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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만 보는 바보>
<책만 보는 바보> ⓒ 보림
"햇살과 함께하는 감미로운 책읽기는, 어린 시절뿐만 아니라 그 뒤에도 계속되었다. 스무 살 무렵, 내가 살던 집은 몹시 작고 내가 쓰던 방은 더욱 작았다. 그래도 동쪽, 남쪽, 서쪽으로 창이 나 있어 오래도록 넉넉하게 해가 들었다. 어려운 살림에 등잔 기름 걱정을 덜해도 되니 다행스럽기도 했다.

나는 온종일 그 방 안에서 아침, 점심, 저녁으로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동쪽 창으로 들어온 햇살이 어느새 고개를 돌려 벽을 향하면 펼쳐 놓은 책장에는 설핏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것도 알아채지 못하고 책 속에 빠져 있다가, 갑자기 깨닫게 되면 얼른 남쪽 창가로 책상을 옮겨 놓았다. 그러면 다시 얼굴 가득 햇살을 담은 책이 나를 보고 환하게 웃어 주었다. 날이 저물어 갈 때면, 해님도 아쉬운지 서쪽 창가에서 오래오래 햇살을 길게 비껴 주었다."


스무 살의 이덕무의 모습이다. 서자로 태어나 아무런 꿈도 희망도 없는 스무 살 청년은 햇살을 따라 상을 옮겨가며 책을 읽는다. 반쪽 양반인 그가 세상 속으로 들어갈 자리는 없었다. 양반 축에 끼어 세상을 논할 수도 없었고. 평민 자리에 끼어 농사를 짓거나 장사를 할 수도 없는 주변인인 그는 가슴 속의 답답함을 글을 통해 조용히 풀어내고 있다. 그리고 어찌할 수 없는 외로움에 긴 한숨을 쉬기도 한다. 그런 그의 곁에 벗들이 다가온다. 그리고 두 명의 스승도.

<책만 읽는 바보>는 이덕무와 그의 벗들의 이야기다. 이 책에는, 나이 차이를 훌쩍 뛰어넘은 이덕무와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와의 끈끈한 우정과 나이와 신분의 차이를 뛰어넘은 이서구와의 우정, 그리고 이들의 마음을 달래주고 깨우침을 주면서 희망을 준 스승 연암 박지원과 담헌 홍대용과의 관계들이 생생하고 진솔한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그럼 책에 대한 그들의 열정과 우정의 진함을 엿들어보자.

@BRI@식구들의 배고픔을 보지 못한 이덕무는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던 <맹자> 한 질을 돈 이백 전을 받고 팔아 양식을 얻는다. 책을 팔아 양식을 샀다는 허허로운 마음을 이기지 못해 벗 유득공을 찾아간다. 일곱 살 어린 나이지만 유득공은 마음속의 모든 걸 털어놓아도 받아주는 벗임을 알기에 그를 찾은 것이다.

맹자를 팔아 배를 불렸다는 말에 유득공은 "그래요? 그러면 나도 좌씨에게 술이나 한 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하곤 책장에서 <좌씨춘추(左氏春秋)>를 뽑아 아이에게 술을 사오게 한다. 책을 팔아 술을 사먹을 정도의 유득공은 아니었지만 벗의 마음을 헤아려 그렇게 한 것이다.

서자로 태어나 가난을 이기지 못해 아끼는 책을 팔아 쌀을 사고, 술을 사먹는 모습이 서글퍼 보이지만 얼마나 멋진 벗 사이의 믿음인가. 저자는 이런 벗들과의 관계를 책 전편에 소상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좌씨에게 술이나 한 잔 얻어먹어야겠습니다"

"나는 위아래를 알아야 한다는 말이 정말 싫습니다. 예의를 지키라는 이야기 같지만 결국은 집안이나 신분, 벼슬의 높고 낮음에 따라 고개를 숙이는 것을 정하라는 게 아닙니까? 옭고 그름에 따라 고개를 들고 숙여야지, 어찌 그 사람의 껍데기만 보고 고개를 숙이겠습니까?"

서자 출신으로서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형을 형이라 부르지 못한 신분제도의 아픔을 몸으로 겪어온 박제가의 말이다.

당시 박제가는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에 대한 관심이 많아 한족이 세운 옛나라를 흠모하는 당시 사람들에게 비난을 심하게 받았다. 만주족은 오랑캐인데 그 오랑캐에 관심을 가졌다는 이유에서다. 박제가가 청나라의 변화, 상가가 넘치고 문물이 넘쳐나는 중국의 변화에 관심을 가지고 그와 관련된 책이 있으면 모으고 연구하였음을 두고 한 말이다.

성격이 직선적이고 괄괄한 박제가의 그런 상황과 마음을 이해하고 함께 한 것은 벗들이었다. 희망 없는 암울함 속에서도 그들은 마음을 주고받는 벗들이 있었기에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있었고 가끔이나마 웃을 수 있었다.

이러한 벗들과 관계 외에 이들이 스승으로 섬긴 박지원과 홍대용과의 이야기도 상세하게 나온다. 적자 양반이면서도 두 사람은 서자 출신인 이들을 따뜻하게 대해주고 아끼는 모습이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을 따뜻하게 덥혀준다. 연암과 담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일화를 한 번 보자.

한 여름날 맑던 하늘이 갑자기 어두워지며 먹구름 속에서 우레가 치자 담헌 선생은 거문고를 무릎 위에 뉘이곤 거문고를 뜯는다. 그런데 거문고에서 나는 소린 우레 소리이다. 거문고로 우레 소리를 만들어낸 것이다. 그 소릴 가만히 듣고 있던 연암은 즉흥적으로 <우레가 다가온다>라는 시를 짓는다.

당시 천문학의 대가이고 거문고의 달인인 담헌은 하늘의 소리를 음악으로 표현하고, 당대의 대학자인 연암은 그 소리를 시로 짓는 모습이라니. 옛 선비의 향취가 절로 그려지고, 바로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게 펼쳐지지 않은가.

이덕무와 그의 벗들 삶을 기록한 <책만 보는 바보>

<책만 읽는 바보>는 저자 이덕무와 그의 벗들의 삶의 모습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할 글이다. 이 책에는 '서자'라는 굴레에 묶여 가슴앓이 하며 암울하게 지내야했던 이들의 모습과 그들이 추구했던 사상과 생각들이 아주 진솔하게 드러나 있다.

그래서인지 책꽂이 속에 꽂혀 잠들어있던 책을 우연히 펼쳐든 순간 난 그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왜 이 책을 이제 빼들었나 하는 아쉬움도 잠시 밥상머리에서도, 차를 마시면서도 <책만 보는 바보>는 날 바보로 만들었다.

날 바보로 만든 것은 꾸밈이 없이 진솔한 일상과 벗들과 관계를 적어놓은 것도 그렇고, 나이 차이와 신분의 차이를 훌쩍 뛰어넘은 벗과 벗들의 진한 우정이 가슴을 울리고, 스승과 제자 사이의 그 애틋한 마음이 책을 읽는 내내 필자의 가슴을 아리게 하고 따뜻하게 하고 모습에 푹 빠지게 했기 때문이다.

긴 겨울, 난 잠자리에 드는 아이들에게 이 책 한 권을 읽어줄 생각이다. 책 속엔 소담한 양식들이 이런저런 모양으로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아비의 마음도, 어미의 마음도, 선비의 마음도, 우리의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도, 세상을 바라보는 자세도, 그리고 공부를 왜, 어떻게 해야 하는지도 맵지도 짜지도 않은 절간 음식처럼 들어있기 때문이다.

책만 보는 바보

안소영 지음, 보림(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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