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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록집 표지 사진(왼쪽)과 청록집 발간 기념 사진.
ⓒ 을유문화사
올해는 해방 직후 우리 한국 현대시의 문(門)을 연 <청록집>이 발간된 지 60주년이 되는 해이다. <靑鹿集(청록집)>은 1946년 6월 6일 임시정가 30원을 달고 을유문화사에서 발행되었는데, 그 60주년을 기념하는 의미로 같은 출판사에서 세로쓰기 판형의 초간본을 영인(影印)한 것과 현행 맞춤법에 따른 가로쓰기 판형을 함께 묶어 재출간하게 되었다.

한국 현대 서정시의 진원지 역할을 한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의 3인 시집 <청록집>이 60년 만에 우리 곁으로 돌아온 것은 여간 반가운 일이 아니다. 일반 독자는 쉽사리 만나기 어려운 <청록집> 초간본의 향기를 그대로 맛볼 수 있게 한 출판사의 배려에 고마움을 전한다.

산 속에서 자유롭고 행복하게 뛰노는 사슴을 그려놓은 표지와 누런 속지에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시인의 초상화와 세로쓰기의 시집을 읽으면서 나는 60전의 독자로 돌아간 듯하다. 그때는 필자가 태어나기 20여 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은.

우리들이 이미 잘 알고 있듯이 박목월·조지훈·박두진은 1939년 당대 최고의 시인 정지용의 추천을 받아 잡지 <문장>으로 등단한 공통점을 갖는다. 또 그들은 일제 말기의 절망적인 상태와 해방공간의 혼란 속에서도 전통 자연의 풍물을 바탕으로 한 순수 서정시를 써 온 것도 공통점이다.

먼저 박목월의 시 '나그네'를 보자.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지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南道)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시인이자 문학평론가인 김종길에게 "우리나라 낭만시의 최고의 것"이라는 찬사를 받은 바 있는 이 작품은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에 대한 화답으로 쓰인 작품이다. 이 시는 7·5조의 음절수를 기초로 한 3음보의 민요조 율격과 순우리말의 간결한 표현으로 체념과 달관으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는 나그네의 모습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지난날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려 있어 많은 이들로부터 사랑을 받은 목월의 대표시다. 나는 이 작품에 이러쿵저러쿵 비평의 말을 들이대지 않으리라. 그냥 읽고 그 맛을 느낄 뿐이다. 그러면 이 시를 쓰게 한 조지훈의 '완화삼(玩花衫)'을 읽어보자.

완화삼
- 목월에게

차운 산 바위 우에 하늘은 멀어
산새가 구슬퍼 울음 운다

구름 흘러가는
꿈같은 칠백 리

나그네 긴 소매 꽃잎에 젖어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

이 밤 자면 저 마을에
꽃은 지리라

다정하고 한 많음도 병인 양하여
달빛 아래 고요히 흔들리며 가노니


일제 강점기라는 비극적 현실 상황을 상징하는 '차운 산 바위'의 화자는 '하늘'과 같은 이상을 꿈꾸어 보지만, '산새'로 표상된 화자는 구슬피 울고 있을 수밖에 없다. 이상 세계에 도달할 수 없다는 현실적 제약으로 인해 정처없는 나그네가 된 그는 칠백 리 물길의 구름같은 유랑의 길을 떠난다.

그 유랑의 길 위 어느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에, 꽃잎에 젖어 울음 우는 나그네의 심사를 3음보의 전통적 가락과 낭만적 분위기, 그리고 선명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선명하게 그려내고 있다. 가히 한국적 전통 서정시의 한 전형이라 할만 하다.

박목월 시인이 간결하고 선명한 이미지로 향토적 서정을 노래했다면, 조지훈 시인은 전통문화를 제재로 민족 정서를 형상화한 시인으로, 그리고 박두진 시인은 독교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자연과 인간의 이상적 조화라는 내용을 급박한 산문적 어법으로 노래한 시인으로 평가받고 있다.

▲ 청록파 시인-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 을유문화사
<靑鹿集>은 1946년 박두진 시인이 근무하던 을유문화사에서 펴낸 것인데, 박목월이 15편, 조지훈 박두진이 각각 12편 등 모두 39편의 작품을 수록하고 있다.

문학평론가 도정일은 "청록집의 출간은 우리 현대 문학사상 중요한 사건의 하나"이며 "그 핵심은 서정의 상실에 대한 거부이고 저항에 있다"고 <청록집>을 평하고 있다.

또 김선학 (문학평론가·동국대 교수)는 "모국어에 대한 규범적 모습과 그 본향을 <청록집> 시편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은 한국어의 행복이고 한국시의 행운"이라 말하고 있다.

시집의 이름은 박목월의 시 '청노루'에서 따왔는데, 이 시집의 출간 이후 이들 세 시인은 문단에서 '청록파(靑鹿派)'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뒤늦은 감이 없지는 않지만 <청록집> 발간 6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이 오는 17∼19일 동국대학교 경주도서관 영상매체실에서 열리게 된 것은 그래도 다행한 일이다. 시를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자리에서 가서 참된 시공부도 한 자락 해볼 일이다. 그리고 불국사 석굴암 올라가는 입구에 세워진 '동리-목월문학관'에도 들러 그분들의 문학적 향기에도 젖어볼 일이다. 그러면 이 가을을 건너가기가 훨씬 편안해질 터!

내가 암송하고 있는 거의 유일한 시 박목월의 '청노루'를 암송하면서 <청록집> 속으로 찾아간 나의 여행은 끝맺는다.

청노루

머언 산 청운사(靑雲寺)
낡은 기와집

산은 자하산(紫霞山)
봄눈 녹으면

느릅나무
속잎 피어나는 열두 굽이를

청노루
맑은 눈에

도는
구름

덧붙이는 글 | 경북매일신문 '이종암의 책 이야기'에도 송고합니다.


청록집 -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 3인 시집

박목월.조지훈.박두진 지음, 을유문화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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