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무실 복도를 지나다보면 무릎을 꿇고 있는 아이들이 종종 눈에 띤다. 장난기가 동한 탓이겠지만, 나는 벌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그들 곁에 가만히 쪼그려 앉아 있곤 한다. 오가는 사람이 없을 때는, 아주 잠깐이긴 하지만, 아예 그들처럼 무릎을 꿇고 앉아 같이 벌을 받기도 한다.

그런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표정이 재미있다. 아니, 선(善)하다. 잘못을 저질렀으니 그곳에서 벌을 받고 있겠지만 그때 아이들의 눈망울은 그저 선하다. 그래도 이렇게 한 마디 말을 던지고 자리를 일어선다.

"반성할 것이 있으면 꼭 반성해. 반성하라고 담임선생님이 이런 시간을 주신 거니까."

그런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나를 쳐다보는 아이들의 눈망울도 역시 맑고 선하다. 그것은 어쩌면 부메랑의 효과일 수도 있다. 내가 어떤 혐의의 눈길을 던졌다면 상황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어쨌거나 나는 벌을 받고 있는 아이들을 보면 같이 벌을 받고 싶은 묘한 충동을 느낀다. 그것은 아이들을 잘못 가르친 일말의 책임감 때문에? 그런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럼 무엇 때문일까? 어느 해 겨울에 쓴 한 편의 시가 그 단서를 제공해줄지도 모르겠다.

너를 보면 나는 뉘우치고 싶어진다
헐벗을 것밖에는 아무 할 일이 없는
네 곁에, 나도 가만 서 있고 싶어진다
괴로워하는 것밖에 아무 위안이 없는
네 곁에서, 나도 몸속까지
추위를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그리고 새잎 하나 달고 싶어진다

-자작시, '겨울나무'


하루 이틀도 아니고 한 계절 내내 벌을 서고 있는 겨울나무를 보면 나도 한 동안 넉넉히 그렇게 벌을 받고 싶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해가 바뀌어도 별 희망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내 더러운 몸뚱이에서 맑고 순결한 새 이파리가 피어날 조짐 말이다.

그러니 나도 겨울나무처럼 '괴로워하는 것밖에는 아무 위안이 없는' 죄인이 되어 '몸속까지 추위를 받아들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욕망에 이끌려 들까부는 인간인 주제에 그것이 가당치 않으면 복도에서 벌을 받고 있는 아이들처럼 만이라도.

벌을 받고 있던 세 명의 아이

며칠 전에는 세 명의 아이가 복도에서 벌을 받고 있었다. 결석이나 지각을 해서가 아니라 그보다는 좀더 무거운 잘못을 저질러 학교로부터 징계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 하지만 벌을 받고 있는 녀석들의 행동거지로 보아서는 자신들이 저지른 잘못의 무거움을 인식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어깨너머로 아이들이 쓴 반성문을 훔쳐보아도 그런 흔적을 찾아보기 힘들었다. 기계적인 반성이라고나 할까?

나는 학생부장 선생님에게 말씀드리고 수업이 없는 시간을 이용하여 아이들을 도서실에서 만났다. 하지만 막상 아이들과 마주 앉아 있자니 마치 소풍이라도 나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녀석들에게 무슨 말을 먼저 꺼내야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어떻게 하면 아이들의 속마음과 만날 수 있을까? 푹신한 도서실 소파에 앉자마자 휴대폰으로 손이 가는 한 아이를 바라보며 그런 생각을 하다가 어쩔 수 없이 나도 소풍을 나온 듯한 환한 표정을 지으며 이렇게 입을 열었다.

"난 너희들이 좋아. 그 이유는? 얼굴에 그늘이 없기 때문이야. 봐라. 너희들 지금 징계중인데도 아무 근심 걱정 없이 해맑은 표정이잖아? 물론 너희들이 철이 덜 들어서 그럴 수도 있어. 하지만 철이 들어서 세상에 나온 사람은 한 사람도 없어. 선생님도 너희들 만할 때는 정말 철이 없었어. 그때 이야기 하나 해줄까?"

내가 아이들에게 들려준 이야기는 지울 수만 있다면 지우고 싶은, 어둡고 부끄러운 기억의 한 토막이었다. 아, 그때 나는 왜 그런 짓을 했을까? 지금도 나는 가끔 그때 일을 떠올리면서 후회의 감정에 휩싸일 때가 있다. 하지만 뼈아픈 후회와 반성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내 자신 조금씩 치유되는 그런 기분이 들곤 했었다.

헌데 자신이 저지른 잘못을 잘 알지 못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탓으로 여전히 소풍을 나온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아이들을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아이들 쪽으로 몸을 기울이며 이렇게 말을 이었다.

"그때 난 아무런 죄책감이 없었어. 내 기분을 건드렸으니까 당연히 그 대가를 지불했다고만 생각한 거지. 하지만 나한데 눈 한 번 흘긴 대가치고는 너무도 컸지. 만약 지금 내가 그런 짓을 저지른다면 괴로워서 잠도 제대로 자지 못할 거야.

그리고 내 자신이 미울 거야. 나 때문에 아픔을 겪게 만들었으니까. 그런데 왜 그땐 그런 생각이 들지 않았을까? 왜 나는 잘못을 하고도 반성할 줄 몰랐을까? 내가 나쁜 사람이라서 그랬을까? 아니면 어리고 철이 없어서 그랬을까?"

내가 잠깐 말을 끊고 침묵을 지키자 아이들은 내가 다음 말을 하려고 잠깐 쉬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들에게 어떤 물음이 던져진 상황인지를 가늠하고 있는 듯했다. 까만 동자들이 나를 향해 모아지면서 한 순간 아이들의 눈빛이 더할 수 없이 진지해졌다. 하지만 얼른 답을 말하는 아이는 없었다.

하긴 대답하기 쉬운 질문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것은 그들 자신을 향해 던져진 질문이었으니 말이다. 나는 아이들과의 대화를 이렇게 갈무리했다.

"나는 너희들을 나쁘게 보진 않아. 하지만 결국은 나쁜 짓을 한 거야. 왜냐하면 너희들 때문에 한 아이가 상처를 받고 아파하고 있으니까. 지금이라도 반성하면 돼. 나는 그때 반성하고 사과할 기회를 놓치고 말았어. 남의 고통을 헤아리기에는 너무 어렸던 거지. 어려서 그랬지만 결과적으로 나쁜 짓을 한 거야."

나는 아이들을 보내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과연 아이들이 반성을 할까? 나는 얼른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렇다고 반성하지 않는 쪽으로 기울어진 것도 아니었다. 반반이라고나 할까? 첫술에 그 정도면 됐지 싶었다.

덧붙이는 글 | <사과나무>에 기고한 글에 조금 보탰습니다.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ㄹ교사이자 시인으로 제자들의 생일때마다 써준 시들을 모아 첫 시집 '너의 이름을 부르는 것 만으로'를 출간하면서 작품활동 시작. 이후 '다시 졸고 있는 아이들에게' '세상 조촐한 것들이' '별에 쏘이다'를 펴냈고 교육에세이 '넌 아름다워, 누가 뭐라 말하든', '오늘 교단을 밟을 당신에게' '아들과 함께 하는 인생' 등을 펴냄.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