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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류스타에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팬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한류스타에 열광하는 일본 아줌마팬들. 이제는 한국에서도 이런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 워싱턴포스트
서울에 사는 주부 A씨는 아침 일찍 일어나 남편과 자녀를 배웅하고 컴퓨터를 켠다. 좋아하는 배우의 팬사이트에 들어가 지난밤 올라온 새글을 읽고, 스케쥴을 확인한다. 포털 사이트에 뉴스 검색까지 한 뒤 친한 주부 팬들에게 문자를 보낸다. "오늘 OO에서 촬영이 있다더라, 가볼까?" 긍정적인 답변을 얻은 A씨는 정성스레 도시락을 싼다. 좋아하는 배우가 직접 싼 도시락을 먹는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두근거린다.

부산에 사는 회사원 B씨는 회사에 "시아버지 제사"라는 핑계를 대고 서울 가는 버스를 탔다. 오늘은 팬클럽에 가입한 가수의 공개녹화방송이 있는 날이다. 오후 3시 녹화 전에 또래 아줌마팬들을 만나 좋아하는 가수에게 선물할 건강식품을 샀다. 선물은 부끄러워 직접 주지 못하고 매니저나 어린 팬을 통해 전달한다. 야광봉과 풍선을 흔들며 좋아하는 가수가 공연을 하는 동안 이름을 외친다. 녹화가 끝나고 부산으로 돌아가는 길, 남편에게 전화를 건다.

"나 오늘 야근이야, 좀 늦을 것 같아."


좋아하는 가수의 노래 가사를 모두 외우고 공연장에서 풍선을 흔든다. 이는 더이상 10대만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제는 아줌마들이 팬클럽과 공연 문화의 중심에 우뚝 서고 있다.

연예인이 나이가 들면서 팬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오빠부대의 원조라 불리는 가수 조용필의 팬들도 이제는 어느덧 아줌마가 되었다. 요즘에는 이런 경우 외에도 처음부터 아줌마였던 그녀들이 '누나부대'를 결성하는 일이 빈번하다. 이제는 아줌마가 팬클럽과 공연 문화의 능동적인 주체로 등장하고 있다.

'팬질', 아줌마는 하지 말라는 법 있니?

현재 예매 중인 가수 비의 인터파크 티켓 예매 현황. 30~50대 여성 팬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예매 중인 가수 비의 인터파크 티켓 예매 현황. 30~50대 여성 팬 비율이 높음을 알 수 있다. ⓒ 인터파크
지난 11월 15일, 송승헌의 제대를 축하하기 위해 아시아 각국에서 900여명의 아줌마팬들이 강원도 화천의 승리부대로 모였다. 같은 달 29일 제주국제컨벤션센터에서 열린 '한류엑스포'에는 배용준이 나타난다는 말을 듣고 일본과 대만의 아줌마 팬들이 전세기까지 동원해 와 행사장을 가득 메운 일이 있었다.

그동안 아줌마팬들의 적극적인 활동은 일본, 대만 등에서나 있는 일처럼 여겨지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요즘에는 적극적으로 활동을 펼치는 국내 아줌마 팬 역시 적지 않다. 아줌마들은 팬클럽 활동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형성하면서 공연과 팬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고 있다.

예매가 진행중인 가수 비의 월드투어 콘서트 '인터파크 티켓'(ticket.interpark.com) 연령별 예매 현황을 보면 7일 현재 30대 비율이 43.5%로, 20대의 35.7%보다 높다. 40대도 14.9%나 돼 예매 평균 연령은 33.1세인 것으로 나타났다. 예매자의 72.1%가 여성인 것으로 볼 때 이른바 누나팬층의 지지가 두꺼운 것을 알 수 있다.

가수 조성모가 공익근무 중인 구리시청에는 매일 수십여 명의 팬이 찾아온다. 조성모가 찾아오는 팬을 배려하기 위해 시청 한구석에 마련한 공간에는 나이 많은 누나팬들 역시 함께 있다. 이들은 꿀에 절인 인삼, 마늘 장아찌 등에서부터 겨울이불, 아이크림까지 실용적인 선물을 한다. 10대 소녀팬처럼 열광하며 가까이 다가가는 일은 거의 없다. 멀리서 바라보고 수줍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런 실정이다보니 아줌마층에 인기가 많은 연예인은 30대 이상 여성을 대상으로 공연 마케팅을 펼치기도 한다. 가수 이승철의 경우 오는 22~24일 크리스마스 공연 홍보의 초점을 아줌마에 뒀다.

이승철 콘서트를 담당하고 있는 ENIS 엔터테인먼트의 이한나 대리는 "관객이 주로 30대 주부가 많다. 이번 콘서트에는 특별히 유아 놀이방을 만들어 엄마들이 편하게 공연을 볼 수 있도록 했다. 100여명이 유아놀이방을 이용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말했다.

반상회·학부모회 뛰어넘은 '팬클럽 아줌마 네트워크'

@BRI@아줌마들은 팬클럽을 통해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고, 끈끈한 네트워크를 조직한다. 과거 아줌마들의 행동 범위는 가족과 반상회, 학부모회를 뛰어넘기가 매우 어려웠다. 그러나 이제는 인터넷을 사용하는 아줌마들이 늘어나면서 커뮤니티 등을 통해 친밀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되었다.

가수 조성모를 보기 위해 구리시청을 찾은 아줌마팬 6명도 지난 2003년 한 인터넷 팬 커뮤니티에서 만났다.

"그 전에는 아줌마는 콘서트도 가면 안 되는 줄 알았다"는 이들은 "매일 전화나 문자도 하고, 꼭 (조성모씨를) 보러 가지 않더라도 한 달에 한두번은 시간 내서 만난다. 좋아하는 연예인 얘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자녀, 가족 이야기에서부터 마음 속 고민까지 털어놓는 제일 좋은 친구들이 되었다"며 지금의 관계에 무척 만족해했다.

" 팬클럽 사람들 만나기 전까지는 이웃집 사람 만나서 수다 떠는 게 전부였어요. 이제는 마음 맞는 팬클럽 친구들이랑 고민 이야기도 하고, 더 많은 여가생활을 즐겨요."

" 봉사활동 다니는 사람 많아요. 거의 결혼한 주부들로 이뤄져있죠. 좋아하는 연예인 이름으로 매번 성금 기부도 하고요. 좋은 일 많이 하게 됐어요."

"팬클럽 활동으로 가족 전체가 친해진 경우도 있어요. 가족이 공연을 함께 보고, 끝나고 전체 회식도 하고요."


팬클럽을 통한 만남이 이전과 달리 무엇을 가져다 주었냐는 질문에 이들은 "무엇보다도 스트레스도 풀고, 하고 싶은 걸 하는 점이 다르다. 옛날에는 이웃집 사람 만나서 수다 떠는 게 전부여서 굉장히 답답했다. 요즘에는 같은 공감대를 가진 사람들과 만나면서 생활이 무척 즐거워졌다"라며 환하게 웃는다.

팬카페에서 라디오 리퀘스트까지, 아줌마가 접수한다

한 아줌마팬이 '권사줌' 운영진에게 회원 등급을 올려달라고 요청하며 쓴 게시물
한 아줌마팬이 '권사줌' 운영진에게 회원 등급을 올려달라고 요청하며 쓴 게시물 ⓒ 권사줌
팬 활동은 아줌마를 인터넷의 적극적인 활용자로 만들었다. 아줌마팬은 이제 포털 사이트의 뉴스만을 클릭하는 소극적인 검색자에서 벗어나 좋아하는 연예인의 사이트에 글과 댓글을 올리고, 여러 사이트에 순위 투표, 라디오 음악신청, 시사회 신청 등에 참여하는 적극적인 참여자가 되었다.

배우 권상우에게는 '권사줌'(cafe.daum.net/awha2000)이란 팬 카페가 있다. '권상우를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이란 뜻이다. 이 카페는 '나이를 불문하고 결혼한 아줌마'를 대상으로 한다. 배우 배용준 역시 '배용준을 사랑하는 아줌마들의 모임'이란 뜻의 '배사아모'(http://www.baesaamo.com/)란 팬 사이트가 있다. 이 곳에서 아줌마팬들은 배용준의 활동을 모니터링하고, 생활을 공유한다.

일산에 거주하는 가수 조성모의 한 아줌마팬은 요즘 인터넷을 통해 순위 투표와 라디오 리퀘스트에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다.

"드라마 OST로 오랜만에 신곡이 나와 라디오에 신청곡으로 올리고 있다. 인터넷 위 투표에도 하루 몇번씩 참가한다"는 그녀는 "매일 팬사이트에 들어가 글과 댓글을 남기는 재미가 쏠쏠하다"고 말했다.

서울 금천구에 거주하는 배우 김재원의 팬 김아무개(35)씨는 "요즘 황진이를 통해 김재원씨를 볼 수 있어 행복하다"며 "방송국의 드라마 홈페이지와 공식홈페이지, 팬카페에 매일 들러 글을 읽고 적극적으로 글을 남긴다. 이전에 비해 인터넷을 많이 배우고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되었다"고 이야기 했다.

이들은 "문화를 주도하는 것이 이제는 더이상 10대가 아니다"라고 말한다. 영화나 공연의 적극적인 수용자로 등장한 30대 이상의 아줌마들은 인터넷 문화 역시 속속 접수하고 있다. 아줌마들은 외계어나 과격한 말을 사용하지 않고, 조용히 좋아하는 연예인에 대한 감정을 글을 통해 남기며 사이버 인간관계를 넓혀가는 특성을 보인다.

"아줌마 팬덤, 자기 삶 찾기 일부분"

아직까지 한국 문화는 아줌마팬에 대해 그리 긍정적인 시선을 보내지 못한다. '빠순이'가 연예인에 빠져있는 어린 팬들을 지칭했다면, '빠줌마'는 그러한 아줌마를 뜻하는 비속어로 쓰인다.

유명가수 A씨 팬으로 분당에 사는 한 아줌마(34)는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 한류스타를 쫓아다니는 것을 보면 눈살이 찌푸려질 때도 있다"며 "사실 주책없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생활의 활력소이기 때문에 팬 생활을 포기하기가 어렵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한편, 아줌마팬들은 대체로 기혼 여성의 팬 활동을 부정적으로만 볼 수 없다는 입장이다. 가수 B의 한 아줌마팬은 "예전에는 아줌마들이 가족중심의 문화를 즐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는 일상을 탈피해 즐길줄 알게 되었다"며 팬클럽과 공연은 어떻게 보면 유일한 독자적인 해방구"라고 긍정적인 견해를 밝혔다.

이러한 적극적 아줌마팬의 등장에 대해 이동연 문화사회연구소장은 가정주부들이 자기생활의 소중함을 인식하고 자기 삶과 문화를 찾는 현상의 일부분이라고 설명한다.

이 소장은 "아줌마팬 대부분이 7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 조용필에서 서태지에 이르기까지의 오빠부대의 원조격인 사람들로,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팬 활동을 한다"며 "급한 고도 경쟁 속에서 문화적 노스텔지어를 가진 세대가 경제적 능력이 생기면서 팬 활동을 통해 보상을 얻고, 자신을 찾기 위한 과정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고 말했다.

또한 그는 "과거 부정적인 계 문화와 다르게 자신의 감정에 따른 아줌마 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것이 긍정적이라고 본다"며 "앞으로도 아줌마들이 더 열심히 자기 삶을 찾기 위해 돌아다니고, 남성들도 함께 공연을 즐길 줄 아는 문화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밝혔다.

덧붙이는 글 | 정연경 기자는 <오마이뉴스> 인턴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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