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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소희
ⓒ 왕소희
냄비는 어디에 올려놓지? 가스 불 위가 아니었던가?

하지만 그날 냄비는 지프차 위에 붙어 황토 빛 먼지를 휘날리며 신나게 달리고 있었다. 아니, 아니 이삿짐이 아니다. 지프차 머리 위에 풀로 붙인 듯 딱 그렇게 붙어 있었다.

'아무리 요상한 게 많은 인도라지만 저건 또 뭐야?!'

언덕 위에서 이 광경을 보고 있는 동안 차 한대가 더 달려왔다. 이번에 붙어 있는 것은 선풍기. 또 한 대 출현. 이번엔 탁상용 시계. 냄비, 선풍기, 시계!

요상한 행진은 마을에서도 계속되고 있었다. 멀쩡한 남자가 페인트 통을 들고 나타나 말끔한 벽 위에 낙서를 하고 다녔다. 역시 냄비, 선풍기, 시계를 그리고 큰 붓으로 쓱쓱 코끼리, 손바닥, 연꽃도 그렸다. 대체 이게 뭐야?!

"MP주의 선거기간이야!"

지나가던 아저씨가 멍하니 구경을 하는 나에게 말했다.

"당선되면 냄비나 선풍기, 시계를 준다는 말이지."

아, 그런 거였어! 하지만 이건 너무나도 당당하신 뇌물이 아닌가!

그림 그리는 남자와 벽에 그려진 열쇠와 손바닥 심볼.
그림 그리는 남자와 벽에 그려진 열쇠와 손바닥 심볼. ⓒ 왕소희
난 언덕 위로 달려가 사람들에게 이 재미난 소식을 알렸다. 그때 옆에서 일하고 있던 람이 자지러질 정도로 웃기 시작했다.

"아니, 아니야! 오해라고. 냄비, 선풍기, 시계는 정당의 심벌이야. 코끼리, 손바닥, 연꽃도 그렇고."

이런, 몇 개의 단어와 분위기로 힌디를 알아들을 수 있다고 자부한 나의 실수였다. 그런데 코끼리 연꽃은 그렇다 치고 냄비는 무슨 뜻이야?

"아무 뜻도 없어!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런데 냄비는 아니지만 선거 때 뇌물이 판을 치긴 해. 그게 걱정이야."

@BRI@그렇게 MP주의 선거전이 시작되고 온 마을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조그만 나의 진흙집은 갑자기 선거 운동본부로 변신했다. 람과 마을 사람들이 가득 모여 후보를 돕기 위해 바빴다. 마을 사람들과 같은 낮은 카스트(인도의 신분제도)에서 출마한 후보였다. 이름은 소니카. 여성이었다. 은행직원의 아내로 좋은 교육을 받았고 똑똑했다. 그녀가 많은 지지자들을 몰고 우리집에 왔다.

"만약 소니카가 당선 되면 마을에서 세 가지가 사라질 거야. 전기를 훔치는 남자와 정글로 가는 여자 그리고 새벽4시에 일어나는 소녀들!"

람은 그녀를 소개하며 말했다.

"아, 전기를 훔치는 남자를 본 적이 있어요! 사다리 위에 올라가서 전봇대에서 나온 전깃줄에 가는 전깃줄을 대어서 자기 집으로 끌어가고 있었어요. 그런데 그 집은 전력 발전소 바로 앞이었는데!"

내가 봤던 게 기억나 외쳤다.

"그래요, 사용료는 낼 수 없고 전기는 꼭 필요하니 훔칠 수밖에. 이 마을에서 소녀들은 새벽 4시에 일어나요. 물을 받기 위해 수도관 앞에 줄을 서서 끝없이 기다려야 하니까요. 오후만 되면 여인들은 짝을 지어 정글로 몰려가야 하고요. 언덕에도 나무가 널렸지만 사유지라서 주울 수 없거든요. 그러니 한 시간을 걸어서 정글까지 가는 거예요."

아담한 체구에 단정한 소니카 후보가 말했다.

"인도 정부에서 지원금을 주지 않는 게 아니에요. 지원금이 나옵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당선됐던 브라흐만(최고 카스트)당은 그걸 모두 빼돌렸어요. 그들이 또 다시 뽑히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겁니다."

그녀는 옳았다. 당연히 그녀를 뽑아야 한다. 하지만 소니카는 낙선했다. 브라흐만 당은 100루피(약 3000원)와 인도 소주 8병을 동네사람들에게 찔러 넣었다. 사람들이 뇌물에 홀라당 넘어가 또 그들을 뽑아준 것이다.

"바이삽(brother)! 삐요! 삐요!(마셔! 마셔!)"

그날 밤 소주를 마시며 즐거워하는 순리 바이삽에게 술을 권하며 슬쩍 말을 건넸다.

"다음엔 거기 찍어 주지 마요. 아휴! 답답해. 바이삽은 바보야? 그래야 수도도 생기고 전기도 잘 들어오죠!"

골랄끼또리아 사람들의 손에 쥐어진 작은 투표권 한 장은 실로 큰 힘이다. 가난하고 신분이 낮은 사람들이 세상을 바꿀 수 있는 기회란 그리 흔치 않은 것이다. 인도에서는.

아마도 사람들은 배신의 예술을 모르는 것 같았다. 소주 8병은 마시고 멀리 멀리 던져 버리면 될 텐데! 마을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생각이 없는 그들을 다시 뽑다니! 내년 선거에서는 아무리 소주를 먹는다 하더라도 뒤통수를 후려치기를! 제발.

벽에 잉크병, 코끼리, 시계 심볼이 그려져있다.
벽에 잉크병, 코끼리, 시계 심볼이 그려져있다. ⓒ 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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