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내일의 기억>
<내일의 기억> ⓒ 예담
이건 건망증이다. 동료나 친구들과 술자리를 하다보면 이런 건망증을 소재로 한참 이야기하기도 한다. 재미있게도 다른 사람에게도 이런 비슷한 경험이 한번쯤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인지 이런 우스운 경험을 이야기하면서도 별로 부끄럽지가 않다. 누구나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니까.

나이드신 어른들이 흔히 '돌아서면 잊어버린다' 라고 얘기하는 것 처럼, 자신에게도 이런 일이 종종 생길수 있다고 생각하고 말뿐이다. 건망증 때문에 짜증이 날때도 있지만, 세상살다보면 짜증날 일이 어디 한두가지인가?

하지만 알츠하이머 병은 건망증과는 전혀 다른 얘기다. 점심 식사를 예로 들자면, 건망증은 그냥 자신이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를 '잠시' 기억못할 뿐이다. 알츠하이머에 걸리면 자신이 점심을 먹었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린다.

그리고 병이 진행되어 갈수록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자주 다니던 길도 잊는가 하면, 간단한 계산도 못하고 쉬운 단어도 말하지 못하게 된다. 더 나아가면 주변사람들의 얼굴과 이름도 기억 못하고 자신이 누구인지 조차 망각하게 된다.

알츠하이머 병이 무서운 점은 이런 식으로 개인의 정체성을 앗아간다는 점이다. 기억을 못하고 주변 사람들을 인식 못하고 결국에는 사고력 자체가 없어져가고 폭력을 휘두르기도 한다. 글자 그대로 나이를 역행하는 것과 같은 현상이 생긴다. 나이를 먹고도 젊어보이는 친구에게 종종 "너는 나이를 거꾸로 먹냐?"라고 농담을 한다. 하지만 알츠하이머에 걸려서 정말로 나이를 거꾸로 먹는 사람에게 이런 농담은 농담이 아니다.

그래서인지 알츠하이머에 걸린 사람들은 자신의 병을 주위에 알리지 못한다. 알츠하이머에 걸렸다고 하면 일단 그 사람을 바라보는 시각자체가 달라진다. "나 알츠하이머야"라는 말은, "나 폐렴이야"라는 말과는 차원이 다른다. 둘 다 죽음에 이를수있는 병이지만, 알츠하이머는 죽음 이전에 개인의 존재의식을 들어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서서히 죽음을 맞는다. 뇌의 기억도 문제이지만, 몸도 기억을 잃어간다. 자신이 살아온 방식을, 그리고 앞으로 살아갈 방법을 몸이 기억하지 못한다면 죽음까지도 시간문제 아닐까?

오기와라 히로시의 소설 <내일의 기억>은 이런 알츠하이머에 걸린 남자를 주인공으로 한다. 이제 갓 50이 된 주인공 '사에키'는 광고회사의 부장으로 재직중이다. 사에키의 증상도 처음에는 종종있는 건망증처럼 보인다. 과로 때문이겠지 생각하고 방치해두지만 증상은 점점 심해져간다.

그러던 어느날 병원을 찾은 그에게 의사가 알츠하이머 초기라는 진단을 내린다. 사에키에게는 부인도 있고 곧 결혼 할 딸도 있다. 가정을 꾸릴 딸과 사위에게 자신이 알츠하이머에 걸린 모습을 보여야 하나? 사에키는 의사의 진단을 반신반의하면서 이 병과 싸우기 시작한다.

작가인 오기와라 히로시는 56년 생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주인공과 같은 나이인 셈이다. 작가도 알츠하이머와 비슷한 경험이 있는지 모르겠다. 다만 작가는 '자신의 머릿속을 헤집는 심정으로 저술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알츠하이머에 걸린 중년 남성의 일상을 리얼하게 보여주고 있다. 주인공이 겪는 좌절과 분노, 슬픔 그리고 체념까지도. 이 작품은 일본에서 발간되어 베스트 셀러에 올랐고 영화로도 제작되어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고 한다.

<내일의 기억>을 읽는 동안, 역시 알츠하이머를 소재로 한 일본의 사회추리소설 <사라진 이틀>이 떠올랐다. <사라진 이틀>의 주인공 '소이치로'는 알츠하이머에 걸린 아내를 목졸라 죽인다. 아내는 소이치로에게 제발 자신을 죽여달라고 애원한다. 아내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을 잊을까봐 두려워한다. 자신이 아들의 엄마라는 사실조차 기억하지 못하게 될까봐 두려워한다. 그리고 소이치로에게 애원한다. 자신이 인간일 때 죽고 싶다고, 자신이 주위사람들을 잊기전에 죽고 싶다고. 알츠하이머는 정말 잔인한 병이다.

흔히 제 정신이 아닌 사람에게 '정신을 놓아 버렸다'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거꾸로 말하자면 멀쩡한 사람들은 자기의 정신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셈이다. 자기의 정신이 어딘가로 날아가 버리지 못하도록. 주인공 사에키를 담당하는 의사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그건 사에키 씨 책임은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책임의 여하를 떠나서 이런 일이 자신에게 닥치면 누구나 억울하고 분한 마음이 들지 모른다. 그리고 조금씩 조금씩 정신을 놓아버리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는 것, 그런 자신을 남들앞에 보여야 한다는 사실도 고통일 것이다. 주인공 사에키는 말한다.

"기억이 사라져도 나의 지난날들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내가 잃은 기억은 나와 같은 나날을 보낸 사람들 속에 남아 있다."

사에키 입장에서는 이렇게 생각하는 것이 마음 편하겠지만,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기쁨을 나누면 커지는 것 처럼, 지난날의 추억도 함께 회상하면 더욱 아름다워 질테니까. 함께 회상할 상대가 없어지고 나면, 소중한 추억도 조금씩 잊혀져 갈지 모른다. 증오 앞에서 사랑의 감정이 사라져 버리는 것 처럼. 자신에게 닥친 재앙과 속절없이 싸워가는 주인공의 이야기, <내일의 기억>은 감동적이지만 슬프다.

덧붙이는 글 |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 신유희 옮김. 예담 펴냄.


내일의 기억

오기와라 히로시 지음, 신유희 옮김, 예담(2006)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