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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겉그림
책 겉그림 ⓒ 리브로
20세기 독일교회는 그야말로 어두운 시기였다. 아돌프 히틀러가 교회를 자신의 발 아래 두려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정치적인 입지를 구축하기 위해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을 앞세웠던 것이다. 그것이 곧 제국교회의 탄생이다. 히틀러는 제국교회를 개인의 사당처럼 이용했다.

제국교회는 히틀러 체제에 동조하며 지지를 보냈다. 쓰레기더미처럼 망해버린 독일을 부활시킬 것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제국교회 지도자들은 히틀러를 단지 정치적인 지도자로서만이 아니라 독일민족의 신적인 사명을 부여받은 자로 생각했다.

하지만 히틀러 체제에 동조하지 않는 교회가 생겨났다. 이른바 '고백교회'의 태동이다. 고백교회는 히틀러를 신적인 사명자로 여기지도 않았고, 나치가 원하는 철십자가로 장식치도 않았으며, 공무원처럼 국가에서 월급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교회가 나치의 선전도구가 되는 것을 막으려 애썼다. 그들은 히틀러가 아니라 오직 하느님만이 교회의 주인임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평화의 메신저임을 천명했다. 그 어떤 인간도 이 세상의 정의를 완벽하게 실현할 수는 없다고 여겼던 것이다.

물론 히틀러도 가만있지 않았다. 1933년 7월 23일을 기점으로 자신의 수족과 같은 제국교회에게 전국의 교회를 다스리게 했고, 자신의 정책에 반기를 드는 저항목사들을 축출했다. 복음주의 소년단원들을 히틀러 소년단으로 강제 가입시켰고, 유대인 혈통을 가진 자는 공무원이 될 수 없다는 '아리안 법령'을 교회까지 확대했다. 더욱이 2차 대전 발발과 함께 많은 고백교회 목회자들과 교인들을 전선으로 징집했다.

디트리히 본 회퍼, 안위 대신 진리를 택하다

하지만 그러한 가공스런 협박에도 굴하지 않고 고백교회를 지켜낸 사람이 있었다. 히틀러의 말발굽 아래 굽실거리는 제국교회 지도자들과 달리 오직 하느님만을 교회의 주인으로 섬기는 인물이 있었다. 디트리히 본 회퍼 목사였다.

그는 음으로 양으로 고백교회가 태동하는 데 힘을 보탰고, 그 계열의 신학교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거기에다 히틀러의 광기의 희생양이 되기보다는 양심에 따른 병역 거부를 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꺼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당시 히틀러의 암살계획을 이끌어가던 많은 정부 지도자들과 적극적으로 연대했다. 실천적인 저항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셈이다.

1939년 그는 오래 전에 수학했던 미국의 뉴욕 유니온 신학교를 방문하게 되었다. 유명한 라인홀드 니버의 추천을 받은 까닭이었다. 그곳에서 수학하는 동안 많은 신학자들과 동료들은 그가 몸으로 행동하는 것보다 신학적인 근본사상과 진리를 연구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으면 하는 바람을 전했다. 미국에 망명할 것을 권유한 일이었다.

본 회퍼 목사도 이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미국에 남는다면 전쟁의 공포에 휩싸이지 않아도 되고, 강제로 징집되지 않아도 되며, 제국교회에 맞서야 하는 험난한 여정을 걷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히틀러의 광기어린 독제체제에 온 몸으로 맞서 싸워야 하는 고통을 피할 수 있었다.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내가 여기에 몸을 도사리고 있는다면 독일 교회를 위해 해줄 말이 없을 거야. 그리고 내 설교, 이제까지 내가 증거한 모든 것이 다 웃음거리가 되는 거지. 뿐만 아니라 전쟁이 끝나고 교회를 재건할 권리도 못 가지게 될 거야.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는 분명해. 그 선택을 미국에서는 할 수 없어."(321쪽)

그는 망명 권유를 받아들이지 않고, 온 몸으로 맞서 희생해야 하는 독일에 자신의 몸을 던지기로 결정했다. 그때에만 자신이 설교한 것, 자신이 증거한 모든 것들이 설득력이 있음을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저 입방아만 찢는 이론가가 아닌 실천적인 행동가임을 손수 몸으로 보여줬던 것이다.

1943년 4월, 지하조직의 히틀러 암살 기도에 가담했던 본 회퍼는 결국 나치에 체포되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난 1945년 4월 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때 본 회퍼의 나이는 겨우 39세, 참으로 젊은 나이였다. 짧은 생애였지만, 본 회퍼처럼 굵직한 삶을 산 사람은 드물다.

한국 교회 지도자들이여, '진노의 잔'을 두려워하라

이러한 이야기들은 실제 사건을 소설로 쓴 매리 글래즈너의 <진노의 잔>(권영진 옮김·홍성사·2006)에 잘 나와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2차 대전 상황도 아니요, 히틀러 시기처럼 광기어린 독재에 휘말려 있지도 않다. 그렇다면 매리 글래즈너가 이 책에서 우리에게 들려주고픈 이야기는 무엇일까? 이 책에서 한국교회와 교인들, 교회 지도자들은 무엇을 깨달을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교회는 정치인의 입김에 휘둘릴 수 없으며, 교회와 교인 그리고 교회 지도자들 역시 그들의 꼭두각시 노릇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년에 대선을 치르게 된다. 그때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은 얼마만큼 순수성을 지켜낼 수 있을 것인가? 분명 세상은 그 가늠자를 교회와 교회 지도자들에게 들이댈 것이다.

교회 지도자들은 입만 무성한 이론가가 되기 십상이다. 그만큼 교회에서 설교를 많이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교회 지도자들이 많다는 게 세상 사람들의 공통적인 지적이다.

이런 문제들을 개선하기 위해 이 땅의 교회 지도자들은 '실천적인 행동가'로 살았던 본 회퍼 목사를 본받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을 경우 하느님의 '진노의 잔'이 교회 지도자를 향해 쏟아질 거라고 누군들 이야기하지 않겠는가.

미국의 뉴욕 유니온 신학교에서 독일로 돌아왔던 본 회퍼 목사는 히틀러의 핵 폭풍의 소용돌이에서 충분이 빠져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는데도, 결코 미국에 망명하지 않았다. 오히려 험난한 여정이 놓여 있던 독일행을 택했다. 그것은 곧 자신의 욕심을 따르지 않고, 오직 나라와 민족 그리고 수면 아래에 있던 고백교회 동료들을 위한 길이었다.

우리는 때때로 신의 이름으로 여러 가지 일들을 결정한다. 그렇지만 양자택일의 갈림길에 섰을 때 종종 자신의 이익을 따라 결정할 때가 많다.

나 자신의 욕망을 추종하는 일시적인 선택이 아니라 오직 나라와 민족, 그리고 영원을 위한 길을 선택해야 한다. 그것만이 영원토록 빛나는 길이기 때문이다.

진노의 잔 - 소설 본회퍼

메리 글래즈너 지음, 권영진 옮김, 홍성사(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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