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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과 아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  나와 같이 세종대왕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경우 이 블럭에 쓰인 글자를 이렇게 읽는다. 이, 디귿, 니은, 쌍시옷, 티읕, 시옷, 키억
딸과 아들이 가지고 노는 블럭. 나와 같이 세종대왕과 친분이 있는 사이인 경우 이 블럭에 쓰인 글자를 이렇게 읽는다. 이, 디귿, 니은, 쌍시옷, 티읕, 시옷, 키억 ⓒ 이선희

30개월을 갓 넘긴 아들은 올 여름 전까지 아무런 글자도 알지 못했다. 그러다 올 여름 컴퓨터를 처음 접하게 되었다. 컴퓨터는 세 살 짜리 아들에게도 매력적이었나 보다. 아들은 급기야 마우스를 숟가락보다 더 익숙하게 사용하게 되었다. 아들의 고 작은 손으로 마우스를 더블 클릭 할 때마다 나는 신기했다.

아들이 컴퓨터를 만지작거리는 것을 예쁘다 예쁘다하던 어느 날부터 아들은 내 말을 듣지 않기 시작했다. 컴퓨터를 끄지 않는 것이다. 이왕 말릴 수 없다면 하는 생각에 나는 홈페이지를 유아들을 위한 영어학습 페이지로 바꾸었다. 아들은 내 의도대로 컴퓨터에서 영어학습을 놀이로 하게 되었다. 아들의 반응이 좋다는 것을 알자 나는 시작페이지도 영어사이트로 바꾸었다.

컴퓨터 사용에 금세 익숙해진 것처럼 아들은 영어 알파벳 대소문자 모두를 곧 익혔다. 아파트 이름에 쓰여진 알파벳을 읽었고, 옷에 쓰여진 알파벳을 외쳐댔다. 그뿐인가 파닉스 발음까지 하는 것이었다. 처음엔 내심 흐뭇했다. 아들이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시간은 나의 자유시간이기도 했고, 영어조기교육도 되니 일거양득이란 말은 이럴 때 쓰는구나 싶었기 때문이다.

그러다 아들이 컴퓨터 앞에서 떠나질 못하고 급기야 마우스를 손에 쥔 채 잠든 모습을 보았다. 그제야 사태가 내가 원하는 방향 말고 다른 방향으로도 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노트북 컴퓨터를 접어 가방 속에 넣고 아들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숨겨 놓았다. 아들은 컴퓨터를 사용한지 몇 주되지 않았건만 그래도 금단 증상이 있었다. 집안을 돌아다니며 컴퓨터를 애타게 부르며 찾았다. 그러나 아무래도 30개월과 35년과는 상대가 되지 않았다.

아들은 점차 컴퓨터를 포기했다. 그러나 컴퓨터에서 배운 알파벳을 잊지는 않았다. 주변에 영어가 넘쳐나 잊으려해도 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다 아들은 제 플라스틱 블럭에 있는 한글도 알파벳화해서 읽기 시작했다. 이응은 오로, 키억은 에프로, 쌍시옷은 거꾸로 놓고 더블유로, 니은은 엘로, 티읕은 이로 읽었다.

그러다 누나가 쓰던 한글 자석놀이를 발견했다. 아들은 냉장고에 붙이며 한참을 놀다가 갑자기 '심봤다' 싶었나보다. 한글 자석 글자를 영어로 읽기 시작했다. 모음 아는 기울여 와이로 읽고, 티읕은 90도 돌려 엠으로 읽고, 지읒도 옆으로 돌려 케이로 읽는다.

나도 아들의 눈으로 보니 영락없는 한글이 아니라 영어다. 세종대왕께서는 이미 나와는 존재하는 영역이 다르니 여쭐 수도 없다. 그러나 궁금함은 참을 수 없으니,
"대왕님, 혹시 한글을 창제하실 때 알파벳을 참고로 하셨나요?"

아들은 이 자석 글자도 이렇게 읽는다. 케이, 엠, 엘, 유, 엔, 와이. 정말 그럴 듯하다.
아들은 이 자석 글자도 이렇게 읽는다. 케이, 엠, 엘, 유, 엔, 와이. 정말 그럴 듯하다. ⓒ 이선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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