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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 백두산공정과 더불어 중국정부의 대소수민족 역사왜곡와 동화정책이 가속화 되고 있다. 지난 7월에는 중국에서 마지막 남은 오지지역인 티베트까지 칭짱철도가 개통되어 한족 관광객과 중국 문화가 소수민족 거주지에 물밀듯이 흘러 들어가고 있다. 이에 <오마이뉴스>는 장기적으로 진행되는 중국정부의 치밀한 정책에 따른 중국 각지 소수민족(나시족, 티베트인, 위구르족, 동족, 조선족) 거주지의 무분별한 개발과 노골적인 한화(漢化) 현장을 5회 현지 르포로 살펴본다. <편집자주>
띠칭자치주의 한 사가파 라마사원 예불당. 종파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 라마사원은 입적한 겔룩파 지도자 10대 판첸 라마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띠칭자치주의 한 사가파 라마사원 예불당. 종파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이 라마사원은 입적한 겔룩파 지도자 10대 판첸 라마의 사진을 걸어놓았다. ⓒ 모종혁

1930년대 초 인도 바스쿨에서 주민 소요가 일어난다. 현지 주재 영국 영사 콘웨이, 부영사 멜린슨, 천주교 전도사 브링클로 등은 비행기를 타고 탈출하지만, 한 티베트 청년에 의해 납치된다. 비행기는 히말라야산맥을 넘어 험준한 '푸른 달 계곡'에 불시착한다.

비행기를 납치한 청년은 불시착 후 "샹그릴라"(Shangrila)라는 외마디를 남기고 죽는다. 콘웨이 일행이 도착한 '푸른 달 계곡'은 병풍처럼 둘러싸인 설산 안에 널푸른 초원, 아름다운 호수, 비옥한 토지,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무릉도원'.

한 노인에 의해 주변 라마사원으로 안내된 콘웨이 일행은 자신들과 같은 이방인인 천주교 수도사 페로와 멸망한 청나라 공주 로센을 만난다. 80대 노인으로 보인 페로는 실제 나이가 300세에 가깝고 18세 청순한 미인인 로센은 실제로 90세가 넘는다는 말에 일행은 경악한다. 온갖 종교가 조화롭게 공존하고 갈등과 탐욕이 없는 샹그릴라는 주민들이 무병장수까지 하는 이상사회였던 것이다.

콘웨이 일행은 샹그릴라에서 자신들이 꿈꿨던 유토피아를 만끽하지만 멜린슨만은 답답함을 견딜 수 없어 한다. 멜린슨의 끈질긴 간청에 콘웨이는 사랑에 빠진 멜린슨, 로센 공주 두 연인과 함께 샹그릴라를 떠난다.

현실세계로 되돌아 온 그들은 누구도 행복하지 못한다. 샹그릴라에서 벗어난 뒤 로센은 본래의 90세 노인으로 되돌아가 숨지고 멜린슨 또한 병에 앓아눕는다. 콘웨이는 샹그릴라로 되돌아가려 하지만 다시 찾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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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정부에 의해 '샹그릴라'로 꾸며진 중뎬현

작은 포탈라궁로 손꼽히는 샹그릴라의 간덴 쑴첼링사. 지금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작은 포탈라궁로 손꼽히는 샹그릴라의 간덴 쑴첼링사. 지금은 옛 모습을 되찾았지만 문화대혁명 시기 홍위병에 의해 철저히 파괴된 흔적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있다. ⓒ 모종혁

1933년 영국 소설가 제임스 힐튼이 발표한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Lost Horizon)의 내용이다. 유례없는 세계 대공황에 심신이 찌든 서양인들에게 소설 속에 묘사된 샹그릴라는 꿈에 그리던 지상낙원이었다.

'잃어버린 지평선'은 1937년 미국 컬럼비아영화사에 의해 영화로도 제작됐다. 소설과 영화를 통해 샹그릴라를 접한 사람들은 한 줄기 구원의 빛을 찾아 샹그릴라로 떠났다. 그 가운데는 독일의 독재자 아돌프 히틀러도 있었다.

@BRI@그는 샹그릴라를 '순수 아리안 혈통의 전승지'로 규정하고 자신의 친위부대 탐험대를 7차례나 파견했다. 탐험대의 일원이었던 하인리히 하러와 페터 아우프슈나이터는 네팔을 점령했던 영국군에게 포로로 잡혔다가 티베트로 탈출했다.

두 사람이 티베트에서의 생활과 체험을 쓴 논픽션은 훗날 영화로 만들어졌고 그것이 바로 <티벳에서의 7년>이다. 이 영화는 중국이 티베트를 어떻게 강압적으로 점령했는지 잘 묘사하여, 중국정부로부터 터부시되는 대표적인 반중(反中) 영화이다.

오랫동안 서양인들에게 유토피아로 꼽힌 샹그릴라가 다시 언론의 주목을 받은 것은 지난 1997년 9월이다. 중국 윈난(雲南)성 정부가 대규모 기자회견을 열어 "본 성내의 띠칭(迪慶)티베트족자치주 중뎬(中甸)현이 샹그릴라"라고 선언했다.

윈난성은 "역사, 지리, 민속, 언어, 종교 등 각 분야의 50여명 전문가들이 1년여에 걸친 탐험과 연구 끝에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 속에 나오는 자연·문화적 환경이 중뎬과 일치함을 증명했다"며 "샹그릴라는 띠칭 티베트인들의 토속어로 '내 마음 속의 해와 달'이라는 뜻이기도 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2001년 12월 중국정부는 중뎬을 샹그릴라(香格里拉)로 공식 개명하고 2003년에는 유네스코의 세계자연유산으로 등록시켰다.

원래 샹그릴라로 손꼽힌 곳은 중뎬만이 아니었다. 인도, 네팔, 부탄, 쓰촨(四川)성 등 히말라야산맥의 여러 마을들이 저마다 샹그릴라라고 우기며 경쟁했었다. 그러나 중국정부는 '샹그릴라공정'이라 불릴 만큼 저돌적으로 샹그릴라 만들기에 나섰다.

요란한 중국정부의 움직임과 달리 1998년 필자가 처음 찾은 중뎬은 조용하고 아름다운 티베트인들의 작은 마을이었다. 소설 '잃어버린 지평선'에 나오는 것과 같이 해발 3200m의 중뎬은 그림과 같은 설산, 드넓은 초원, 여러 갈래의 작은 강, 울창한 원시산림과 검푸른 호수, 다양한 동식물 등 축복받은 자연 환경을 지녔다. 게다가 작은 포탈라궁로 손꼽히는 라마사원 간덴 쑴첼링사(Ganden Sumtseling Gompa, 松贊林寺)까지 있다.

샹글리라 사람들 사이의 빈부격차와 갈등

샹그릴라 도심의 한 레저센터에서 당구에 열중인 라마승.
샹그릴라 도심의 한 레저센터에서 당구에 열중인 라마승. ⓒ 모종혁

올해 8년 만에 다시 찾은 중뎬. 그 이름은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지명은 이상향 샹그릴라로 바뀌었고 인구 1만명이 갓 넘던 산간 마을은 10만여명의 소도시로 변모했다.

오래전 말을 타고 마음껏 달릴 수 있었던 나파하이 초원은 입장료를 물어야 들어갈 수 있었다. 오래전 울타리가 없던 고원호수 삐타하이와 주변 원시산림은 잘 조성된 산림공원으로 변했다. 오래전 순박한 티베트 사람들이 살던 이른바 고성(故城)이라 불리는 집단 거주지는 식당, 술집, 카페, 상점 등 유흥지대로 탈바꿈했다.

해마다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관광객이 그 원인이었다. 1995년 7만명에 불과하던 관광객은 2005년 중국인 150만명, 외국인 10만명으로 급증했다. 윈난성 수도인 쿤밍(昆明)에서 샹그릴라까지는 비행기로 50분 거리. 1998년 이틀 동안 버스에 의지하여 비포장도로를 달려 도착한 것에 비하면 천지개벽이다.

물질의 가난에 찌들던 사람들은 이제 풍요로워졌다. 사촌형과 함께 관광객을 대상으로 렌터카를 운영하는 티베트 젊은이 라얼딩주(22)는 이런 변화가 더없이 반갑다. 그는 "샹그릴라는 중국에서도 가구별 자동차 보급률이 가장 높은 곳 중에 하나"라면서 "다양한 국적과 부류의 관광객을 만나면서 월 5천위안(약 60만원)은 거든히 벌기 때문에 현정부 관리로 일하는 아버지도 내 직업을 존중한다"고 말했다.

2003년 인도 유학 후 귀국하여 큰 카페를 운영 중인 롱부치린(34)도 샹그릴라의 발전을 낙관한다. 그는 "고향에서 큰 비즈니스 기회가 오고 있음을 알고 많이 고민했다"면서 "티베트가 자유로워지기 전까지 다시는 귀국하지 않으리라 맹세했지만 가족들의 성화와 배운 지식을 고향에서 펼치고 싶어 돌아왔다"고 말했다.

2001년 고성에 술집을 연 한족 리센광(53)도 "1999년 여행을 왔다가 발전 가능성을 발견하고 투자했다"면서 "지방정부의 전폭적인 지원과 늘어나는 관광객으로 일정한 성공을 거두었다"고 만족스러워 했다.

ⓒ 모종혁

<font color=a77a2><무극>이 파괴한 이상향  영화 <무극>을 찍기 위해 수백년된 나무들을 무차별적으로 벌목한 비구텐츠 진입로(위)와 볼썽사납게 파헤쳐진 두견화 밭과 여기저기 쓰레기가 흩어진 비구텐츠(아래).
<무극>이 파괴한 이상향 영화 <무극>을 찍기 위해 수백년된 나무들을 무차별적으로 벌목한 비구텐츠 진입로(위)와 볼썽사납게 파헤쳐진 두견화 밭과 여기저기 쓰레기가 흩어진 비구텐츠(아래). ⓒ 모종혁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만족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따바오쓰(大寶寺)마을에서 만난 청년 라종피주(26)는 "돈 있는 사람들은 아주 잘 살지만 대부분의 샹그릴라 주민들은 아직도 가난하다"면서 "개발후 빈부격차는 갈수록 커지고 있다"고 말했다. 비구텐츠(碧沽天池)로 향하는 산골마을에서 만난 처롱자오(48)도 "도심지 사람들만 돈 벌어 한족처럼 사는 것일뿐"이라 코웃음 쳤다.

소용돌이치는 티베트 사람들의 다양한 내면 뿐만 아니라 샹그릴라의 자연도 변하고 있다. 샹글리라 도심에서 4시간 떨어진 해발 4100m의 고산호수 비구텐츠. 배우 장동건이 출연하여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영화 <무극>이 촬영된 이곳은 그야말로 전쟁터나 다름없다.

샹그릴라 지방정부는 영화제작을 돕기 위해 비구텐츠로 통하는 수백 년된 나무를 모두 잘라서 도로를 만들었다. <무극> 제작팀은 비구텐츠 주변 중국 최대의 야생 두견화를 짓밟았고 촬영후 각종 쓰레기와 촬영 시설을 그대로 남기고 갔다. 인간이 자신의 목적을 위해 이상향에서 벌인 죄악이었다.

달라이 라마를 대체하는 중국정부의 판첸 라마

중국이 내세운 11대 판첸 라마 기알첸 노르부가 지난 5월 샹그릴라에서 주관한 종교집회.
중국이 내세운 11대 판첸 라마 기알첸 노르부가 지난 5월 샹그릴라에서 주관한 종교집회. ⓒ 모종혁

올해 5월 중순에는 묘한 손님까지 샹그릴라를 방문했다. 기알첸 노르부(17). 중국정부가 임명한 티베트 라마불교의 2인자인 11대 판첸 라마였다. 1995년 12월, 부모가 모두 중국공산당원인 기알첸 노르부는 1989년 입적한 라마불교 2인자인 10대 판첸 라마의 환생으로 중국정부에 의해 지명됐다.

티베트인들의 영적 지도자인 14대 달라이 라마는 당시 5세였던 치에키 니마를 11대 판첸 라마로 임명했다. 하지만 중국정부는 즉시 치에키와 그 가족을 납치하고 지금까지 모처에 연금시켜 놓고 있다. 세계 최연소 정치범이 탄생한 것이다.

모든 티베트인의 종교인 라마불교는 15세기부터 '관세음보살'의 화신으로 태어난다는 달라이 라마제도가 확립되었다. 1933년 13대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자, 4년 뒤 라마불교 고승들은 지금의 칭하이(靑海)성 암도에서 2살이던 현 달라이 라마를 찾아 '환생자'로 결정했다. 같은 방식으로 결정되는 판첸 라마는 '아미타불'의 화신으로 추앙되는데, 달라이 라마가 입적하면 환생자를 찾고 성숙할 때까지 달라이 라마의 스승으로 공백기를 메운다.

기알첸 노르부는 작년 12월 정식으로 11대 판첸 라마 즉위식을 가졌고 올 4월 항저우(杭州) 세계불교포럼에 나타나 국제무대에도 등장했다. 지난 10년 동안 베이징으로 옮겨져 중국정부의 감시 아래 강도 높은 교육을 받은 것으로 알려진 기알첸은 샹그릴라 방문을 비롯하여 9월에는 티베트 본토의 고향마을도 찾았다. 인도에 망명 중인 달라이 라마를 대체하여 기알첸을 티베트와 국제사회에서 라마불교를 대표하는 지도자로 자리매김 시키려는 중국정부의 치밀한 정책이 시작된 것이다.

샹그릴라 대귀산(大龜山)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마니통. 중국 56개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세긴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샹그릴라 대귀산(大龜山)에 세워진 세계 최대의 마니통. 중국 56개 민족의 화합과 단결을 세긴 문양이 장식되어 있다. ⓒ 모종혁
기알첸의 즉위 이후 <미국의 소리(VOA)> 방송은 "대다수의 티베트인들이 기알첸을 판첸 라마가 환생한 활불로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보도했다. 이런 서구 언론들의 시각은 사실일까? 필자가 샹그릴라를 비롯하여 티베트 본토와 윈난성, 쓰촨성, 칭하이성 등 티베트인 거주지역에서 만난 사람들의 반응은 전혀 딴판이다.

일부 티베트인들만이 기알첸과 치에키 문제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티베트인들은 전혀 모르거나 일부 사실만을 알고 있었다. 달라이 라마도 이런 티베트의 현실을 직시하여 독립 주장을 철회하고 외교와 국방 이외의 자치만을 달라면서 중국정부와 협상하고 있다.

현재 달라이 라마의 망명정부와 중국정부는 첨예한 대립을 반복하고 있다. 난관 중 하나는 티베트자치구 이외의 윈난, 쓰촨, 칭하이 등 중국 내지로 찢겨나간 티베트의 영토복원문제. 티베트인들은 현재 티베트 본토 뿐만 아니라 주변 지역에 절반 정도가 거주하여 살고 있다. 허나 중국정부는 달라이 라마를 "이중인격자" "조국을 기만한 자"라고 비난하면서 티베트에 대한 동화정책을 가속화시키고 있다.

밀려드는 한족들과 개발의 유혹 속에서 티베트인들은 지쳐가고 있다. 쿤밍에서 만난 샹그릴라 출신 한 티베트 지식인의 육성은 이를 대변해 준다.

"후진타오가 중국 인민들의 지도자인 것처럼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 인민들의 지도자이다. 문제는 지도자가 인민들에게서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있다는 것이다. 지난 반 세기동안 우리는 한시도 달라이 라마를 잊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나 그는 50년이 지난 지금도 못 돌아오고 있다. 앞으로 10년은 괜찮을 것이다. 하지만 30년이 더 지나면 티베트는 영원한 중국의 일부분이 될 것이다."


달라이 라마, 그는 하루 빨리 자신을 기다리는 티베트 인민들의 품으로 돌아가야 한다. 이미 칠순을 훌쩍 넘긴 그에게 남은 시간은 많지 않다. 그가 입적하고 인도의 티베트 망명정부에서 후대 달라이 라마를 지명하면 티베트는 또 다른 치에키 니마의 비극을 맛볼 것이다.

날마다 티베트 라싸를 향해 라마 경전을 독경하는 한 티베트 노인. 달라이 라마를 직접 알현코자 하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질까.
날마다 티베트 라싸를 향해 라마 경전을 독경하는 한 티베트 노인. 달라이 라마를 직접 알현코자 하는 그의 소망은 이루어질까. ⓒ 모종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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