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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겨레출판
문제제기

자연과학과 기술문명 시대를 살면서도 과학이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할 기회는 많지 않은 듯하다.

웹스터 사전은 과학(science)을 "자연현상에 대한 관찰, 확인, 묘사, 실험조사 및 이론설명"으로 풀이한다. 이런 해석에 따른다면, 책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는 제목과 내용 사이의 불일치를 드러낸다. 과학이 아니라 '기술'에 무게중심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책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는 2004년 카이스트의 가을학기 강의인 '한국과학사' 공동작업 결과물이라고 한다. 학생들이 직접 연구대상을 찾아보고, 해당분야 전문가를 만나고, 참고문헌으로 정보를 확인하고 토론과정을 거쳐 글로 만들어진 내용을 묶었다는 이야기다. 이런 성과물이 세상과 만나게 된 고단한 여정이 눈에 밟히는 것 같아 참으로 흐뭇하다.

강의를 진행하고 서책을 엮은 신동원 교수는 우리 과학에 대한 소회를 이렇게 밝힌다.

"나는 세계문명사의 관점에서 한국의 과학문명이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언제나 정상급에 속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그 어느 때도 크게 몰락한 적 없이 이웃나라 일본이나 중국과 어깨를 나란히 할 만한 수준을 유지했다. 한국의 과학유산은 세계인의 보편성에 호소할 수 있는 알찬 알맹이를 가지고 있다." (7쪽)

과학에 문외한인 필자에게는 엮은이의 생각이 다소 뜨악하다. 뉴턴의 <프린키피아>가 출현한 1686년 이후 유럽이 주도한 과학 기술문명과 비교할 때, 우리의 그것은 현저하게 뒤처지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과학의 내용 역시 과학이 아니라 기술 쪽으로 치우쳐 있어서 유럽의 자연과학과는 질적으로나 양적으로 비교될 수 없다는 느낌이다.

그럼에도 책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가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은 조상들이 도달한 기술문명의 수준과 내용을 가늠하고 이해하려는 '과학적'인 탐구자세에 있다. 필자는 이글에서 우리에게 친숙한 허준의 <동의보감>과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를 중심으로 거기 담긴 성과와 의미를 되짚어보고자 한다. 아래 소제목은 책의 그것을 따랐음을 밝힌다.

<동의보감>의 진실을 찾아서

1780년에 진하별사(進賀別使)로 청나라에 갔던 연암 박지원은 <열하일기(熱河日記)>에서 허준의 <동의보감>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우리나라 서적으로 중국에 들어가 출판된 것이 매우 드물지만 <동의보감> 25권이 홀로 널리 유행하고 있다. 판본이 아주 정묘하였다. 내 집에는 이 책이 없어 매양 우환이 있을 때는 이웃 사방으로 빌리고는 했는데, 이번에 이 책을 보자 꼭 사고 싶었으나 말굽은 다섯 냥을 변통하기 어려워 하염없이 돌아온다." (151쪽)

1613년 조선에서 간행된 <동의보감>은 1723년 일본, 1768년 청나라에서 출간되었다. 일본에서 두 차례, 중국에서 30여 차례 출간된 것으로 알려졌다. <동의보감> 이전에 쓸 만한 의서는 세종 때 출간된 <향약집성방>과 <의방유취> 등이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중국과 대등한 의서가 있다고 자부하게 된 계기는 <동의보감>에 이르러서다.

"<동의보감> 이전에 조선의학의 위치는 한의학계의 변두리에 불과했다. 의서가 있다지만 외국에서 가져다 쓸 만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러나 <동의보감>으로 우리도 한의학의 중심인 중국에서 널리 읽히는 의서를 갖게 되었다. 당대 조선의학이 중국을 능가했다고 말하는 것이 비약일지 모르나 최소한 어깨를 나란히 하는 수준에 도달하였던 것이다." (155쪽)

허준의 <동의보감>은 약 2000여 가지의 병증과 1400종의 약물, 대략 4000여 가지의 처방과 수백 가지의 양생법과 침구법을 망라했다. 규모나 내용 면에서 <동의보감>은 당대 동아시아 의학을 종합한 의서들 가운데 최고봉이었다. 재미난 점은 무능하고 소심했던 군주 선조가 임진왜란 중에 새로운 의서편찬을 명하고 원칙까지 세웠다는 사실이다.

"첫째, 사람의 질병은 조섭을 제대로 못하여 생기므로 수양을 우선으로 하고 약물치료를 다음으로 하라. 둘째, 처방이 너무 많고 번잡하므로 요점을 간추리는데 힘써라. 셋째, 벽촌과 누항의 사람들 가운데 의원과 약이 없어 요절하는 자가 많은데도 사람들이 나라 안에서 생산되는 향약을 잘 몰라 약으로 쓰지 못하니 책에 우리나라 약 이름을 적어 백성들이 쉽게 알도록 하라." (159∼161쪽)

수양을 강조한 것은 유가의 가르침과 연관되어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 중국의학의 고전 <황제내경>에서 강조한 예방의학과 양생과도 결부되어 있었다. 특히 간략한 처방과 우리나라 약재이름 표기는 만백성을 생각한 인본주의적 사유의 발로였다. <동의보감> 본문에 기술된 885종 약재 가운데 637종의 약명을 한글로 표기했고, 방언을 병기한 것도 있다.

허준은 사족(士族) 출신으로 유학을 공부했지만, 신분상 서자였기에 의학에 투신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일 그가 서얼이 아니었다면 의학에 전념하지 않았을 터이고, 따라서 <동의보감> 탄생도 없었을 것이라고 책은 주장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신유사옥 이후 18년 유배생활에서 정약용이 이룩한 풍요로운 '다산학'의 성과를 떠올리게 된다.

김정호는 누구를 위해 지도를 만들었을까

"김정호의 대동여지도는 개항 이전 전통과학의 꽃이다. 과학기술만 놓고 본다면 19세기는 전통과학이 가장 높은 위치에 도달했던 시기다. 대동여지도와 함께 남병길-남병철 형제의 천문의기제작, 서유구의 박물학서책 <임원경제지 林園經濟志>, 최한기의 <기학 氣學>, 황도연의 의서 <의종손익 醫宗損益> 등이 개항이전에 나타났다." (243쪽)

대동여지도는 이렇게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대상이다. 책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는 대동여지도의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그것은 유클리드 기하학의 확대-축소법 활용으로 나타나 있는 과학성, 목판본이기에 가능했던 대량생산, 분첩절첩식(分帖折疊式)으로 제작하여 관리와 보관이 용이했다는 사실 등이다.

대동여지도가 제작된 시대에 지도는 지지(地誌)의 부속물이었다고 한다. 조선시대에 지도는 국토에 관한 방대한 내용을 효과적으로 활용하기 위해 덧붙인 부록이었다. 김정호가 제작한 3대 지도인 청구도, 동여도, 대동여지도는 각각 <동여도지(東輿圖誌)>, <여도비지(輿圖備誌)>, <대동지지(大東地誌)>라는 3대 지지와 관련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를 위한 지도였는가'라는 사실이다. 덧붙여 고산자(古山子)가 1863년 흥선대원군에게 대동여지도를 바치고 난 다음 국가기밀 누설죄로 투옥되어 감옥에서 세상을 하직했다는 옥사설(獄死說)이 진실인가 하는 문제가 우리의 관심을 끈다.

"나는 우리나라 지도제작에 뜻이 있어 비변사나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는 지도나 고가(古家)에서 좀먹다 남은 지도들을 널리 수집하고, 이를 서로 비교하고 또 지리서를 참고하여 이런 지도를 합쳐서 하나의 지도로 만들고자 하였으며, 이 일을 김정호에게 위촉하여 완성하도록 하였다." (270쪽)

인용한 글은 <대동방여도서>를 만든 신헌이 남긴 것이다. 신헌은 조선후기 무신이자 외교관으로 활약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대 석학이자 실학자인 정약용과 김정희 문하에서 실학을 수학하였으며, 개화파 지식인인 강위와 박규수 등과 교류하였다. 지리학에도 관심이 높았던 그는 대동여지도 제작에 힘을 보탰으며, 역사지리서 <유산필기>를 편찬했다.

철종조의 고위관료였던 신헌의 글을 미루어보면 대동여지도가 김정호의 개인작업이 아니었음이 분명하다. 그것은 당대의 대표적인 지식인 최한기의 청구도 서문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대동여지도는 최한기와 신헌 등의 지원 속에 국가경영 차원에서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고산자의 옥사설 운운은 명백한 역사왜곡이라는 것이다.

글을 맺으면서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에 등장하는 대상은 <동의보감>과 대동여지도 이외에 첨성대, 에밀레종, 고려청자, 자격루, 수원 화성 등이다. 서책을 엮은이는 신라와 고려시대를 거쳐 조선에 이르기까지 우리 조상들이 이룩한 과학 기술문명의 성과를 여러 가지 관점에서 비판적으로 조명하면서 그것들에 담긴 구체적인 성과물을 정리하고자 하였다.

엮은이는 '과학'이라는 용어에 대한 설명을 덧붙이면서 마지막 장인 '우리 과학 100년의 발전사'를 시작한다.

"과학이란 용어는 1870년대에 일본에서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과학이란 용어를 만든 사람은 과학이 물리학, 화학, 지질학, 생물학 등 자연을 대상으로 한 각 분과의 학문을 총망라한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사이언스가 동일한 세계관과 방법론을 강조한 용어라면, 과학은 구현된 실체를 지칭했다. 그 후 과학은 중국, 조선, 베트남에까지 수출되어 사이언스의 번역어로 자리 잡았다." (282-283쪽)

엮은이의 판단에 따르면 서양에서 사이언스는 엄밀한 방법론을 이용한 객관적 진리획득의 측면을 강조하는데 반하여, 동양의 그것은 사이언스가 불러오는 구체적인 결과물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여기서 필자가 첫머리에서 제기한 '과학'과 '기술'의 차이가 발생하는 셈이다. 어쩌면 이것은 지금까지 우리가 그다지 중시하지 않았던 측면이 아닌가 한다.

기술의 배후에 자리하는 과학을 도외시할 수는 없겠으나, 그 자체로 의미 있는 순수과학에 관한 논의가 여기서는 많이 배제되어 있어 아쉬움이 남는다. 요즘처럼 이공계, 특히 순수과학 분야를 기피하는 현상이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수용되는 시점에 더 생산적인 논의를 위한 공론의 마당을 여는 일은 그야말로 뜻 깊은 일이 아닐 수 없기 때문이다.

덧붙이는 글 |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 신동원 엮음, 한겨레출판, 2006.


우리 과학의 수수께끼 - 카이스트 학생들과 함께 풀어보는

신동원 엮음, 한겨레출판(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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