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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도에 속한 칠산도와 칠산바다
전남 영광군 낙월면 송이도에 속한 칠산도와 칠산바다 ⓒ 김준

@BRI@사람은 살지 않는다. 괭이갈매기가 하늘을 날다 자리를 잡고 둥지를 트는 섬, 온갖 생명을 품에 안고 골골이 길을 열어주는 바다. 뱃사람들에게 꿈과 희망 등대이며, 눈을 부릅뜬 황금조기들의 모태가 묻힌 곳. 전라남도 영광군 송이면에 속한 일곱 개의 섬 칠뫼와 칠산바다가 그곳이다.

조선시대 칠산바다는 고기잡이 보다는 세원(稅源)으로 어민보다 권문세가들에게 더 알려졌다. <신동국여지승람> 영광군편에는 "파시전이 군 북쪽 20리에 있는데, 조기가 생산된다. 매년 봄에 경외(京外)의 상선이 사방에서 모여들어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잡아 판매하는데, 서울 저자와 같이 떠드는 소리가 가득하다. 그 고깃배들은 모두 세를 낸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파시전은 칠산바다를 이른다.

초대 지도군수로 임명된 오횡묵의 <지도군총쇄록> 5월 13일자는 칠산바다를 더욱 자세하게 적고 있다. 전라도 지도진이 군치소로 승격되던 1896년은 완도도 군으로 승격되었다. 당시 지도군은 나주, 영광, 부안, 만경, 무안 등 5개 군 117개 섬으로 이루어진 16개면이었다.

같은 시기 돌산군과 완도군이 설군 되어, 비로소 서남해 다도해지역에 행정력을 배치한 것이다. 1월 22일 임명되어 5월 15일 현지에 부임했으니 당시의 뱃길을 짐작하고 남는다. 오횡묵이 부임한 여정은 강화-갑곶-손돌항-인천-팔미도-덕적도-마량진-옥구-고군산-칠산해-지도로 이어진다.

법성의 서쪽 바다에는 배 댈 곳이 없고, 이곳 칠산이라는 작은 섬이 있는데 위도에서부터 나주까지 경계가 되고 이곳을 통칭 칠산바다라고 한다. 서쪽 바다는 망망대해로서 해마다 고기가 많이 잡혀 팔도에서 수천 척의 배들이 이곳에 모여 고기를 사고파는데 오고 가는 거래액은 가히 수십만 량에 이른다고 한다. 가장 많이 잡히는 것은 조기인데 팔도에서 같이 먹을 수 있다. 지금도 역시 갈치를 잡으려고 바다에 그물을 설치하였고 배들이 빽빽이 모여 있었다.

오횡묵은 칠산바다를 건너면서 본 법성포의 모습을 '사방으로 산들이 둘러싸인 곳에 별세계처럼 민가 천여 호가 마치 물고기 비늘처럼 모여 있었다. 항구의 전면에는 배 젓는 노가 모아 세워져 있는데 마치 갈대와 같았다'라고 적고 있다. 당시의 조기잡이 파시가 얼마나 성시를 이루었는가 짐작케 한다.

풍요롭던 '사흘칠산'

법성포구에 굴비를 말리는 덕장
법성포구에 굴비를 말리는 덕장 ⓒ 김준
칠산어장은 법성포에서 송이도 사이 일산도·이산도·삼산도·사산도·오산도·육산도·칠산도 등 일곱 섬 주위 바다를 말한다. 칠산어장은 법성포와 송이도 사이에 어장을 이르지만, 낙월도에서 고군산군도에 이르는 넓은 바다를 칭하기도 한다. 오횡묵은 <지도군총쇄록>에 '칠산 어장이 백여 리'라고 적고 있다.

백여 리는 영광 북쪽의 위도, 식도, 치도, 상·하왕등도까지 이르는 길이다. 이 지역은 1960년대 초반까지 영광군에 속했다. 송이도 칠산도 인근의 바다에서 위도 인근 어장까지 조기파시가 형성되었던 곳을 칠산어장이라 했다. 여기서 잡은 조기들이 '영광굴비'로 전국에 팔려갔다. 위도의 치도리나 파장금에서 만난 촌로들은 영광굴비는 영광보다는 '위도에서 잡힌 조기로 만든 것인데'라며 아쉬워 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칠산바다에 돈 실으러 간다 했던가. '사흘칠산'이라 했던가. 조기가 칠산바다에 머무는 시기 중 물때를 잘 맞춰야 두 사리에 일주일 정도 그물질을 할 수 있었다. 어쩌다 바람이라도 불고 날이라도 궂으면 이마저 힘들었다. 그래서 사흘 벌어 일 년을 먹고산다 했다. 그만큼 풍요롭던 바다였다.

하지만 칠산바다는 풍요롭지만 위험한 바다다. 북서풍이라도 불라치면 여기는 깊지 않는 바다가 뒤집어진다. 풍선배를 타고 조기잡이를 하던 숱한 사람들을 데려갔고, 경강으로 조세를 운반하던 뱃사람들도 변을 당하곤 했던 바다다.

바다생명의 모태인 모래와 펄로 이루어진 갯벌이다. 칠산바다가 그렇다.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나주의 서쪽은 칠산바다이다. 옛날에는 깊었으나 근래에 와서는 모래와 앙금이 쌓여 점점 얕아져서, 썰물이 빠지면서 겨우 무릎이 빠질 정도이다. 한복판 한 군데 물길만이 강줄기와 같아서 배는 여기를 통해 다닌다"라며 적고 있다.

이중환의 기록에 따르면 처음부터 칠산바다가 조기들의 모태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칠산바다는 원래 일곱 골의 육지였는데 바다로 변했다는 설화도 있다.

칠산골에서 살아남은 사람들

법성포구
법성포구 ⓒ 김준
칠산 바다는 원래 일곱 골의 육지였다. 이 골에는 서씨 성을 가진 노인이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지사(地師)가 찾아왔기에 대접을 잘해주었다. 그 지사는 떠나면서 은공을 갚기 위해서 한 마디 일러 주었다. 이곳은 얼마 안 가서 바다가 될 테니 여기를 떠나라고. 노인은 그 말을 듣고 언제쯤 바다가 되냐고 물었다. 지사는 저 앞에 있는 큰 부처의 귀에서 피가 흐르면 바다가 된다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이 말을 들은 노인은 매일 아침 부처님의 귀에서 피가 나는가 보러 갔다. 노인이 지성스럽게 부처님한테 다녀오니까 동네 사람이 왜 그렇게 날마다 다니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부처님 귀에서 피가 흐르게 되면 여기가 바다가 된다고 해서 보러 다닌다고 하면서 지사의 말을 전했다. 동네 사람들은 이 말을 듣고 영감이 미쳤다고 조롱했다.

그 중에 개를 잡는 백정 하나가 밤에 부처님 귀에다 피를 바르고 왔다. 이튿날 아침 노인이 가서 보니 부처님 귀에서 피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동네사람들에게 여기가 곧 바다가 될 테니 어서 피하라고 외치면서 높은 산 있는 데로 올라갔다. 하지만 동네 사람들은 아무도 따라나서지 않았다.

그날 아침에 원님이 문안드리러 들어온 육방관속을 보니 모두 죽을상을 하고 있었다. 관상을 잘 보던 원님은 "어제까지 괜찮던 얼굴이 오늘 따라서 모두가 죽게 되었으니 이상한 노릇이다. 무슨 일이 있었느냐" 하고 묻자, 관속들은 "서씨라는 노인이 여기가 바다가 된다고 높은 산으로 도망치는 것을 보았습니다"라고 대답을 했다. 그리고 지관, 개잡는 백정 등이 그간의 이야기를 전했다.

원님은 그 말을 듣고 그 노인의 말이 옳다. 우리도 어서 도망가자 하고 육방관속들을 끌고 산으로 올라갔다. 노인이 산으로 올라가는데 소금장사가 소금가마를 받쳐놓고 쉬고 있었다. 소금장사는 노인을 보고 어째서 이렇게 헐레벌떡거리면서 올라오느냐고 물었다. 노인은 여기가 바다가 된다고 해서 높은 데로 도망간다고 했다. 소금장사는 바다가 된다 해도 이 지게 작대기 밑에까지 밖에 안 들어오니 더 올라갈 것 없다고 했다. 그러자 천둥이 울고 땅이 가라앉더니 바닷물은 소금 장사가 말한 대로 지게 작대기 밑에까지 차고 말았다.

칠산골에서 살아남은 사람은 서노인과 그 가족, 원님네 식구, 육방관속의 식구, 그리고 소금 장사뿐이고 다른 사람들은 죄다 죽고 말았다. 이 서씨의 자손은 지금 충청도에 많이 살고 있다고 한다.

새우젓 팔러간 남편 왜 안 오실까

칠산바다에서 닻그물로 새우잡이를 하는 배
칠산바다에서 닻그물로 새우잡이를 하는 배 ⓒ 김준
칠산바다에 기대어 살던 뱃사람들은 갯골을 타고 나가 잡은 고기를 가까운 법성포나 목포 멀리 영산포 오일장에 내다 팔았다. 큰 중선배를 가지고 많은 선원들을 부리는 선주들이야 상고선에 넘기고, 객주에게 넘기면 되지만 작은 풍선배를 가지고 새우, 조기, 갈치, 장대, 꽃게 등 닥치는 대로 잡는 뱃사람들은 염장 질을 하거나 말려야 했다. 특히 돈이 되었던 것은 새우젓이었다. 물때와 바람에 맞춰 갈무리를 해둔 젓동이와 건어물을 배에 가득 실고 목포와 영산포로 향했다.

칠산바다의 작은 섬에서 만난 팔순 노인의 이야기다. 아버님이 꽤 큰 중선배를 가지고 배를 부렸다. 칠산바다에서 새우를 잡아 젓을 담아 영산포와 법성포 등지에 팔고 올 때면 옷, 쌀 등을 가지고 왔다. 간혹 물건을 가져다 섬사람들에게 팔기도 했다. 장사수완이 좋았던 아버지는 배에 가득 새우젓을 싣고 나가면 달포가 지나 한 달이 되어서 오시는 때도 있었다. 나중에 나이를 먹고 알았지만 영산포에도, 법성포에도, 우리 섬 앞 큰 섬에도 여자가 있었다. 작은 각시가 여럿 있었다. 물론 어머니도 다 아는 일이다.

칠산바다에서 조기를 잡았던 송이도 사람들은 작은 풍선배로 군산, 목포, 여수에서 올라온 큰 중선배보다 많은 조기를 잡았다. 이들이 큰 배를 제쳐두고 많은 조기를 잡을 수 있는 것은 칠산바다의 물길을 알기 때문이다. 조기라는 놈은 물길을 따라 줄지어 들어온다.

칠산바다에서 태어나 자랐고, 바다에 기대어 살아왔기에 어느 풀등에 새우가 많고, 어느 모래밭에 꽃게가 많은지 손바닥 보듯이 들여다볼 수 있다. 흑산도를 돌아 칠산바다로 돌아오는 조기 길목을 이들보다 잘 아는 사람은 없다. 그렇기에 주벅 하나로도 늘 만선을 누리던 사람들이 그들이었다. 진정한 칠산바다의 주인들은 큰 배를 가지고 조기를 훑어가는 사람들이 아니었다.

조기가 사라지면서 외지배들은 더 이상 칠산바다를 찾지 않았다. 칠산바다 사람들의 또 다른 희망은 꽃게였다. 칠산바다를 외지 배들에게 내준 섬사람들이 이제 제대로 주인행세를 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 바다도 오래가지 않았다. 조기가 파시를 이루던 시절에는 누렇게 알밴 암게 정도는 되어야 거들떠 봤던 녀석들이었다. 수컷은 고추나무 옆에 꽂아 거름으로 사용했다.

아직도 칠산바다 인근 작은 섬 송이도와 안마도에는 꽃게를 잡아 생활하는 사람들이 있다. 인근 낙월도에서는 멍텅구리배를 이용해 젓새우를 잡았다. 지금은 낙월도 앞 갯벌에 괴물처럼 육중하고 못생긴 멍텅구리배를 붙잡아 두던 닻만 고개를 처박고 있을 뿐이다. 꽃게잡이는 새우잡이에 비해서 일하는 사람이 작을 뿐 아니라 그물이나 어구를 준비하는 비용도 싸다.

칠산바다로 통하는 중요한 뱃길이 법성포구였다. 지금은 물이 쓰면 배가 뻘에 얹혀 옴짝달싹도 못할 정도로 토사가 쌓여 고기잡이를 나가려면 배가 움직일 수 있는 물때에 배를 포구에서 빼 놓아야 할 형편이다. 칠산바다가 조기의 모태라면 법성포구로 이어지는 갯골은 탯줄이다.

황금조기를 기다리는 칠산도 괭이갈매기

법성포 양철지붕 처마에 걸린 굴비 두름
법성포 양철지붕 처마에 걸린 굴비 두름 ⓒ 김준
칠산바다의 갯벌을 만들어내는 영광의 법성과 흥농 일대에 1970년대 말 시작된 원자력발전소는 최근 6호기까지 건설되어 운영되고 있다. 그동안 원자력발전소와 관련해 1987년 가마미 해수욕장 주민들의 관광권 및 맨손어업 피해에 대한 보상운동에서 비롯하여 1988년 성산리 주민들의 맨손어업 보상운동, 89년 법성포 실뱀장어 체포 어민들의 시위, 90년대 어업보상운동과 주민들의 김양식 피해보상운동, 원자력발전소에서 배출한 온배수로 인근 해수 온도가 높아지면서 나타나는 피해보상운동 그리고, 핵폐기장 유치반대운동으로 이어져 왔다.

영광에 원전이 들어서면서 수조원의 예산이 투자되어 2년 후 인구가 늘어 영광시가 된다던 청사진은 잊혀진지 오래다. 한국수력원자력이 홍보영상을 만들어 그렇게 선전하던 '기적의 땅'. 첨단과 문화가 함께 하는 미래의 땅, 칠산바다를 내주고 얻은 결과는 그게 아니었다.

칠산바다를 위협하는 것은 인간들이다. 달라는 것을 모두 내주고 앙상하게 뼈만 남은 칠산바다. 이제 앙상한 육신마저 달라고 보챈다. 일제강점기에는 산미증식계획으로, 해방 후에는 '밀가루공사'로 바다와 갯벌이 메워졌다. 땅을 가질 수 있다는 말에 밀가루로 연명하며 이를 악물고 지게질을 했었다.

그 땅은 대부분 권력과 법률에 밝은 인간들에 의해서 농간질 당하고 말았다. 독재시절에는 중장비들이 동원된 무시무시한 국책사업으로 주민들은 말 한마디 못하고 바다를 내주었다. 새만금에서 장항에서 바다와 갯벌을 노리는 인간들의 탐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칠산바다에 참조기가 사라졌다. 왜 사라졌을까. 영광원자력 발전소에 배출하는 온배수, 간척과 매립으로 산란장의 환경변화, 무분별한 남획 때문이라고들 추측한다. 조기가 잡히지 않자 어민들은 꽃게와 새우로 질긴 삶을 이어갔다. 이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조기가 그랬던 것처럼. 칠산도를 지키는 괭이갈매기는 둥지를 박차고 높이 날아 바다를 응시한다. 흑산도를 지나 칠산바다로 줄지어 들어오는 조기떼를 기다리며.

칠산도의 주인 괭이갈매기가 힘찬 날개짓을 하지만 칠산바다의 주인 참조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칠산도의 주인 괭이갈매기가 힘찬 날개짓을 하지만 칠산바다의 주인 참조기는 돌아오지 않는다. ⓒ 영광군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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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여 년 동안 섬과 갯벌을 기웃거리다 바다의 시간에 빠졌다. 그는 매일 바다로 가는 꿈을 꾼다. 해양문화 전문가이자 그들의 삶을 기록하는 사진작가이기도 한 그는 갯사람들의 삶을 통해 ‘오래된 미래’와 대안을 찾고 있다. 현재 전남발전연구원 해양관광팀 연구위원으로 근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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