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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문화상품들.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 박소희 작가의 만화 '궁', 김영현 작가의 드라마 '대장금', 유진희 감독의 애니메이션 '호박전'.
여성이 만들어낸 대표적인 문화상품들.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이정향 감독의 영화 '집으로', 박소희 작가의 만화 '궁', 김영현 작가의 드라마 '대장금', 유진희 감독의 애니메이션 '호박전'. ⓒ 여성신문
[박윤수 기자] 최근 1300만 관객을 동원한 영화 '괴물'은 110억 원의 제작비로 900억 원에 이르는 매출을 올렸다. "'괴물'의 흥행효과는 NF쏘나타 2846대 판매에 맞먹으며 이 영화가 만들어낸 취업유발 효과도 총 2100명에 이른다"는 한국은행의 분석처럼 이미 제조업의 시장가치를 뛰어넘은 문화산업이 고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유망 산업으로 주목받고 있다.

문화관광부에 따르면 2004년 말 기준 우리나라 문화산업(영화, 방송, 음악, 게임, 애니메이션, 캐릭터, 광고)의 시장 규모는 50조 원. 2004∼2005년 사이 영화산업은 18%, 게임산업은 13%의 성장률을 보였다. 이는 한국 평균 경제성장률(5%)이나 자동차(3%), 철강(4%), 섬유(4%) 등 타 분야와 비교할 때에도 눈에 띄게 높은 수치다.

더불어 문화산업의 경쟁력을 더욱 높이기 위한 여성 인력의 중요성도 날로 높아지고 있다. 문화관광부 발표 '문화산업통계 2005'에 따르면 고부가가치 문화산업의 대표적인 세 가지 산업인 영화(34.0%), 애니메이션(39.5%), 게임산업(20.2%)에서 여성인력이 낮지 않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문가들은 "창의성과 섬세한 문화적 감수성을 가진 여성인력은 문화산업에 적합한 장점과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장미혜 한국여성정책연구원 연구위원은 "여성인력의 유입은 문화에 여성 및 소수자의 시선을 반영함으로써 문화생산물을 다양화하고, 새로운 시장을 개발함으로써 문화콘텐츠의 외연을 확장시킨다"고 주장했다. 격투기 위주의 남성 중심적 게임시장에 여성적 시선으로 개발된 게임이 출시됨으로써 여성 유저를 소비자로 유인하게 된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다.

또 팀 단위로 이뤄지는 작업 특성상 여성 특유의 감수성과 의사소통 능력이 여성의 경쟁력을 강화시킨다는 의견도 주목된다.

황준욱 한국노동연구원 연구위원은 "현장 인력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 결과 여성들은 조직의 윗사람들보다는 동료들과의 협업이나 외부 관련자들과의 의사소통을 중요시 여기더라"며 "현장에서 일어나는 불확실한 상황에 여성들이 유연한 대응능력을 보인다"고 역설했다.

문화콘텐츠 소비자의 대다수를 여성이 차지하고 있는 것도 문화산업에 여성 인력이 필요함을 방증한다. 출판계에선 2030세대 여성들을 위한 처세서인 '치크 북'류의 책들이 발간될 때마다 상위권을 차지하고 공연예술계에선 여성 관객이 평균 70%, 많은 경우 90% 이상 차지하고 있는 것이 현실. 이런 상황에서 여성 소비자의 심리를 가장 잘 아는 여성들이 제작 전반에 참여하는 것은 필수적이다.

그러나 문화산업의 여성 인력 진출 확대를 위해서는 해결해야 할 선결과제 또한 만만치 않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여성의 경우 창작이나 기획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보다 제작라인 말단의 단순 업무에 종사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영화 산업의 경우 마케팅(23.03%)과 제작(19.08%), 미술(17.11%)에 여성인력이 몰려 있고 감독·조감독 등 연출직(9.87%)이나 촬영(0.66%), 조명(0.66%) 등 기술직에서 낮은 비율을 보인다(노동연구원 '문화인력 실태조사' 2004). 이는 기술직의 경우 대부분 학교 교육보다 현장 교육을 중요시하는 '도제시스템'으로 이뤄져 팀 내 수직적 구조가 강해 여성들의 진입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팀원의 업무나 임금을 정하는 것은 감독의 몫이기 때문에 촬영감독이나 조명감독에 여성이 한 명도 없음은 심각한 상황. 실제로 영화 현장에서 연출부로 근무했던 김은주(가명)씨는 "네트워크와 인맥으로 채용이 이뤄지는 현장의 특성상 차별이나 성희롱을 당하더라도 업계를 떠날 결심을 하지 않고는 공개할 수 없는 것이 현실"이라고 털어놓았다.

게임의 경우도 마찬가지여서 여성인력의 40%가 그래픽 디자이너에 집중돼 있으며 콘텐츠의 내용을 책임지는 게임기획(9.93%)이나 게임 PD(4.64%), 시나리오 작가(4.64%)는 대부분 남성이 차지하고 있다(한국게임산업개발원 '게임 종사자 실태조사' 2005). 이로 인해 게임 콘텐츠가 남성 중심적이고 폭력적일 수밖에 없는 구조를 나타낸다.

장미혜 연구위원은 "문화산업의 경우 비정규직의 비율이 높고 프로젝트 단위로 고용이 이뤄지는 특징상 성별통계는 물론 인력 현황 파악조차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다"면서 "고용의 성별 쿼터제나 보육시설 등 정책이 이뤄지려면 우선 문화산업 인력 데이터베이스(DB)를 제대로 구축하기 위한 지원이 필수적"이라고 강조했다.

'문화예술경영학과' 여성 유망학과로 인기


문화산업이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각광받으면서 문화예술 전문 인력에 대한 수요도 높아지고 있다. 그동안 현장경험을 통한 경력이 중요시됐던 문화예술 인력도 학교에서의 전문교육을 통해 이론을 겸비한 전문가를 키워내야 한다는 요구가 증가하면서 각 대학의 문화예술경영학과가 유망 학과로 뜨고 있다. 특히 재학생 중 여성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어 여성에 대한 전망이 밝다.

현재 국내의 문화예술경영학과는 대부분 대학원에 설치돼 있으며 경영대학원, 예술대학원, 정책대학원 등 주로 특수대학원에 소속돼 교육되고 있다. 대학교육에서의 문화예술경영학과의 시초는 86년 중앙대 사회개발대학원에 문화예술전공이 개설되면서부터.

89년 단국대 경영대학원에 예술경영전공이 신설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으며 95년 성균관대 대학원에 공연예술협동과정이 탄생했다. 이후 98년 홍익대·숙명여대 등 3개 대학, 99년 서울시립대·경희대 등 3개 대학에 설치된 데 이어 2000년엔 국민대·한국예술종합학교·추계예술대 등 무려 9개 학위과정이 생겨났다.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현재 30여 개 대학원 과정이 개설돼있다.

대학원뿐 아니라 학부과정에도 점차 개설되고 있다. 학부와 대학원 과정이 연계되어 있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외 호서대, 목포 대불대, 예원대, 한국디지털대, 경희사이버대 등이 대표적이다. 지방자치시대 지방문화 육성이 활발히 이뤄지면서 서울지역 대학뿐 아니라 지방대학들에까지 문화예술경영학과가 보급되고 있다.

문화예술경영학과는 특히 실무교육이 중요시되는 실용학문으로서 다양한 인턴십 과정을 통해 이론과 실무를 겸비한 인력을 양성해내고 있다. 정부의 문화정책인력, 박물관·미술관 등 예술기관, 영화·음악·방송·공연 등 문화산업 진출은 물론 최근 기업의 메세나 경영이 중시되면서 이 분야로의 진출도 활발하다. 특히 예술가들과의 소통이 필요한 직업이고 창의성과 섬세함이 중시되어 여성들에게 유망 학과로 인식되고 있다.

중앙대 황동열 교수(예술대학원 문화예술경영학과장)는 "20대 1 이상의 경쟁률을 보일 정도로 인기가 높으며 학생들의 과반수가 여성일 정도로 여성들의 참여가 활발하다"면서 "최근 축제 감독이나 문화정책 담당자, 문화기획자 등에도 여성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라고 밝혔다.

이 학과 석사 4학기에 재학 중인 안수정씨는 "재학 중 인턴십 과정을 통해 실무를 미리 체험할 수 있고 특수대학원의 특성상 다양한 문화산업 현직에 종사하고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네트워크를 쌓는 데도 유리하다"며 만족을 표했다.

최근에는 박물관학, 큐레이터학, 문화정책, 예술경영 등 문화예술경영 관련 전공이 세분화되고 있는 것도 특징. 중앙대에는 MBA과정에 엔터테인먼트 경영이 추가됐으며 올해 경희사이버대에 설치된 '한류문화언어학과'는 문화 중에서도 '한류'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과정으로 눈길을 끌었다.

여성주의 '부흥회' 수준 벗어나야 한다
디지털 시대, 여성주의 문화운동의 돌파구는

▲ 여성주의 문화행사 중 가장 대표적인 ‘서울여성영화제’.

"5년 전 이 연극을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충격을 기억하는데 다시 보니 기대보다 밋밋하고 지루했어요. 관객들이 성에 무지몽매한 여성들이라는 전제하에 가르치려는 분위기 때문에 거부감이 들더군요."

11월 초 대학로에서 공연 중인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관람했다는 이현민(32)씨는 예전에 보았을 때와 다른 느낌에 스스로도 놀랐다고 했다. 그의 말은 여성주의 문화 콘텐츠가 이젠 전통공식을 바꿔야 할 시점임을 시사한다.

80년대 중반 여성운동의 물결을 타고 남성 중심적 문화에 대한 대안으로, 여성주의 이슈를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식으로 진행됐던 여성주의 문화운동. 그러나 호주제 폐지 등 여성주의 이슈들이 사라진 자리에서 가부장제에 대항하는 이데올로기만을 내세우는 문화행사는 더 이상 대중에게 파고들기 힘든 시기가 되었다.

김영옥 이화여대 한국여성연구소 연구교수는 "페미니즘이 가벼운 터치 속에서 액세서리나 지적 상식으로, 때론 꽤 괜찮은 문화적 취향으로 여겨지는 시대에 여성주의 신념에 호소하는 '부흥회' 성격의 여성주의 행사기획은 한계에 도달했다"고 진단하며 대안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여성주의 문화운동 단체들이 효과적인 자금 모금과 활용방법을 모르는 것도 문제다. 정박미경 여성사전시관 학예연구실장은 "올해 초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의 완간이 시사한 시대적 상황에 여타 여성주의 문화운동 조직들도 직면하게 됐다"면서 "디지털 시대에 하루가 다르게 변해가는 문화 수용자들의 감성에 따라가지 못하고 있다"고 역설했다.

반면 박진창하 ㈔여성문화예술기획 사무처장은 "여성주의 문화운동이 딜레마에 빠졌다는 말은 과장된 것"이라며 "여성주의 문화 활동가들이 '번 아웃'(burn-out)된 것뿐"이라고 반박한다. 문화활동가들에 대한 과도한 업무와 낮은 임금, 전무한 복지체계 등으로 능력을 소진했고 차세대 활동가들을 키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계에 부딪친 여성주의 문화운동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규모 행사들에 가려진 소규모, 소모임 중심의 문화상품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정박미경 실장은 웹을 기반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젊은 세대의 라이프스타일을 이해하고 젊은 문화 소모임들을 문화기획자나 문화단체, 지원기관과 연결시켜 프로젝트성 문화상품으로 발굴하는 '문화통역자'의 역할을 제안했다.

지방자치시대 지역문화의 중요성도 제기됐다. 박진창하 사무처장은 몇 년째 지방을 돌며 진행한 '수다 콘서트' 현장의 뜨거운 반응을 전하며 "서울과 수도권 중심의 문화활동을 지역으로 넓혀가야 한다"고 강조한다.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기획한 최인숙 ㈔문화세상 이프토피아 사무국장은 "여성 관객이 대부분을 차지했던 과거 공연 때와 달리 이번 공연에선 30%가 남성 관객이고 40대 이상의 남성들도 있더라"면서 "여성주의 문화운동도 여성만이 아닌, 남녀노소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방향으로 전환되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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