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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 모든 것들은 흔적을 남긴다. 사람, 동물, 나무, 흐르는 물까지 흔적을 남기고 지나간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햇살과 바람도 흔적을 남긴다. 아무것도 없을 것 같은 텅 빈 공간에 나름대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지는 것들을 보며, 그마저 볼 수 없는 눈을 가진 나라는 존재가 가여울 뿐이다.

▲ 사진과 함께 영원히 간직하고픈 추억을 만드는 연인의 모습
ⓒ 배만호
조용히 넘기는 책장소리에도 잠을 설쳐야 하는 감성을 가진 사람이라면 한 번쯤 찾아가 바람이 머물다간 흔적을 보는 것도 좋다. 하지만 혼자 온다면 그 쓸쓸함은 더욱 커질 것이다. 원래 '바람'이라는 단어가 외롭거나 쓸쓸한데, 이곳에 오면 아름다운 연인들의 행복한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어 혼자 오는 사람들에게는 권하고 싶지 않다.

합천군 가회면에 있는 '바람흔적미술관'은 1996년에 최영호 선생이 바람을 테마로 건립한 미술관이다. 산자락 높은 곳에 자리 잡은 바람흔적미술관은 1층 전시실과 2층 쉼터로 이뤄져 있다. 주인이 없어도 손님들이 항상 자유로이 출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다.

▲ 곱게 물이 들어 바람흔적과 세월흔적을 보여주는 담쟁이
ⓒ 배만호
바람흔적 미술관 마당의 바람개비는 총 22개인데, 바람개비가 22개인 이유는 지구의 대기를 차지하는 산소의 양이 22%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바람이 불 때 바람개비가 회전하는 모습은 상상에 맡기고 싶다.

쉼터 안에 있는 '미친차(美親茶)' 즉, '아름다움에 미친 차'를 한 잔 마셔 보는 것도 좋다. 요즘 같이 어지러운 세상에서는 미칠 것도 많지만, 머리 아픈 세상일은 접어두고 아름다움에 미쳐 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쉼터에서 차를 마시며 차 값은 성의로, 내고 싶은 금액만큼 내면 된다.

ⓒ 배만호
이제 바람흔적미술관은 '바람소리'까지 들리는 미술관으로 변해간다. 여러 가지 전시회와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오는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자리매김 하고 있다.

바람이 머물다 간 그 자리를 생각하며 또는 바람에 몸을 맡긴 채 살아야 하는 나와 같은 이 세상 사람들을 생각하며 시를 한 편 적어 보았다.

바람이 두고 간 편지

물을 머금고 피어난 박주가리를 만났다.
작은 점이 되어 바람에 몸을 맡긴
그래서 정처 없이 떠돌다 뿌리를 내리는 곳.

바람결에 헤매다 비를 만나 내려앉는 곳
그곳은 박주가리 터전이다.
쨍쨍히 내리비추는 햇살아래
정처 없는 인생 집을 짓는다.

마음에 쌓고 또 쌓아 둔
그대 향한 그리움들은
부는 바람에 박주가리 씨앗에 매달아
하얀 나래를 편다.

흔적조차 찾을 수 없는 서러운 이곳에서
그대 떠난 내음이나 맡을까 갔는데,
그대는 한마디 말도 없이 바람 소리만 들린다.


바람은 조용히 왔다가 편지 한 장을 두고 갔다. 시들기 마련이라고…. 그 푸르던 시간도 오랫동안 잠 못 드는 시간이 흐르고, 햇살이 비추면 붉게 멍든 글귀들이 갈빛으로, 그리고 기억도 못할 아른거리는 시간의 낙엽으로, 타다만 가을로 사라져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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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머리에 생각이 적어야 한다. 현주(玄酒)처럼 살고 싶은 '날마다 우는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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