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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
백제금동대향로 ⓒ 국립부여박물관
또 멧돼지가 총에 맞아 죽었습니다. 서울 도심의 삼청공원에 나타났던 이 녀석은 얼핏 보기에도 기골이 장대하고, 생긴 것도 이쁘더군요. ‘우리 시대의 마지막 맹수’인 멧돼지가 인간과의 불화로 수난을 겪는 것이 내내 안타깝습니다. 하긴 사람 입장에서도 멧돼지로 인한 피해가 만만치 않지요?

문명이 덜 깨었던 고대에는 사람을 포함한 동물의 서식 밀도(密度)가 그다지 높지 않았을 것이고, 따라서 인간과 맹수와의 갈등도 지금처럼 격렬하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됩니다.

자연(自然) 속에서 ‘스스로(自) 그렇게(然)’ 살았겠지요. 섭리(攝理)랄 수 있는 먹이사슬의 법칙의 ‘보이지 않는 손’이 공기처럼 대지를 감싸고 있었을 터이고요.

우리 겨레와 멧돼지의 인연에서도 이런 ‘여유’는 느껴집니다. 고고학의 흔적을 더듬어보지요. 청동기시대 초기에 우리 선조들이 그려 놓은 예술성이 높은 바위그림이 울산 태화강 상류의 한 절벽에 있습니다. 흔히 반구대 암각화(岩刻畵)라고 부르는 것이지요.

이 그림은 아름답기도 하거니와 놀라울 정도의 사실성(事實性)으로 그 시대 사람들의 삶의 모습, 살림의 구석구석을 보여줍니다. 당시의 산업백서(産業白書)라고나 할까요.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어 있는 가로 8m, 세로 2m 넓이의 이 그림에는 고래를 잡거나 맹수를 쫓는 사람의 모습과 고래 사슴 호랑이 등과 함께 멧돼지도 그려져 있답니다. 대개는 암벽 면에 날카로운 꼬챙이 같은 것을 써서 새기는 방법으로 형체를 표현한 것입니다.

이 그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동물은 고래입니다. 반구대가 고래잡이로 유명한 장생포항에서 26km 떨어진 곳인 점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습니다. 기원전 2900년경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그림으로 미뤄볼 때 이미 당시에 그 부근 바다에서는 고래잡이 즉 포경업(捕鯨業)이 일반적인 생업(生業)이었다는 것이지요. 5천 년 전의 포경업이라, 역사의 두께를 어림해 볼 수 있겠군요.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의 탁본.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도 여럿 찾아 볼 수 있다.
청동기 시대 사람들의 생활상을 보여 주는 울산 반구대의 암각화의 탁본. 멧돼지로 보이는 동물의 모습도 여럿 찾아 볼 수 있다. ⓒ 울산광역시
멧돼지도 고래 등과 같이 선사시대 한반도의 주인공 중 하나였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합니다. 바위그림은 선사시대의 대표적인 유적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세계 각지의 바위그림에서도 멧돼지가 역시 많이 등장한다고 합니다.

그림에 나오는 여러 모양의 멧돼지를 비롯한 동물들은, 필자만의 생각일지는 모르나, 이를 그린 사람이 오직 ‘사냥의 대상’으로만 생각한 결과물은 아니었을 거라는 느낌을 줍니다.

더불어 자연을 누리고, 때로는 토템과도 같은 원시 신앙의 대상이 되는, 요즘 말로 동반자 관계와 비슷하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말입니다. 물론 ‘너로 인해(너를 먹어) 내가 이렇게 잘 사니 참 고맙다’는 마음도 함께 그려진 것 같기도 하고요.

사냥군을 피해 숨어 있을까? 대향로의 산자락 사이로 비스듬히 상체를 내밀고 있는 멧돼지의 모습이다.
사냥군을 피해 숨어 있을까? 대향로의 산자락 사이로 비스듬히 상체를 내밀고 있는 멧돼지의 모습이다. ⓒ 강상헌
우리 고고학사에서 가장 화려한 발굴이라고 일컬어지는 백제금동대향로(국보 제287호)를 아시지요? 1993년 12월 어느 추운 날 아침 신문 1면을 도배하다시피 한 진흙탕 속의 이 대향로의 사진은 실로 엄청난 감동이었지요.

다음 해 국립중앙박물관과 지역의 국립박물관에서 열린 대향로 기획전에는 이를 잠시라도 몸소 보겠다며 몰려온 인파들이 매일 화제였답니다. 하늘을 움직일 정도로 아름다운 그 향로를 보고 눈시울을 붉힌 이들도 적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제 사람들의 정신세계의 반영이라 할 대향로의 삼라만상(森羅萬象) 속에 당당히, 또는 약간 코믹한 인상도 주면서 상체를 비스듬히 내놓고 있는 멧돼지를 발견하고 멧돼지 전문가인 필자는 매우 반가웠답니다.

5명의 악사를 비롯한 신선(神仙) 풍의 인물 18인과 65마리의 각종 동물들이 ‘살고 있는’ 대향로의 신산(神山)에서도 멧돼지가 축에 빠지지 않았다는 사실이 재미있었던 것이지요. 저와 함께 멧돼지를 ‘사랑하는’ 이들에게 아는 체를 하고 싶은 마음에 사진도 찍고, 자료를 구했답니다.

특별히 멧돼지의 존재가 이 대향로에서 어떤 뜻을 갖는 것인지는 아직 잘 알지 못합니다. 공부가 진행되는대로 보고를 드리지요.

다만 인간과 동물의 현대의 이런 불화를 어떻게 해소할 수 있을지를 아쉬워합니다. 이 글을 보실 분 중 상당수는 “철이 덜 든 사람이군, 멧돼지가 얼마나 인간에 해로운데 이런 순진한 소리를 하남!”하실 터이지요.

그런데 한 번 더 생각해 보십시다. 멧돼지도 못 사는 우리 산과 들의 생명력은 어느 수준일까요? 멧돼지의 존재마저 용납하지 못하는 포용력 없는 겨레가 ‘우리’인가요?

멧돼지는 또 우리 주위에 나타나 ‘맹수’로서의 자신의 존재를 주장할 터입니다. 또 불가피하게 인간은 총질을 할 것이고요. 애석해 하면서도, 멧돼지가 간혹 나타난다는 사실이 반갑기도 합니다. 아직 저 녀석이 인간과 함께 살고 있구나, 멸종되지는 않겠구나 하는 안도감이 드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구대 암각화도, 백제금동대향로도 우리 겨레 사람이면 한번쯤은 보아야할 문화유산입니다. 암각화는 울산시 울주군 언양읍(052-262-3001)에 연락해 미리 상황을 파악하고 가야 합니다. 물에 잠기거나 하여 볼 수 없는 시기가 있기 때문입니다. 대향로는 충남 부여의 국립부여박물관(041-833-8562)에서 볼 수 있지요.

덧붙이는 글 | 고인돌가게(www.goindolgage.com)의 웰빙식품 커뮤니티와 생명시대신문(www.lifereport.co.kr)에도 실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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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일보 등에서 일했던 언론인으로 생명문화를 공부하고, 대학 등에서 언론과 어문 관련 강의를 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얻은 생각을 여러 분들과 나누기 위해 신문 등에 글을 씁니다. (사)우리글진흥원 원장 직책을 맡고 있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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