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최근 볼만한 TV 드라마 하나가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세상을 ‘얼치기’ 진심 하나로 버텨내보겠다는 한 조선 여성의 인생 역정에 공감대를 형성하며 아낌없는 애정을 보내고 있다. 아무렴 겉모습의 화려함만큼이나 가슴 속 한을 깊이 지닌 옛날 기녀들의 일상을 조명하는 시선이 상투성을 벗어난다. 물론 드라마 <황진이> 이야기이다.

▲ KBS 수목드라마 '황진이'.
ⓒ KBS
언젠가 박노자는 <주몽>, <연개소문>, <대조영> 등의 이른바 ‘북방 사극’에 숨어 있는 ‘페니스 파시즘’을 날카롭게 드러낸 적이 있다. 버거운 현실의 무게에 짓눌려 있는 많은 국민들이 ‘남성적이며 군사적인 우파 민족주의 경향’의 드라마에 현혹당하고 있다는 내용의 칼럼이었다. 새겨들을 만한 말씀이라 읽으며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어도, 다소 과도한 강퍅함은 아닌지 못내 아쉬움이나 씁쓸함은 감출 수 없었다.

하지만 드라마 <황진이>를 마주 하면서 조금은 그런 부담감이 줄어드는 것 같아 한결 마음 편하게 TV를 시청할 수 있었다. 그렇다고 무수한 역사 활극보다 드라마의 내용 전개가 부족하다는 말은 아니다. 아니 오히려 보면 볼수록 <황진이>의 마력에서 결코 벗어날 도리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과연 그게 뭐길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누구나 알지만 아무도 모르는

먼저 주인공 ‘황진이’는 우리가 익히 들어 알던 이가 아니다. 원작자인 김탁환의 말처럼 ‘누구나 황진이를 알지만 아무도 황진이를 모른다’. 많은 이들이 황진이가 십년 수련의 큰 스님을 파계시킨 천하절색의 기녀라는 것쯤은 알지만, 그의 내면적인 생각과 미적 감수성을 미루어 짐작하지 못한다.

이웃집 도령이 자신을 사모하다 죽자 그 길로 기녀의 길에 들어섰다는 구전(口傳) 이면에, 조선시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끝내 진실한 사랑이 위선에 묻히고 만 가슴 시린 한을 드라마는 상상한다. 그 절절하고 사무치는 한은 양반과 관료에 대한 거침없는 방자함으로, 또한 재예에 대한 끊임없는 결기로 전이된다.

▲ 황진의 진실한 사랑은 세상을 보는 원동력이 된다.
ⓒ KBS
특히 명나라 외교 사신에 들이미는 진언이나 벽계수 대감의 하룻밤을 사겠다는 호기는 드라마적 재미를 넘어 강대국의 오만과 남성 중심의 밤 문화를 풍자하고 전복하는 명장면을 연출한다.

이쯤하면 보는 이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 돈과 섹스로 남녀관계를 흥정하는 야합(혹은 결혼)은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지만, 사람들은 진실한 사랑의 힘이 여전히 유효하며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겠다.

<황진이>는 기녀와 교방에 대한 고정관념도 살짝 흔들어 놓는다. 전두와 권세를 바라며 옷고름을 푼다는 기녀들이 서로 투기만 하는 건 아니다. 한편으로 천출의 신분벽을 넘지 못하는 자신들의 한을 예술에 대한 열정으로 승화시키기도 한다. 송도 교방 행수인 백무와 여악 행수 매향은 불꽃 튀는 암투 속에서도 서로의 예술혼을 감히 의심하지 않는다. 작가는 그들이 기녀가 아닌 예인으로서 가진 예술적 심미안을 결코 놓칠 생각이 없다.

▲ 백무와 매향은 불꽃 튀는 대결 속에서 서로의 예술혼을 의심하지 않는다.
ⓒ KBS

▲ 기녀들의 수련 속에서 예인의 도리를 본다.
ⓒ KBS

눈과 귀를 사로잡는 소품들

물론 드라마 외적인 측면에서도 <황진이>는 시청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화려하게 등장하는 한복의 아련한 형형색색은 눈만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전통 옷의 숨겨진 가능성까지 점치게 한다. 거기다가 기녀머리의 모양새와 여러 장신구들도 보는 이의 눈썰미를 자극한다.

▲ 교방 사람들의 화려한 복색과 장신구들은 쏠쏠한 볼거리를 준다.
ⓒ KBS
또한 시각적인 것 못지않게 배경 음악 또한 귀를 쫑긋하게 한다. 백지영의 ‘나쁜 사람’을 포함해 모두가 놓칠 수 없는 노래와 음악이지만, 그 중에서도 ‘그대 보세요’(노래 최혜진)는 한 편의 시를 담아내듯 심금을 울린다. 절절한 사랑에 신음하는 황진이의 마음을 가장 유려하게 전달하는 연시에 다름 아니다.


그리움 꽃잎에 수 놓으니 보세요
어느 고운 봄날 흩날리거든, 그대 못 잊어 헤매어 도는 내 맘인 줄 아세요
눈물로 하늘에 시를 쓰니 보세요
어느 푸른 여름 비 내리거든, 그대 그리워 목 놓아 우는 내 맘인 줄 아세요
내 사랑 잎새에 물들이니 보세요
어느 마른 가을 단풍 들거든, 그대 생각에 붉게 멍들은 내 맘인 줄 아세요
바람결에 안부 전해두니 보세요
어느 시린 겨울 눈 내리거든, 어디에선가 잘 있노라는 인사인 줄 아세요


한편 ‘전두’, ‘물색없다’, ‘음전하다’ 등의 옛말을 알아가는 쏠쏠한 재미도 많다. 내친 김에 4년 전에 나왔다는 원작 김탁환의 <나, 황진이>을 사 들었지만, 그의 독특한 글쓰기와 상당한 어휘력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손놀림은 만만하지 않다. 드라마가 종영하고 나서 조금씩 음미하며 읽어야 할 것만 같다.

<대장금>에 이어 조선 여성의 눈을 통해 세상을 보는 <황진이>는 실로 오랜만이다. 이 사극의 독특한 매력이 어떤 또다른 내용과 형식으로 시청자와 지속적으로 만날 것인지 주목하고 싶은 건 필자만의 생각이 아닐 것이다. 또한 여기저기 글과 말로써 자신의 소감을 풀어내고 싶은 것도.

태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