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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배추밭  수해 피해 지역인 진부 6·9리 들머리에는 뽑지 않은 배추밭이 눈에 띄고, 마을 곳곳에는 배추, 무가 뽑히지 않은 텃밭들이 보인다.
버려진 배추밭
수해 피해 지역인 진부 6·9리 들머리에는 뽑지 않은 배추밭이 눈에 띄고, 마을 곳곳에는 배추, 무가 뽑히지 않은 텃밭들이 보인다.
ⓒ 선대식

하진부 6·9리 풍경 언제쯤 수해 복구가 마무리 될 수 있을까?
하진부 6·9리 풍경
언제쯤 수해 복구가 마무리 될 수 있을까?
ⓒ 선대식
비타민 드링크제 한 병, 두유 한 팩, 커피 두 잔, 녹차 한 잔, 귤 셋과 사과 하나. 4개월 만에 다시 만난 수해 피해 주민들에게서 내가 얻은 것들이다. 극구 사양했지만 모두 내게 마실 것 하나, 먹을 것 하나씩 손에 쥐어 주었다.

4차선 도로를 따라 수해지역으로 가는 길은 녹록치 않았다. 하진부 6·9리로 가는 도중에 계속 차가운 바람이 내 얼굴을 때렸다.

눈이 녹아 질펀한 길에 바지 끝단과 신발이 젖어 들어갔다. 계속해서 지나가는 육중한 트럭들이 만드는 모래가 덮쳤다.

하진부 6·9리 들머리에는 뽑지 않은 배추밭이 보였고, 새로 짓는 건물 한 채가 눈에 띄었다. 마을에 들어서자 하천 주변에 돌이 쌓여있는 것을 제외하곤 여름의 풍경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너진 다리는 그대로였고 멀리서 포클레인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기둥과 문턱이 썩어가고 있는 집들

전재옥 할머니  할머니는 "집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게 가장 큰 걱정이야"라며 장판을 들어보였다.
전재옥 할머니
할머니는 "집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게 가장 큰 걱정이야"라며 장판을 들어보였다.
ⓒ 선대식
한 집을 찾아 문을 세차게 두드렸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다시 돌아갈까 생각하다가 다시 문을 세차게 두드리니 할머니가 나오셨다. 취재를 나왔다고 하니 할머니는 추우니 어서 들어오라고 재촉했다. 오후 1시 30분, 집 안에 들어서자 싸늘한 기운에 깜짝 놀랐다.

집 안은 도배와 장판이 새로 돼있어 깨끗한 모습이었다. 다만 벽이 훤히 보일 정도로 가재도구들이 부족해 보였다. 전재옥(82) 할머니는 "여름에 집에 물이 가득 차 장롱 꼭대기 이불 빼놓고는 다 망가졌어"라고 말했다.

수해 때 할머니의 집은 '반파' 판정을 받아 750만원을 받았다. 하지만 그 돈으로는 집을 수리하고 가재도구를 사기에는 부족했단다. 정 할머니는 "TV, 냉장고를 지원 받았지만 세탁기를 사지 못해 손빨래를 하고 있어"라고 말했다. "부족한 게 끝이 없어"라고 덧붙였다.

세를 놓았던 방 세 칸은 수리 못한 채 그대로고 할머니가 쓰는 안방과 거실, 부엌만 수리했다. 세를 놓지 못해 수입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한 드럼에 18만원 하는 기름값이 할머니에겐 큰 부담이다. 할머니는 "집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게 가장 큰 걱정이야"라며 장판을 들어보였다. 할머니의 말대로 나무로 된 기둥과 문턱이 썩어가고 있었다.

1시간 동안 만난 할머니는 고맙다며 내게 두유 한 팩을 내밀었다. 사양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난 오른쪽 점퍼 주머니에 두유를 넣고는 다시 질펀한 거리로 나왔다.

인근의 김명실(68) 할머니의 집도 나무로 된 기둥이 썩어 들어가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김 할머니는 "밤에 잘 때 뚝뚝 나무 갈리는 소리가 들려, 겁이 나 죽겠어"라고 말했다. 김 할머니 역시 취재를 끝내고 돌아가려는 나를 그냥 보내지 않았다. 할머니가 끓여준 따뜻한 커피에 몸을 녹일 수 있었다.

"잠 잘 때 없으면 여기서 자"

김치를 잘게 썰고 있는 김복순 할머니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김치를 잘게 썰고 있는 김복순 할머니
그의 가장 큰 걱정은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 선대식
이번에는 하천과 맞닿아있는 쪽으로 갔다. 텔레비전 크기만 한 돌을 가득 실은 트럭이 하천에 돌을 붓고 있었다. 기울어진 전신주에는 사람이 올라가 전기 줄을 매만지고 있었다. 또한 KT 차량 한 대가 마을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아직 완전한 복구가 이뤄지지 않은 모양이었다.

많은 집들은 어느 정도 복구가 된 편이었지만 몇몇 집은 벽 한 쪽이 무너진 모습 그대로였다. 벽이 사라진 곳에 나무 막대로 지붕만을 받치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런 집 중 한 곳을 찾아갔다. 어디서 많이 본 듯한 할머니가 김치를 아주 잘게 썰고 있었다.

김복순(75) 할머니. 어디선가 들어 본 이름이었다. 할머니는 취재하러 왔다는 소리에 화부터 냈다. 김 할머니는 "자네 같은 청년들이 숱하게 나를 취재해갔어, 녹음까지 했어. 대피소에서 대통령이랑 악수까지 했어. 그런데 지금 난로도 없어 이렇게 벌벌 떨고 있어"라고 말했다.

@BRI@대피소. 지난 7월 수해 취재 때 제일 먼저 찾은 곳이 대피소였다. 김 할머니는 "장애 2급인 할아버지와 손자 원빈이와 살고 있어"라고 말했다. 아, 김 할머니는 대피소에서 처음으로 만난 취재원이었다. 박원빈(7)군의 이름이 떠올랐다.

김 할머니는 다른 수재민과 마찬가지로 먹고 살기가 막막하다. 만두를 빚어 시장에 팔아 생계를 유지하고 있다. 김 할머니는 "일주일에 한번 나가는데, 지난주엔 2만원 팔았어, 많이 판 거지"라고 말했다. "그 돈으로는 할아버지도 병원에 못 데려가. 원빈이 유치원 졸업 앨범비도 다 못 냈어"라고 말을 흐렸다.

할머니의 가장 큰 걱정은 이 집을 떠나야 하는 것이다. 김 할머니는 "여기 고수부지 만든다고 내년 2월까지 나가라고 해, 땅이 군 소유지라서 보상금이 얼마 나오지 않을텐데, 걱정이야"라고 말했다.

할머니는 만두소를 다 만들자 내게 커피를 타다 주셨다. 그러고는 "학생 혼자 왔어? 취재비는 받고 일하는 거야?"라고 물었다. 할머니는 또한 "잠 잘 때 없으면 여기서 자, 원빈이랑 같이 자면 돼"라고 덧붙였다.

"지금이 제일 살기 힘들어"

다시 만난 엄옥길 할머니  다시 찾은 엄 할머니의 집(오른쪽 위)은 다행히 어느 정도 복구가 돼 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오른쪽 아래)도 그때보단 나아보였다.
다시 만난 엄옥길 할머니
다시 찾은 엄 할머니의 집(오른쪽 위)은 다행히 어느 정도 복구가 돼 있었다. 할머니의 모습(오른쪽 아래)도 그때보단 나아보였다.
ⓒ 전관석·선대식
이번 취재에서 가장 만나고 싶었던 엄옥길(77) 할머니 댁을 찾았다. 지난여름 엄 할머니는 모든 걸 잃었다며 "죽어야지, 죽어야지"라고 되뇌었다. 형체만 남은 집에 할머니를 남겨 놓은 채 떠났던 순간을 잊지 못했다.

어둠이 깔리기 시작한 오후 5시 30분. 다시 찾은 엄 할머니의 집은 다행히 어느 정도 복구가 돼 있었다. 사라진 벽은 철제 패널로 덧씌워져 있었다. 집 주변을 둘러본 지 30분 만에 집으로 돌아오는 할머니를 만날 수 있었다.

"집이 완전히 부서져 1500만원 받았어. 그 돈으로 어떻게 집수리하고 세 든 사람 보증금을 다 줘! 외상으로 집 수리한거야. 지금 기름도 외상으로 빌려 쓰고 있어. 내 수중에 3000원 밖에 없어. 얼어 죽을지도 몰라."

할머니는 그간의 어려움을 다 토해냈다. 할머니는 집 뿐 아니라 먹을 것, 입을 것도 걱정이다. 수재민에게 많은 쌀과 함께 라면, 김치가 제공됐다. 하지만 최근에야 벽을 패널로 막은 탓에 엄 할머니는 쌀과 라면을 죄다 잃어버렸다. 누군가 훔쳐간 것이다. 옷도 넉넉지 않다.

그래서일까, 할머니는 "사는 게 전쟁이야"라고 말했다. 또한 "어머니 배에서 나고 제일 힘든 것 같아, 전쟁도 겪었는데 그땐 지금보다 나았어"라고 덧붙였다.

할머니는 대뜸 내 앞에 사과 하나와 귤 셋을 내놓았다. 할머니는 "사과와 귤을 먹기 전에 못 나가"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어지는 한 마디. "잘 때 없으면 여기서 자고 가. "

"자살 생각하는 농민들이 많아"

곳곳에 수해의 흔적이... 많은 집들은 어느 정도 복구가 된 편이었지만 몇몇 집은 벽 한 쪽이 무너진 모습 그대로였다.
곳곳에 수해의 흔적이... 많은 집들은 어느 정도 복구가 된 편이었지만 몇몇 집은 벽 한 쪽이 무너진 모습 그대로였다. ⓒ 선대식
무너진 다리  무너진 다리는 그대로였고 멀리서 포클레인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무너진 다리
무너진 다리는 그대로였고 멀리서 포클레인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 선대식
진부를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저녁 7시에 농민 한 사람을 만났다. 지난 8월 수해 봉사활동으로 인연을 맺은 김종을(48)씨다. 김씨는 "농민들은 춥고 배고픈 상황이야"라고 말했다.

감자밭 3만평을 모두 잃은 김씨는 비닐하우스 보상비를 포함해 토지보상비로 평당 200원씩, 모두 900만 원을 받았다. 감자를 모두 수확했다면 2억 원 이상의 매출이 기대됐던 밭이었다. 김씨는 "650만 원짜리 비닐하우스 보상비가 만 원"이라며 한숨을 내쉬었다. 김씨는 또한 "막대한 빚을 진 농민들은 매일 술만 먹고 자살 생각하는 농민이 많아"라고 전했다.

수해의 흔적은 예상보다 깊었고, 생각보다 심했다. 그런 상황에도 김씨는 "지난 수해 때 봉사활동 와줘서 고마웠어"라며 녹차 한잔을 내 주었다.

저녁 8시, 서울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 안에서 11시간 동안 만난 사람들이 스쳐지나갔다. 서울은 연말 분위기로 들떠있지만 평창 진부는 전혀 그렇지 못하다. 이날 취재수첩에 적은 말보다 적지 못한 말들이 더 많았다.

덧붙이는 글 | 선대식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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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법조팀 기자입니다. 제가 쓰는 한 문장 한 문장이 우리 사회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밑거름이 되기를 바랍니다. 댓글이나 페이스북 등으로 소통하고자 합니다. 언제든지 연락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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