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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예술단 뮤지컬 '이' 11월 10일부터 12월 3일까지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에서 공연되고 있다
ⓒ 서울예술단

올해 초 영화계 아니 사회 전체가 <왕의 남자> 증후군에 빠져들었다. 이 영화를 보기 위해 극장을 찾은 사람만 1천만을 훌쩍 넘겼다. 요사이 이런 소위 대박 영화가 한 해 두어 편씩 나오는 바람에 관객 1천만도 조금 싱거워진 느낌도 없지 않지만, 인구 4명 중 한 사람이 봤다는 것은 체감지수를 여부와 상관없이 대 기록임에 분명하다.

서울예술단(이사장 정재왈)이 올해 <바람의 나라>에 이어 <왕의 남자> 원작인 연극 대본을 기반으로 뮤지컬 <이(爾)>를 야심차게 무대에 올렸다. 본래 연출을 맡기로 한 장유정이 작사가로 임무를 바꾸고, 원작자인 김태웅이 직접 연출자로 나선 것도 눈길을 끌었다. 뮤지컬 ‘이’는 <왕의 남자> 프리미엄을 등에 없고 10일 대학로 아르코예술극장 대극장에서 막을 올렸고, 다음달 3일까지 공연이 이어질 예정이다.

뮤지컬 <이>에 대해서 공연계 주변에서는 반신반의의 기대와 우려가 존재했었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벗긴 <이>는 기대보다는 우려를 확인하게 했다. 아니 어쩌면 <이>에 대해서 너무 지나친 건 기대는 제작자에게 너무 큰 부담과 의욕을 자극했을 수도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왕의 남자>에 기대려는 단순한 계산이 무리였을 수도 있다.

연극계의 한 원로 배우는 “무엇보다 원작자를 연출로 기용한 것이 무리가 아니었나”고 하면서 “연극과 뮤지컬을 한 작품에 모두 담으려다 보니 의욕과 달리 어느 쪽도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아쉬워했다. 연극으로 처음 만들어져 뮤지컬화하는 과정에서 연극의 살을 뺐어야 한다는 뜻이다.

또한 공길 역 최성원의 홈페이지에 관람평을 쓴 소요라는 닉네임의 한 팬은 “원작자로서 위험할 수도 있는 도전을 한데는 박수를 보내지만, 때론 애정이 독이 되는 법. 개인적으로 연출은 다른 뮤지컬 전문가에게 맡겼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라고 연출의 문제를 꼬집었다. 그리고 그에 달린 댓글들도 하나같이 공감하고 있었다.

▲ 주역들과 달리 주로 서울예술단 단원들로 구성된 광대패. 이들의 활기찬 모습이 양념역할을 톡톡히 했다.
ⓒ 김기

뮤지컬이라는 이름이 무색할 정도로 대사량이 일반 연극에 비할 만큼 많았는데 발음이나 발성의 문제로 객석까지 전달되지 않아 답답함을 주었는다. 이는 배우들의 잘못이 아니라 애초에 뮤지컬 배우들에게 대사량을 과도하게 배정한 구조의 문제이다. 뮤지컬은 대사보다는 춤과 노래로 이미지와 판타지를 완성하는데 우선 목적을 둔다.

그 기본을 성실히 지켰다면 잘나가는 배우들이 다른 때와 달리 초라해지는 결과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김법래, 최성원, 박민정 등 외부 출연자들은 그들이 뮤지컬 가수로 인정받는 자질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대사에 지친 탓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표현이 느슨해지고, 무대 위에서의 존재감은 미약해졌다.

가장 중요한 문제는 음악이고 성패를 떠나 장르적 특성을 인식하는데 가장 큰 요소다. 그러나 <이>는 음악에 대한 투자가 너무 인색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남는다. 라이브 연주를 하지 않는 것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신디싸이저에 의존한 단조로운 반주는 금새 귀를 지루하게 만들었고, 목청껏 노래하는 배우들이 애처롭게 보였다. 또한 음악의 성향이 한국적이었다가 금새 서양적인 것으로 바뀌는 등 통일감을 갖지 못해 혼란을 가중시켰다.

아크로바틱을 연기하는 배우들을 빼고는 대부분 예술단 단원으로 구성된 군무(광대)들은 그나마 볼거리와 흥미를 주기는 했으나, 그들이 보여주는 상황들이 평면적이고 반복적이어서 후반에 가서는 긴장감을 주지 못했다. 좋은 것이라도 아낄 줄 알아야 진가는 더욱 빛나게 마련이다.

▲ 극 초반 장생과 공길이 보이는 봉사놀이 장면. 재미있기는 하나 대사는 위험수위에 도달해 있다. “이리와 너 좀 만지게, 너 좀 맛보게”란 대사는 작가적 허용을 넘어서는 정제되지 않은 과격함이 아닐까?
ⓒ 서울예술단

또 하나 뮤지컬 <이>가 크게 범한 불찰은 통속의 경계조차 넘어버린 정제되지 못한 대사의 경박성이다. 아무리 폭군이었다고 해도 <이>의 주요 모티브가 되는 죽은 어미에 대한 연산의 한을 감안한다면, 아니 그가 적어도 왕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그가 장녹수에게 하는 ‘쌍X’’아 하는 욕설은 참아야 했다.

그 밖에도 장녹수가 공길에게 ‘야 새끼야’ 등의 시정잡배나 다름없는 말을 하진 않게 했어야 했고, 우인(광대)들‘이 합창하듯 한 ‘니기X 뽕’이니 하는 천박한 대사들로 웃기려 하진 말아야 했다. 또한 공공법인인 서울예술단이 재정적 위기를 1막 초반의 연산군 침실장면처럼 절제 없는 성적 표현으로 돌파하려 하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일본극단 시키의 라이온 킹 직접 상륙으로 그 동안 앞다퉈 수입뮤지컬이나 라이센스를 들여오던 뮤지컬계가 바싹 긴장하고 있다. 만시지탄이지만 나름 자성의 목소리도 나왔다. 올 한해만 해도 시장규모가 1천억대로 신장되었다는 뮤지컬시장에서 기왕이면 국내극단들이 돈버는 것이 나쁠 것은 없다. 그런 속에서 서울예술단이 뮤지컬 전문단체로 변화를 꾀한 것은 의미있는 결심이었다.

서울예술단은 내년부터는 방송발전기금의 지원도 끊길 상황에 몰려 재정자립의 압박을 받고 있다. 때문에 신임 정재왈 이사장이 뮤지컬 전문단체로의 변신을 결정한 것은 하나 나무랄 일이 아니다. 그러나 고민과 준비는 그것을 뒷받침할 정도로 충분하지 못한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많다.

혁신의 시대에 변화는 선택이 아니라 필연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단지 변화만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변화는 순항보다 변수가 많기 때문에 신중하고 철저한 준비를 통해서 결과를 담보할 수 있다. 조만간 20주년을 맞는 서울예술단이 그 동안 호평과 혹평 속에서도 가져온 정체성과 장르적 노하우도 존재한다. 그것의 활용부터 생각하고, 그 위에 변화의 고명을 얹는 듯한 여유로운 숨 고르기가 필요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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