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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도 한 자리에 앉아 있을 틈이 없는 김미숙씨가 늦은 밤,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보고 있다.
잠시도 한 자리에 앉아 있을 틈이 없는 김미숙씨가 늦은 밤, 영농조합 사무실에서 남은 일을 보고 있다. ⓒ 이우성

43농가가 속한 영월우리영농조합을 이끌고 있는 총무 김미숙(43)씨.

한 번이라도 만나본 사람은 그가 대단한 여장부라는 걸 단번에 안다. 그는 매일 뛰어다닌다. 차분히 앉아있을 틈이 없다. 대부분 영농조합이 그렇지만 어디 한 군데 펑크가 나면 뛰어가 몸으로 해결해야 한다.

여자의 몸으로 어떻게 하냐고? 천만의 말씀이다. 애당초 그의 머릿 속에는 여자 남자의 구분이 없다. 쌀 40㎏를 번쩍 드는 사람, 수확한 감자 포대를 가볍게 들어 경운기에 올리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일이 있기 때문에 달려들어 하는 것 뿐이다.

그가 꿈꾸는 바람직한 영농조합의 형태는 어떤 것일까. 힘이 실려 있는 그의 목소리, 옆에서 그의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사는 힘을 느낀다.

99년 5가구가 환경농업 시작, 2002년 독자영농 출범

@BRI@우리영농조합 조합원 43농가는 주로 잡곡을 재배한다. 평균 연령은 47세. 평창·정선·단양·제천의 20농가도 계약재배 농가다. 콩류·수수·차조·기장·율무 등 잡곡이 매출의 70% 가량이다. 올해부터는 브로콜리·양배추·배추·상추·무도 재배했다. 그밖에 토마토·포도·옥수수도 나온다.

지금 한창 잡곡 수매 중이라 김미숙씨는 더 동분서주한다. 그는 94년에 농민운동을 하던 영월 토박이 유양종(44)씨와 결혼해 영월에 와서 산다. 남편은 이 곳에서 생산관리 이사를 맡고 있고 10월까지는 정책실장을 맡았다. 김씨도 농민회 협동사업국장을 맡다가 올해 그만두었다.

친환경농업을 시작한 것은 98년이었다. 그리고 99년 이 곳 5농가가 "환경농업 한번 해보자"고 뭉쳐서 이듬해부터 영월농민회가 재창립되면서 농민회 산하 환경농업위원회로 활동했다.

이들은 2002년에 독자적인 영농조합으로 출범했다. 매출이 1억이 넘으면 조합을 만들자고 구상했다가 2002년 11월25일 17농가가 참여해 출자금 1500만원을 들고 영농조합을 발족시킨 것. 초창기 멤버들이 지금까지 중심에 서서 영농조합을 꾸려오고 있다. 이들의 물건은 대부분 생협연대로 나간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다. 수매하고도 돈을 못 줘 6개월이 지나서야 수매값을 치를 수 있었다. 매출의 2%는 출자로 받아 출자를 일상화했다. 자신들의 힘으로 한번 독자적으로 꾸려보자는 신념이 충만했기에 가능했다. 정부 지원 없이도 꾸준히 매출이 늘어난 덕분에 창고부지와 건물도 조합의 힘으로 세울 수 있었다.

조합을 만들고 첫 해 2300만원이 남았다. 실무자 없이 조합원들이 돌아가면서 물류와 소포장을 한 덕분이었다.

그 돈으로 땅 1000평을 샀다. 물류지원사업비를 받아 2.5톤 차 두 대와 창고 25평을 지을 수 있었다. 저장고와 건물은 2004년에 지었다. 물류 소포장을 할 수 있는 65평 창고는 2005년 봄에 증자를 해서 4500만원을 들여 지어 작년 12월 3주년 기념식과 현판식을 함께 했다. 이제 채소사업이 확대되면 저장고도 더 필요하지만 올해 농사가 힘들고 어려워 마련을 못하고 있다.

총무, 회의 안건 작성, 물류 포장까지... 1인10역

첫해 매출 5억에서 올해 14억 정도 매출을 올릴 수 있을 정도로 외형은 확대되었다. 그러나 조직은 놓치는 것이 많아 여전히 아쉬움이 많다. 의욕도 많이 죽는 것 같다. 이럴 때일수록 체계와 원칙이 중요하다는 것도 물론 잘 알지만 부족한 것이 많다.

협동조합의 전형을 만들어보자는 전망을 갖고 꾸준히 공부하고 토론한 것이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조직운영의 틀을 갖추지 못했다고 아쉬워 한다. 그는 사업과 운동을 통일해내는 과정을 협동조합을 통해 모범을 보이고 싶은 것이다.

김미숙씬는 이 곳에서 총무 일을 본다. 회계, 이사회 회의자료 만들기, 공문발송, 대외업무가 주업무. 하지만 작목반 회의 안건 만들기와 참가·물류와 포장까지 인원이 모자라면 어디든지 달려가야 한다. 인력이 모자라고 실무도 안정이 안 되어 "참 피곤한 삶을 살고 있다"고 스스로 말한다.

게다가 잡곡류는 재고에 매우 예민하다. 펑크가 나면 대책이 없다. 관리소홀로 곰팡이가 나서 리콜이 된 적도 있다. 다행히 9월에 회계 실무자가 들어와 한 시름 놓았다.

이 곳은 2명 이상 공동 생산한 농산물을 우선 수매한다. 지금까지 3농가는 꾸준히 공동생산을 하고 있다. 잡곡은 일정량 이상 재배를 의무화시켰다. 잡곡 주생산지여서 잡곡이 일정 정도 규모화 되어야 경제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점차 노지 재배(보통의 밭이나 꽃밭에서 채소나 꽃 따위를 가꾸는 일) 잡곡을 정리하려는 농가가 늘고 있어 걱정이다. 그래서 잡곡을 포기하는 땅을 조합에 임차해 영농사업을 하면 좋겠다는 생각도 갖고 있다.

해고, 민주화투쟁, 민중당 활동, 그리고 귀농

영농조합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소를 이용해 밭에 비닐을 깔고 있다. 이곳은 공동으로 재배한 농작물은 우선 수매한다.
영농조합 조합원들이 공동으로 소를 이용해 밭에 비닐을 깔고 있다. 이곳은 공동으로 재배한 농작물은 우선 수매한다. ⓒ 이우성
대구가 고향인 김미숙씨는 의정부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큰오빠가 있던 인천으로 건너가 살았다. 구로공단과 부평공단에서 노동운동을 하다가 해고되고 87년 민주화투쟁 때 시위 농성을 했다. 민중당 활동을 2년 반 하다가 선거가 끝나고 일상 지역조직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부평생협 조직을 만들어 실무자로 일했다.

그 때부터 농업문제를 생각하게 됐다. 도시는 답답했다. 농촌지역에 살면서 농촌문제의 대안을 만들어보자는 생각이 싹틀 무렵, 학교급식에 납품을 갖다가 40㎏ 쌀을 번쩍 들어 나르는 것을 본 유양종씨 눈에 띄어 유씨의 작업에 걸려(?) 결혼했다.

결혼하고 영월에 살면서 농사는 처음 해 보았다. 6월말 결혼해서 7월에 감자를 캐는데 무심코 캔 감자를 넣은 포대를 경운기에 번쩍 들어 올렸더니 동네 할머니들이 다 깜짝 놀랐다. 힘쓰는 일은 자신이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많이 깨졌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이 점점 성숙해지는 것 같았다.

어느 겨울 모임에 갔더니 한 아주머니가 농약 이름을 줄줄 외울 정도로 농사지식이 많은 것에 김미숙씨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은 농사에 너무 넋을 놓고 있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 다음부터는 악착같이 농사를 지었다. 어머니에게 아이를 맡기고 밭에 나가 일을 했다. 경제적인 생활이 어려울 때니까 시골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고민이 많았다. 농사일 하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밤 11시까지도 일을 했다.

"농민회 일을 보면서, 쌔가 빠지게 농사일 했습니다. 그 땐 힘이 뻗쳤지요. 굉장히 중요한 시기라는 생각 때문에 힘든 줄도 몰랐어요."

혼자 하루만에 퇴비 다 뿌려도 재미났다

한번은 3년째 하우스에서 토마토를 재배하는데 토양을 잘 가꾸어보자고 생각해 가을에 호밀을 심어 갈아엎고 토마토를 심었다. 농사가 잘 되었지만 15㎏ 한 상자에 1000원밖에 안 되는 시장가격 때문에 저절로 울음이 나왔다. 이건 아니었다. 시장 상황에 따라 운명을 맡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이듬해 오이를 심었는데 값이 참 좋았다. 그런데 1주일새 진딧물에 오이를 다 내주었다. 그 때부터 환경농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퇴비사를 짓고 둑의 풀을 다 깎아 '세렉스'(농촌에서 많은 쓰는 4륜구동 트럭)로 20차를 실어 날라 썬 뒤, 미생물로 발효시켰다. 겨우내 뒤집어 봄에 혼자서 하루만에 퇴비를 다 뿌렸다. 숯·골분·쌀겨도 혼자 다 뿌렸다.

원 없이 일했다. 일하는 것이 재미있었다. 그 때부터 오이가 봄에 심어 가을까지 싱싱하게 달렸다. 3년만의 일이었다. 얼굴이 '초코파이'가 되어도 신이 났다.

김씨는 농사지으며 몇 번을 울었다. 2002년 수해가 나서 하우스가 잠겼을 땐 망연자실해 울었다. 수해가 난 토마토를 걷고 오이를 심었는데 20일 지나 또 물이 들어왔다. 고추밭에 병이 나 절단 났을 때도 울었다.

지금 그가 짓는 농사규모는 하우스 1000평, 노지 2000평이다. 하우스는 토마토, 오이, 고추를, 노지에는 잡곡을 심고 있다. 올해는 남편과 자신이 영농조합과 농민회 일을 보느라 다른 사람에게 임대를 주었다. 남편은 이제 공동영농사업단이 구체화되면 그 일을 보게 될 것이라고 한다.

"농사는 여자가 하고 인증은 남자 이름으로"

"농사는 여자가 다 하고 인증은 남편 이름으로 하니, 농촌에 여성 이름은 없습니다. 여성농민의 역할을 다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이 지역에서 워낙 유명한 남편이라, 그저 한 남편의 마누라로 살기에는 억울했다고 한다. 제한적이고 보조적인 역할로 머무는 것은 너무 편한 생각이라는 것. 그래서 자신의 이름으로 살고 싶었다고 한다. 농사일도 조합일도 몸으로, 정신력으로 뛰어다닐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김미숙씨는 여성농민들도 자기 틀을 뚫고 나오려는 자기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작은 것이라도 여성농민끼리 모여서 뭔가 해보았으면 한다. 같이 할 수 있는 사업, 이를테면 장아찌 같은 발효가공식품을 만든다든지 작은 것이라도 여성들이 공동으로 사업을 하면 자신감도 회복하고 자기신뢰도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고 말한다.

전국에 산재한 영농조합이 네트워크화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밝혔다. 전국의 친환경생산지가 농협이나 관주도의 고부가 가치 쪽으로 갈 것인지, 아니면 대안농업을 염두에 두고 갈 것인지 고민을 많이 해야 할 때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대안을 갖고 있는 조합끼리 연대하고 고민을 공유하고 방향을 함께 잡으면 덜 쓸쓸하겠다고 말한다. 건강하게 문제를 풀 수 있는 어떤 환경농업 유통의 규칙 같은 것이 있으면 좋겠단다.

"뜬 구름 갖고 농촌 오는 사람은 '사절'"

이 곳은 귀농자가 많지 않다. 금방 왔다가 사라지는 사람도 있다. '귀농자가 많아져서 지역에 잘 배치하면 농촌의 실무자로 역할을 할 텐데' 라면서 그는 아쉬워한다. 생태라는 뜬 구름만 갖고 현실을 보지 않는 사람은 사절이란다.

김미숙씨는 힘이 세다. 끊임없이 자기 역할에 대해 고민하는 그를 가까이 할 수 있는 것은 행운이다. 그의 고민은 혼자만 그치지 않는다. 동강 물결처럼 유유히 아래로 흘러 깊게 패이고 생채기 난 곳까지 감싸 안을 것을 믿는다.

아이들 이름처럼 곧 다가올 새봄(11세)에 단비(8세) 내려 알찬(8세) 결실 이룰 수 있을까. 대중을 생각하고, 농민의 삶을 생각하고, 여성농민의 자기역할에 대해 끊임없이 뭔가를 만들어낼 그에게 축복 있으라.

덧붙이는 글 |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영월우리영농조합이 그동안의 고생만큼 따뜻한 빛을 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힘센 김미숙씨가 하는 일이 다 잘 이루어져 영월의 큰 등대로 빛날 것을 저는 믿습니다. 흙살림(www.heuk.or.kr)신문 12월호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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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 심는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얼마나 큰 축복일까요? 세월이 지날수록 자신의 품을 넓혀 넓게 드리워진 그늘로 세상을 안을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낌없이 자신을 다 드러내 보여주는 나무의 철학을 닮고 싶습니다.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산다면 또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 질까요? 그렇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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