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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놀이] 춤판이 열리기 전에 춤패들과 악사들이 마을을 돌며 이를 알리며 관객들을 불러들인다
ⓒ 정학윤

▲ [고사] 길놀이가 끝난 후, 춤판이 열림을 천지신명께 고하며 판을 지켜달라는 기원을 하게 된다
ⓒ 정학윤
대구 계명대학교 소속 동아리 민속문화연구반은 지난 18일 남구 대명동 소재 영남불교대학에서 학생들이 아닌 연로하신 어르신들을 모시고 제50회 정기공연을 했다. 그들은 봄과 가을에 연 2회 정기공연을 하는데 정기공연 50회라는 누적 회차가 말해주듯이 1977년에 설립되어 오랜 역사를 가진 동아리였다.

그들은 경남 고성을 중심으로 내려오던 '고성오광대'와 황해도 해주의 '봉산탈춤', 대구 비산동의 '날뫼북춤' 등을 방학 때를 이용해서 전수를 받고 그 기능들을 보유하고 있다.

▲ [고성오광대 첫째마당 문둥이과장] 소고를 들고 등장하여 대사없이 춤을 춘다
ⓒ 정학윤
기자는 탈패로서 대학시절을 보냈다. 그들의 정기공연 소식을 접했을 때 꼭 가봐야겠다는 마음이 든 것은 반독재가 풍미하던 시절 70~80년대의 탈춤판이 떠올랐기 때문이고, 지금은 "그 판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으며, 어떻게 변했을까"하는 관심 때문이었다.

70~80년대 시절의 대학문화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탈춤을 빼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소비지향적인 대학문화를 경계하고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는 생산적인 문화활동으로써 대학생들의 우리 것에 대한 관심은 소멸해가는 탈춤 농악 등에 이르게 되었다.

당시는 군사정권의 폭압으로 인해 합법적인 언로가 봉쇄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때의 대학가 탈춤판은 군사정권의 폐해 등을 알리는 언로구실을 하였다. 탈춤에 함의되어 있는 '피지배층의 지배층에 대한 저항문화' 상징성이 노골적으로 드러나는 자리였던 것이다. 춤판의 끝인 뒤풀이는 반독재 시위로 이어진 예가 많았다. 따라서 당시의 탈춤동아리는 시위를 지원하는 불온동아리로 취급받았었다.

탈의 어원은 무언가 '탈이 났다'에서 유래된 것이라 한다. 탈이 난 것을 탈이라는 바가지를 쓰고 고치겠다는 뜻이 담겨 있다. 탈놀이 후 탈을 소각하는 것은 탈이 난 것에 대한 해원해소를 기원하는 주술적 의미인 것이다. 7~80년대의 대학생들에게 불합리한 사회구조와 군사독재의 폭압이 바로 이 사회의 탈이었고, 이를 고치고자 하는 의지를 탈춤판에서 담아내었던 것이었다.

지금의 탈춤판은 어떤 모습이며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그들이 가진 문제의식이나 그들이 바라본 지금 이 사회의 '탈'은 무엇일까?

탈춤판은 ▲풍물을 치고 마을을 돌면서 놀이를 알리는 <길놀이> ▲ 천지신명께 놀이를 알리는 <고사> ▲ 본격적인 <춤판> ▲ 연희자와 관객이 함께 어우러져 노는 <뒤풀이>로 이어진다.

▲ [둘째마당 오광대 과장] 마부인 말뚝이를 통해서 양반들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한다. 젓광대(사진 왼쪽부터) - 백제양반, 홍백양반, 흑제양반. 원양반 : "이 때가 어느 때냐, 춘삼월 호시절이라 석양은 재를 넘고 까마귀 슬피 울제 한 곳을 점점 내려가 마하에 내리서니 영양공주, 난 양공주, 진채봉, 계섬월, 백능파, 심호연, 적제홍, 가춘홍 모도 모도 모여서서…."
ⓒ 정학윤

▲ [젓광대 - 적양반, 청양반, 도령] 원양반 : "말 잡아 장구 메고 소 잡아 북 메고 안성마치 갱쇠 치고 운봉내기 징 치고 술 걸이고 떡치고 홍문연 높은 잔치 항장의 칼춤 칠제 이내 마음 한가하야 석상에 비껴 앉아 고금사를 곰곰 생각하는데 어데서 응막 꽹꽹하는 소리에 양반이 잠을이루지 못하야 나온짐에 말뚝이나 한분 불러볼까? 야~ 이놈 말뚝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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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양반과 말뚝이] 말뚝이 : "예~ 동정은 광활하고 천봉만악(千峰萬嶽)은 그림을 그려있고 수상부용은 지당에 범범한데 양유 천만사 화류춘광 자랑하니 별유천지 비인간이라 어데서 말뚝이를 부르는지 나는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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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셋째마당 비비과장] 비비와 양반. 비비는 상상의 동물로 영노라고도 한다. 못된 양반을 혼내주기 위해서 등장한다. 양반 - "야~ 이놈아 네가 뭣고?" 비비 - "뭐든 잘 잡아묵는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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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넷째마당 중춤과장] 중과 소무. 중은 예쁜 각시들을 유혹하여 어울려 희롱하다가 퇴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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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한바탕 길놀이가 끝나고 고사를 하게 되었다. 기자가 학교에 다니던 시절의 고사문들은 당시의 대학생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식과 시대정신들을 담고 있었는데 대개 이러했다. (이런 문구들을 나열하는 것이 금기시 되던 시절이었다)

"유세차 모년 모월 모일 모시에 삼가 우리의 탈춤 판을 알리오며… 고문 받아 죽은 귀신, 민주를 갈망하다 억울하게 죽은 귀신, 농약 먹고 죽은 농민귀신, 저임금에 시달리다 죽은 노동자 귀신… 모두 모두 나오시어 이 판을 굽어 살피옵소서. 상향."

설레는 마음으로 귀를 세웠으나 결국은 세태의 변화를 느끼게 된 현재 그들의 고사문은 대충 이러했다.

"유세차 우리의 탈춤판을 알리오며… 00의 군생활이 잘되기를, 00의 연애가 잘되기를, 00이 결혼하기를… 상향"

참석대상을 염두에 둔 고사문이라는 것을 감안할지라도 기자로서는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 시절의 고사문은 춤판의 성격과 춤패의 온전한 정체성을 담아내는 것이었다. 신변잡기류의 고사문이라? 물론 기자가 학교를 다니던 때와 지금은 많은 차이가 있다. 따라서 당시의 시대상황에 따른 춤판의 시작과 지금의 춤판은 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지만 솔직히 뭔가 허전한 마음이 들었다.

덧배기 장단이며, 굿거리 장단이며, 옛 그대로 질펀한 대사들이어서 반가운 마음이었지만 공연 내내 서운했다.

▲ 작은어미와 영감, 마당쇠. 영감 - "여보게 때는 좋아 춘삼월 호시절이라 강남 제비는 돌아오고 만천 풀잎이 피는 이때 여기서 좀 노다가 가세." 작은어미 - "그렇게 하이소." 영감 - "마당쇠야! 야 이놈 마당쇠야! 마당쇠 - 예에. 영감 - 야~ 이놈 불러도 대답도 없이 뭐했노? 이놈." 마당쇠 - "똥누다가 왔심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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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섯째마당 제밀주(작은어미)과장] 큰어미. 처첩 갈등과 죽음에는 빈부귀천이 없다는 인생무상을 풍자한 마당. 할미 - "영감! 영감! 아이구 우리 영감 오데 갔을꼬. 우리 영감 못 봤소?"
ⓒ 정학윤
고사문만 듣고 그들의 놀이판 전체를 가늠해 본다는 것은 무리일지도 모른다. 그들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함부로 판단하는 것은 그야말로 비약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춤판을 통해서 드러내고자 했던 것은 시대의 요청에 따른 호기였을 뿐 반드시 교범이 아닐 것이다는 그런 생각들.

지금의 대학문화에서 이 사회의 '탈'난 곳을 지적하는 기능은 없어진 것일까? '탈'난 곳의 해원해소를 바라는 젊은 패기와 치열함은 더 이상 그들의 문화에서는 담보되지 않는 것일까? 기자의 경험상 그 한축을 담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던 탈판의 이런 변화는 너무나 생소하였다. 그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들이 우리의 것을 지키고 면면히 이어오고 있는 것에만 만족하고 돌아오기엔 너무나 섭섭했던, 이제는 구세대가 된 기자의 공연관람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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