'를 통해 얼추 오십여 명의 시인들을 만났다.'

여기까지 읽고 글 아래쪽을 보니 글쓴이가 가수이자 작곡가인 한보리 달팽이였다. 글 맨 위에 '연출의 글'이란 타이틀이 붙여진 것을 보니 연출도 그의 몫인 모양이다. 가만 보니 글의 내공도 만만치가 않다.

'달팽이는 온 몸이 집이다. 마치 자신을 업처럼 짊어지고 다니는 집. 우리가 만났던 시인들이 그랬다. 시인은 필생의 짐처럼 시업을 등에 지고 살아가는 달팽이들이었다. 포엠콘서트를 만들어 온 사람들도 크게 다르지 않아서 꼭 해내야할 숙제처럼, 사회적 의무처럼 궂은 말 없이 치러왔다. 포엠콘서트는 지역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도도 포함되어 있다. 경제·정치·문화·예술 모두 서울이 중심이 되고 지역은 늘 변방으로 인식되어지는 의식의 변화를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때문에 초대되는 시인들도 광주라는 지역을 넘어 출신지별로 형평성을 기했다. 그런 결과로 지역의 문화행사에서 벗어나 오히려 중앙과 전국의 문화예술계가 주목하는 중요한 행사로 자리매김 될 수 있었다.'

공연장면
공연장면 ⓒ 안준철
영상관 문을 열고 들어가 보니 빈 자리가 얼른 보이지 않을 만큼 객석은 이미 가득 채워져 있었다. 나는 뒤쪽에 비어 있는 좌석을 찾아 앉았다가 잠시 후 맨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혹시 사진을 찍을 일이 생길지 몰라서 그랬던 것인데 공교롭게도 옆에는 그날의 주인공인 나종영 시인이 앉아 있었다. 한참 시간이 흐른 후에 나는 그에게 속삭이듯이 물었다.

"지금 저 노래가 형 시 맞아요?"

나 시인이 고개를 끄덕이며 그렇다고 하자 나는 내심 놀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 시인의 시가 벌써 열곡 가까이 포엠콘서트 달팽이 가족들에 의해 불려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월의 목련>, <땅 끝에서>, <눈 길>, <눈이 내리네>, <저녁놀>, <마루>, <11월>, <쑥부쟁이>, 등등. 이 중에서 두어 곡을 빼고는 모두 한 달 사이에 새롭게 탄생한 곡들이었다. 시인의 서정성 짙은 시구만큼이나 아름다운.

가난한 마음으로 그대에게 가는
길섶에 쑥부쟁이꽃 피었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는 낯익은 길가에
난생 처음 보듯 가슴 두근거리며
철 지난 쑥부쟁이꽃 보네
누군가 외로움에 떨며 지나간 길가에
누군가 연분홍 사랑도 시들어진 풀섶에
그대가 고이 남겨놓았나
잠시 눈빛 식혀주고 어서 오라고
먼길 쉬임없이 살펴오라고
그대가 새벽 별빛 아래 걸아놓았나
돌아서면 꽃이파리 바람에 부서질까
가던 발길 미어지는데
찬 서리 머리에 인 채
그대에게 가는 길 환히 비춰주는
그대 닮은 쑥부쟁이꽃 하나.

- 나종영 시, '쑥부쟁이'


시가 노래가 되어 울려 퍼지는 동안 나 시인은 행복해 보였다. 그러다가 잠시 후 그는 무대로 불려나간다. 그 사이, 나는 그가 벗어놓고 간 코트를 가슴에 안고 있었다. 그의 성품만큼이나 따뜻하고 포근했다. 그는 나와 동갑나기 시인이지만 나는 그를 형이라고 부른다. 그것은 순전히 그의 깊은 시심 때문이다. 세상의 온갖 상처를 사랑하면서 생긴 듯한. 그의 시를 보면 알 일이다.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

작은 풀이파리만한 사랑 하나 받고 싶었을까 나는
상처가 되고 싶었네

노란 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나는 사랑이 곧 상처임을 알았네

지난 봄 한 철 햇살 아래 기다림에 몸부림치는
네 모습이 진정 내 모습임을

노랑붓꽃 피어 있는 물가에 서서
내 몸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나는 사랑했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이
내 안에 있음을,
나는 상처를 사랑하면서 알았네.

-시, '노랑붓꽃'


사랑이 상처라니? 더군다나 상처를 사랑하다니? 처음에는 의구심이 들기도 했었다. 그는 상처의 처절함을 알고 있을까? 상처를 받아본 사람은 상처라는 말도 입에 올리기 싫은 법이 아닌가. 하지만 그의 시를 읽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나는 사랑했음으로 이 세상 모든 것이/내 안에 있음을' 알았다고 하지 않는가. 사랑하지 않았다면 내 안에 있지도 않았을 터. 내 안에 없으면 상처 받을 마음도 없는 것을. 시인은 혹시 누군가를 사랑하기 위해 상처를 먼저 사랑해버린 것은 아닐까.

딴은 그렇다. 시인이라고 다 같은 영혼을 가진 것은 아닐 터. '노란 꽃잎을 어루만지는 손길에/병든 몸이 뜨거워지고', '노랑붓꽃 핀 물가에 서서/내 몸이 가늘게 떨리는' 시적 체험이 가능한 사람이래야 진짜 시인이지 않겠는가. 그는 그의 두 번째 시집『나는 상처를 사랑했네』후기에 이렇게 적고 있다.

'길섶에 민달팽이며 늦반딧불, 애기똥풀, 좀씀바귀 등 이러한 작은 생명들의 이름 앞에서 가슴이 얼마나 서늘해졌던가. 그냥 바람만 불어도 지울 수 없는 상처로 울고 있는 어린 영혼들에 대하여, 내 시가 혹여 고개를 돌리는 일은 없었던 것일까.'

늘 그런 조바심 속에서 살았으니 지리산에서 우연히 만나 사랑한다고 고백해버린 한 여자의 안부가 궁금하기도 할 것이다. 나 시인이 인사말을 대신하여 쓴 듯한 '시인의 글'에는 이런 대목이 눈에 띈다.

'지리산 범왕마을 내 여자는 잘 있는지 모르겠다. 사랑한다고 고백을 해놓고 이렇게 팽개쳐 놓아도 괜찮을지 불안하다. 그러나 나는 그녀의 정령을 믿는다. 그녀는 나와 생명을 연결해주는 비밀의 끈이기도 하다. 그녀는 나의 가까운 과거이고 미래이다. 그 여자의 이름은 푸조나무, 수령 600년이 넘은 고목이다.'

나종영 시인과 함께
나종영 시인과 함께 ⓒ 안준철
소심한 나는 지리산 범왕마을에 산다는 여자가 나무라는 사실에 안심한다. 그런데 곧 심상치 않은 일이 생겼다. 자기 이름을 나무라고 소개한 한 여자가 무대 앞으로 나와 시인을 맞이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녀는 시인에게 다가가 "지금까지는 그냥 나무였는데 이제 푸조나무가 되고 싶어요"라고 살갑게 말한다. 이건 숫제 공개 구애가 아닌가. 하지만 어인 일인지 이번에는 내 소심증이 발동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를 안다. 인도에 다녀온 뒤로 아예 인도 여자가 되어서 돌아온 여자. 내가 무심한 사이에 박양희란 이름을 나무로 바꾼 모양이다. 언젠가 순천·광양 지역 청소년 문학 캠프에 나무를 초대한 적이 있었다. 그녀는 인도 전통 악기를 가지고 나와 손과 발로 연주하며 서양음악에 빠져 있는 청소년들에게 잔잔한 감동을 선사해주었다.

이제 바야흐로 시인의 삶을 엿보는 시간. 시인과 나무는 무대 앞쪽 구석에 카페처럼 자리한 곳에서 마치 연인들끼리 커피를 마시듯이, 나뭇잎 사이로 바람이 지나가듯이 사뭇 자연스럽게(조금은 천연덕스럽게) 대화를 나눈다.

대화 속에서 그의 직업이 시인과는 거리가 먼 듯한 은행원(산업은행 광주본부장)이라는 사실도 밝혀지고, 그보다 훨씬 오래 전인 1970년 광주고등학교 문예반에 들어가 박주관, 김종관 등과 함께 후배인 곽재구, 나해철, 박몽구 등을 규합하여 광주 남여고등학교 연합문학써클인 '용광문학회'를 결성하여 활동한 사실도 알려진다.

그 후 시인은 1973년 전남대학교 경제학과에 입학하여 김세웅, 곽재구, 나해절 등과 함께 전남대 문학동아리 '용봉문학회'를 만들어 활동한다. 그러다가 1981년 창작과 비평 13인 신작시집에 시 '광탄 가는 길' '겨울行' 등을 발표하면서 등단한 뒤, 같은 해 이영진, 김진경, 곽재구, 박몽구, 박주관 등과 5월시 동인을 결성하기에 이른다.

그가 광주에서 순천으로 이사와 이학영, 박두규, 정안면 등과 민족문학작가회의 순천지부를 만든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의 일이다. 나 시인은 순천작가회의 회원들과 함께 지역문학의 활성화에 매진하면서 회원작품집 <사람의 깊이>를 10집 째 만들고 있으며, 개인적인 창작열에도 불을 지펴 그 결실로 1985년 첫 시집 <끝끝내 너는>(창작과 비평사)을 내놓은 뒤 무려 15년 만에 두 번째 시집 <나는 상처를 사랑했네>(실천문학사)를 상재하기에 이른다. 그는 지금 세 번째 시집 <푸조나무에서 얻어온 시>(가제)를 준비 중이다.

시인의 시를 노래하는 한보리 달팽이
시인의 시를 노래하는 한보리 달팽이 ⓒ 안준철
시인과의 대화가 끝나자 노래하는 달팽이들이 무대에 나와 다시 노래를 불렀다. 기타 솜씨가 일품인 오영묵 달팽이는 매력적인 남저음으로 '강 건너 불빛 꺼지고' '와온의 노을'을 불렀다. 물론 나 시인의 시에 달팽이들이 곡을 붙인 것이다. 이어서 영상시 '봄, 무등산'이 빼어난 자연의 화폭에 실려 잔잔히 울려 퍼졌다. 그리고 잠시 후 모자가 잘 어울리는 여인이 등장하여 노래가 다시 이어지고, 또 이어지고 그렇게 자꾸만 아쉬운 시간이 흘러갔다. 그러다가 막을 내릴 무렵에는 예정에 없던 섹소폰 연주까지 듣게 되었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었다. 행복이 느껴지면 그냥 행복하면 될 것을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것인지, 뭔가 나를 머뭇거리게 하는 것이 있었다. 행복해도 조금 덜 행복해야한다고, 조금은 기쁨 속에도 슬픔을 내장시켜야한다고 누군가 나에게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혹시 상처를 사랑하는 그의 혼이 내게 달라붙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내 머리 속으로 떠오르는 한 편의 시가 있었다. 그의 첫 시집에 실린 '무등산'이었다.

너는 언제나 거기 있구나
너는 언제나 캄캄한 어둠 속에서도
살아 불빛을 비추는구나
방림다리 건너 농아학교 가는 길
아 누군가 거기서 떼죽음을 당했을까
진보랏빛 창포꽃 무더기로 피어있는
미나리꽝 질펀한 흙 속에 묻혀 있구나

봄볕이 터져 사람들 눈을 뜨던 봄날
외곽도로 돌아 숨가쁜 너릿재 고개
누가 숨막히는 소식 전하러
밤새워 산길을 타고 또 넘었을까
주먹밥을 날라온 밤골 아짐도
자전거를 타고 나간 버드실 당숙도
무사하실까 살아계실까
우리들 목마른 가슴과 가슴이 만나
핏빛 노을로 타는 극락강
저문 강기슭 흐트러진 보리밭에
너는 보는 사람도 없는 쳐박혀 있구나
죽어서 다시 떠오르는 삶
그런 장엄한 어머니로 거기 서 있구나.

-나종영 시 '무등산' 앞부분


무대와 관객들
무대와 관객들 ⓒ 안준철
나는 그날 광주에서 잤다. 박두규, 이봉환 시인이 내 동침 상대였다. 아내는 밤늦게 돌아오다 사고라도 날까 두려워 차라리 외박을 권유했던 것이다. 다음날 아침 이봉환 시인을 먼저 보내고, 박두규 시인의 차로 순천으로 돌아오는 길에 담양 근처 창평에 들려 국밥 한 그릇을 먹었다.

그 자리에 나종영 형이 있었으면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다. 시가 좋으면서도 사람도 좋은 사람. 그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너무 맛이 있어 허겁지겁 퍼먹다가 반쯤 남은 국밥 속으로 그의 시가 한 편 떠올랐다.

갑사치마 옥색저고리 차려입으신
울 엄니 고운 날개를 다셨나 보다
한평생 젖 물려 새끼들 키우신 울 엄니
맨등에 업고 돌아보니
젖가슴 쪼그라들어 새털처럼 가벼우신 울 엄니
뼛속에 세한(歲寒)의 바람만 가득 찼나 보다
뿔뿔이 객지로 흩어진 자식들
낯짝 내려고 차린 칠순잔치에 울 엄니 지쳐 잠이 들고
뭇 식구들 신발 속에 파묻힌 흰 고무신
가슴에 모아 만져보니
우수수 나무 이파리 떨어지는 소리
옥색저고리 엷은 날개 고이 접으시는 소리.

-나종영 시,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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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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