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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앞표지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앞표지 ⓒ 푸른길
당신의 막내딸에게는 한 가지 흠이 있거든요. 그래요. 그녀는 백인이거든요. 저희는 모잠비크에서 잡혀 온 노예의 후손이랍니다. 저희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저희끼리 결혼을 하지요. 브라질에는 혼혈이 많다는 평판이 나 있지만 저희는 그렇지 않은 소수의 사람들이랍니다... 죄송하지만, 댁의 따님의 '다우리(dowry)'가 어떻게 되는지요? 지참금 말이에요"

“하지만, 그, 그럼 당신들은 인종차별주의자입니까?... 제 딸은 지참금 따윈 없어요. 보잘 것 없는 백인이니까요”


흑인 부부는 지나치리만큼 당당하고 뻔뻔하고, 주인공 부부는 최대한 당당한 자세로 뒤돌아서 나오는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것들과는 다른 의외의 대화가 이어진다. 그래서 유쾌하고 재미있다. 아메리카대륙의 원주민 수난 역사를 거슬러 생각하게 하는, 이처럼 모나지 않는 ‘뼈’가 소설 전반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 있어서 삶의 진지함과 무게도 느껴지는데...,

어쨌든 끼 많은 막내딸의 연애사건은 일단락되지만 이번에는 격정적인 시어머니의 사랑이 그녀를 당황하게 한다. 실버타운에서 노년의 자유를 만끽하던 75세인 시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실종, 결혼식이 가장 신속한 라스배가스로 도망가 급한 결혼식을 올리고 나타나 가족들은 신혼부부 환영식에 바쁘다. 그렇지만 이들 앞에 느닷없이 나타나는 사랑의 장애물

한숨 돌릴 여가도 없이 이번에는 7세 손자가 담임선생님과 결혼하겠다며 용돈벌이에 혈안이다. 보통의 아이들이 한때 설핏 느끼는 애정치고는 지나치다. 사사건건 선생님을 간섭, 숫제 ‘나의 약혼녀’라고 부르는가 하면 결국은 선생님 남자친구에게까지 결투를 신청하고..., 어린 꼬마는 사랑을 어떻게 마무리할까?

바닷가에 널려 있는 조개껍질만큼 모든 나이마다 구구절절한 사랑들. 그녀는 탈도 많고 말도 많은 이런 저런 사랑의 온갖 바람 속에서 오뚝이처럼 꿋꿋하다. 그리고 오늘도 남편에게 묻는다.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아무 이야기나 해달라고 할 때는 언제고 실컷 이야기 하고 있는데 어느 새 신문에 코 박고 있는 남편은 신문에서 눈도 떼지 않은 채 "응, 응" 중얼거리다가 "내가 조금 전에 말한 것들 어디 다시 한 번 말해보라는 그녀의 다그침에 무안해져 적당히 얼버무리고 만다.

사랑에는 달콤한 꿀과 씁쓸한 담즙이 섞여 있다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 당신이 구두약 사는 것을 깜박했다는 핑계로 비싼 화장크림으로 자기 구두를 반짝반짝 닦을 때도 그냥 꾹 참는다. 당신의 장바구니를 뒤지며 '속옷 가게 차릴 거야?'라고 비아냥거려도 대꾸하지 않는다... 10장 '당신의 화를 돋우는 남자의 단점들 중에서

‘골수남성우월주의주의자’인 남편은 자존심이 어찌나 센지, 38년 동안 함께 살면서 단 한 번도 자신이 틀렸다고 인정한 적이 없고 엉뚱한 짓도 시시때때로 벌인다. 그러고서도 난처해지면 적당히 모면하고 그녀의 화를 돋워놓고 도망치기 일쑤. 게다가 어찌나 무뚝뚝한지 결혼 이후 단 한 번도 그녀를 예쁘다고 말한 적이 없다.

따지고 들면 단점이 훨씬 많은 남자.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사랑스러운 남자. 그래서 그녀가 배운 것은 양보. 그녀는 아예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란 조항들을 이처럼 단단하게 정해두고 그저 눈 질끈 감고 양보한다. 사랑 때문에.

중년 부인의 수다로 피어나는 사랑이야기는, 유통 기간은 짧지만 순도만큼은 높은 막내딸의 사랑, 일곱 살 꼬마의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열정, 시어머니의 격정적인 사랑. 첫 결혼의 쓰라림을 안고 새로운 사랑을 찾은 큰딸의 용기, 38년 동안 남편에게 ‘사랑해’라는 말 한 번 듣지 못했지만 여전히 뜨거운 당신의 사랑, 그리고 주변 사람들의 수많은 또 다른 사랑들...,

프랑스의 김수현 '니콜 드뷔롱'?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는 프랑스에서만 50만부가 팔렸다고. 작가는 프랑스 주부들을 사로 잡았던 드라마 작가이자 '에로티시모' 등을 만든 감독. 인기의 비결은 '우리 누구나 실제로 겪을 수 있는 상황을 재미있고 긍정적으로 묘사, 재미는 물론 삶의 진지함과 재치를 함께 전하고 있기 때문이란 생각이 든다.

옮긴이는 작가의 시골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현재 살고 있는데, '수다의 인연'으로 이 책을 번역하게 되었다고. 이런 내력을 짧게 전하고 있는 역자후기가 무척 가슴에 와 닿았다.

"나는 깔깔거리며 읽은 책인데, 드뷔롱은 3년간 이런저런 수술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으며 많이 고생한 눈치였다. 사랑하는 남편을 강도에 잃은 슬픔을 딛고, 마취 후유증과 치료약의 영향으로 가물가물해진 기억력을 두꺼운 사전을 무기로 밝은 글을 쓰는 작가에게 많은 감동을 받았다."-역자 후기 중

역자가 재미있게 읽은 <의사 선생님,육 개월 전에 만나뵐 수 있을 까요?>는 나중에 알고 보니 작가가 계단에서 굴러 떨어진 실제 이야기. 그녀의 남편은 센강의 유람선 바토무슈의 창시자. 역자 후기를 읽고 소설의 맛이 더 맛깔스러웠다고 할까? / 김현자
작가는 이 많은 사랑사건들, 즉 사랑의 달콤함을 선택함으로써 일어나는 문제점을 즐겁게 다루고 있다. 그래서 진지하고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는 이들의 사랑은 상처보다는 웃음으로 일단락. 삶에서 가장 가치 있고 소중한 사랑을 웃음으로 끝낸다고 삶의 무게까지 가벼워지지 않는, 오히려 사랑의 가치가 더욱 빛나고 커 보인다고 할까?

작가는 사랑의 환상과 영원성 대신 자존심 때문에 쉽게 드러내지 못하고 속으로만 부글거리는 질투, 쩨쩨하지만 결국 말해야 하는 중요한 돈 문제, 결혼과 함께 억지로 받아 들여야 하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남편의 친구들, 겨우 치렀는가 하면 어느 새 다시 돌아오는 집안의 잔치 등, 사랑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을 재미있고 재치 있는 수다로 들려주기 때문이다.

다양한 모습의 수많은 사랑도, 사랑을 둘러싸고 만나는 사람들도 낯익다. 다양한 사랑으로 울고 웃고, 지지고 볶고 싶은 사람들은 한번 유쾌하게 빠져볼만한 생기발랄한 소설이다.

프랑스 주부들은 사랑과 결혼에 대해 어떤 생각을 할까? 프랑스 신세대들은 사랑과 성을 어떻게 시작할까? 작가 니콜 드뷔롱을 '프랑스의 김수현'이라고 한다는데..., 우리들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일상의 사랑을 재미있게 묘사. 유쾌한 시트콤을 보는 듯 했다고 할까? 김수현(드라마 작가)식 멜로드라마를 눈물콧물 짜면서 가슴 찡하게 보았다고 할까?

사랑하기 때문에 감당해야 하는 것들... 누가 말했던가. ‘사랑에는 달콤한 꿀과 씁쓸한 담즙이 섞여 있다’고.

덧붙이는 글 |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니콜 드뷔롱 지음/박경혜옮김/푸른길 출판사 2006.10/1만원

※니콜 드뷔롱의 또 다른 저서는 <꿈같은 열흘간>,<내 안경이 어디 있지?>, <이 남자 아이가 누구야?>, <당신, 무슨 생각 해요?>,<의사 선생님, 육 개월 전에 만나 뵐 수 있을까요?>


당신, 내 말 듣고 있어요?

니콜 드뷔롱 지음, 박경혜 옮김, 푸른길(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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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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