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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띠 '발트의 길' 항공사진.
인간이 만든, 세계에서 가장 긴 띠 '발트의 길' 항공사진. ⓒ 리투아니아 국회
지금으로부터 15년 전인 1991년, 동유럽에서는 누구도 가능할 것이라고 생각지 못한 일이 현실화됐다.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수십년간 품어온 독립의 염원을 성사시킨 것이다.

무장폭력과 전쟁이 수반되는 다른 나라들의 독립투쟁과는 달리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은 전쟁이나 폭력 없이 전 세계에 전무후무한 평화로운 절차를 통해 독립을 쟁취했다. 훗날 세인들은 이 일을 일컬어 '노래하는 혁명'이라고 평한다.

이곳에서도 빨치산 같은 무장투쟁이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들의 독립을 실질적으로 앞당긴 것은 총칼이 아니었다. 대체 그들은 어떤 방법으로 적들과 대적했던 것일까? 그들의 용기있는 독립 투쟁의 역사는 15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한번 세계의 관심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50년을 기다린 무혈혁명

@BRI@1939년 8월 23일, 러시아의 외무부장관 바체슬라브 몰로토프와 독일의 외무부장관 요아힘 본 리벤트로프는 스탈린과 히틀러의 지령을 받아 독소 불가침조약을 체결했다. 두 외무부장관의 이름을 따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이라고도 불리는 이 협정은 러시아와 독일이 유럽을 사이좋게 나누어 갖자는 비밀조약이었다.

조약에 의하면, 독일 동편에 위치한 폴란드와 발트3국 등은 러시아 영향에 들어가는 것이었으나 독일이 그 약속을 깨고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됐다.

발트3국은 독일과 러시아의 침공을 번갈아 당하다가 결과적으로 2차 대전 종전 후 소련 공화국으로 귀속되고 말았다. 폴란드와 체코 같은 동유럽 국가들은 그나마 국가로서 주권과 자유가 보장되는 독립국으로 남을 수 있었으나, 발트3국은 세계의 지도에서 사라져버렸다.

그로부터 정확히 50년이 지난 1989년,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사람들은 소련의 발트3국 지배의 부당함을 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한 자리에 모였다. 당시만 해도 이 사람들은 이 모임이 기적의 시작이 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발트의 길'이 이어진 길.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km에 달한다.
'발트의 길'이 이어진 길. 에스토니아 탈린에서 라트비아 리가를 거쳐 리투아니아 빌뉴스까지 600km에 달한다. ⓒ 오마이뉴스 고정미
당시 발트3국이 한자리에 모인 이유는 그들이 식민지가 된 근본적 원인이 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의 체결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함이었다.

고르바초프의 개혁·개방 운동으로 소련 전체에서 자유와 독립의 의지가 확산해가던 시기였고, 발트3국을 비롯한 소련 공화국들 사이에서도 자유에 대한 의지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내놓은 개혁과 개방은 서방을 향한 것들에 국한됐을 뿐, 정작 이들의 독립에 대한 내용은 없었다.

1989년 5월, 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는 3개국의 민족정치정당 통일조직인 '발트총회'를 창설했고, 소련 정부에 "불법 점령사실을 인정하고 독립을 보장하라"고 요구했다. 때마침 독소불가침조약 50주년을 앞두고 그들의 목소리를 더 크게 전달하기 위한 방안이 제시되었고, 그것이 바로 대규모 인간띠 '발트의 길'이었다.

그러나 일정이 너무 촉박했다. 대규모 행사를 완벽히 준비할 시간도 충분치 않았을 뿐더러 국민 참여를 대대적으로 이끌어내지 못해 실패할 가능성이 다분했다.

또 자칫 이를 저지하기 위한 소련의 무력 침공도 무시할 수 없었다. 실제 행사가 열리기 약 일주일 전인 8월15일, 러시아 <프라우다> 지에는 발트 3국에서 계획하고 있는 불법 행위를 금지한다는 기사가 나갔으며, 루마니아의 차우체스쿠가 소련에 지원병력을 내어주기로 약속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왔다.

인간이 만든 세상에서 가장 긴 띠

그러나 꿈은 이루어졌다. 8월23일,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라트비아의 수도 리가를 지나 리투아니아의 수도 빌뉴스에 이르는 거대한 인간띠가 만들어진 것이다. 인간띠 길이만 자그마치 600㎞가 넘었고, 행사에 참여한 사람들도 약 200만 명이 넘었다.

인구밀도가 세계에서 가장 낮은 발트3국은 도시간 거리가 상당하다. 도시를 조금만 벗어나면 끝도 없이 숲과 평야가 펼쳐진다. 그런 숲과 평야 한 가운데까지 사람들이 손을 잡고 서야 했다. 게다가 1989년엔 승용차를 가진 국민이 전체 인구의 10% 정도에 불과했기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정시에 약속장소로 이동하는 것도 큰일이었다.

이 일이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계획은 이랬다. 주최 측은 600㎞에 이르는 거리를 50년을 상징해 50구획으로 나었다. 리투아니아의 경우, 매 4㎞ 구간마다 리투아니아 전통 제단을 세웠다. 성스러운 불이 점화된 전통 제단의 수 역시 50개였다.

리투아니아 제2의 도시 카우나스에서 행사준비를 맡았던 알렉산드라스는 당시를 이렇게 회고한다.

"인간의 눈으로 한 번도 보지 못했고, 어떤 기막힌 상상력으로도 도달할 수 없는 그것을 어떻게 묘사해야 할까. 행사 진행자들은 어마어마한 인원수의 차량과 사람들의 이동방법을 준비해야 했다. 교통부 관계자, 환경운동 관계자, 지역주민들, 그리고 비행사 등 여러 사람과 세부적인 것까지 계획했지만 마치 바닷물을 숟가락으로 퍼내는 것만 같았다.

그러나 카우나스에서만 25만 명이 모였다. 행사에 참가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그 사람들을 운송할 차들이 절대적으로 모자랄 정도였다. 버스회사들은 버스 노선을 급하게 바꾸면서까지 협조했다."


마침내 8월23일, 200만 명에 이르는 사람들이 계획대로 세 나라를 잇는 도로 위에 빽빽이 들어찼다. 사람들 위로는 민간비행기가 선회하며 줄곧 그 역사적인 장면을 촬영했고, 사람들은 국가를 부르며 국기를 흔들었다.

600㎞에 늘어선 200만 명, 자유를 외치다

ⓒ 리투아니아 국회
가장 중요한 순간은 저녁 7시에 펼쳐졌다. 7시가 되자, 그곳에 모인 수백만 명의 사람들은 15분 동안 함께 손을 맞잡았다. 리투아니아 사람들은 '라이스베스(laisves)', 라트비아 사람들은 '브리비바(briviba)', 에스토니아 사람들은 '비바두스(vabadus)'라고 외쳤다. '자유!'

상상해보라. 600㎞에 걸쳐 손을 맞잡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자유'라고 외치고 있는 모습을. 동시에 각 마을과 도시의 성당에서는 그 시각에 맞춰 종소리를 울려댔다.

당시 마리암폴례에 살고 있던 아크빌례 할머니는 훗날 "나는 그 순간을 집에서 맞이하고 있었다, 나이가 많아서 1살짜리 손녀와 함께 하루종일 라디오를 들으며 7시를 기다렸다, 7시가 됐을 때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손녀의 손을 잡고 노래를 하며 춤을 추었다"라고 회상했다.

뉴스 에이전시를 통해 이 사건은 전 세계로 중계됐다. 소련의 무력진압은 없었고, 행사는 대성공을 이뤘다. 그 후 1990년 리투아니아는 독립을 선포했고, 1991년 마침내 소련으로부터 3국 모두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발트의 길'은 총 한 자루 사용하지 않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은 채 엄청난 결과를 가져왔다. 이 길은 인간이 만든 가장 긴 띠로 기네스북에 기록됐다.

'발트의 길'이 성공하자 몰도바·우크라이나 등 소련내 다른 공화국에서도 억압에 대항하는 인간띠를 만들었다. 지난 2004년에는 대만에서도 2·28학살(1947년 2월 28일 중국 본토에서 건너온 장제스 정부가 대만 현지인 2만여명을 공산주의자로 몰아 학살한 사건)을 기념하는 대규모 인간띠 행사가 열렸다. 지구를 감싸는 띠를 만드는 장면은 마이클 잭슨의 뮤직비디오에도 나올 정도로 평화와 인류 화합의 대표적 상징으로 자리잡았다.

'발트의 길'은 살상용 무기와 학살이 난무하는 전쟁에 경종을 울리고 인류 화합에 대한 은은한 메아리를 울려주는, 세계사의 중요한 사건이 되었다.

전 세계여, 이날을 기억하라

리투아니아에서 인간띠가 시작된 곳을 표시해 놓은 곳. 리투아니아어로 '기적(stebuklas)'이라고 쓰여짔다. 최근엔 돌판 위에 서서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돈 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리투아니아에서 인간띠가 시작된 곳을 표시해 놓은 곳. 리투아니아어로 '기적(stebuklas)'이라고 쓰여짔다. 최근엔 돌판 위에 서서 시계방향으로 세 번 돈 후 소원을 빌면 이루어진다는 말도 있다.
현재 발트인들은 그 사실을 인류에게 남겨줄 유산으로 만들기 위해 움직이고 있다.

올해 12월 4일, 에스토니아 수도 탈린에서 열린 발트3국 유네스코 대표회의에서는 1989년 '발트의 띠(발트의 길)' 행사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록시키기로 입을 모았다.

세계기록유산이란 인류의 문화를 계승하는 중요한 유산임에도 훼손되거나 영원히 사라질 위험에 처한 역사적인 기록을 보존하기 위해 유네스코에서 운영하는 프로그램으로, 우리나라 것으로는 훈민정음·직지·조선왕조실록·승정원일기가 등재되어 있다.

발트3국은 '발트의 길'을 준비하면서 사용했던 모든 문서와 기록들을 모아 2007년 12월에 유네스코에 정식제출할 계획이다. 발트3국의 국민은 아름다운 도시와 자연경관을 가진 나라의 국민이 아닌, 세계사에 큰 획을 그은 역사의 주인공으로 또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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