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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제주도에서는 헌법에 보장된 국민의 이동권이 무시되고 있다. 시위대가 아닌 일반인들조차 관광을 즐길 수가 없으며, 상인들은 문을 열고 있으나 장사를 못하고 있다.

육지에서 바다를 건너온 시위대에게 밥과 술을 몇 병 파는 것이 제주 상인들의 주요 매출이 되고 있다. 민박을 하려는 사람도 없고, 혼인을 많이 하는 계절인데도 제주의 거리는 한산하기만 하다.

도로는 경찰들에게 모두 점령당하여 마치 전쟁터 같은 상황에서 볼 수 있는 통행증 검사가 벌어지고 있다. 심지어 일반 경찰이 아닌 전경들이 일반 시민과 시위대들에게 신분증 제시를 요구하고 있다.

더구나 중문관광단지 일대는 경찰이 아닌 사람들은 전혀 다니지 못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일대 상인들은 전혀 생업을 유지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손실은 고스란히 지역 상인들이 안고 있다.

중문관광단지엔 경찰과 농민들만 있고, 관광객은 없다

23일 오전 10시경부터 육지에서 제주로 원정온 시위대가 모이기 시작했다.

이들은 "홍콩이나 미국 시애틀·스위스 등에 가는 것을 '원정'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대한민국 땅인 제주도에 '원정'이라는 단어를 쓰며 와야 한다는 것이 어이없다"고 말했다.

▲ 중문관광단지 입구에서 신라 호텔로 향하는 길목을 지키고 있는 경찰들. 경찰들이 저렇게 계속해서 쉴 수 있는 시위였으면 좋겠다.
ⓒ 배만호
20여 분간 지속한 대치 상태가 끝나고 시위대는 휴식을 취했다. 이날 경찰과 시위대는 서로 몸싸움을 하기도 하였지만 물을 나눠 마시며 이야기를 나누기도 하였다.

▲ 깃대를 들고 있는 농민에게 "경찰 정보과에서 (깃대를 들고 있는 농민이) 쇠파이프를 들고 있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다"고 이야기를 해 주는 경찰.
ⓒ 배만호
"참으로 아이러니한 현실이지요. 내 부모님도 광양에서 벼농사를 짓고 있어요. 하지만 내 어머니가 와도 나는 이곳에서 막아야 합니다."

"벼농사가 경쟁력이 없는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봐야 하는 것 아닌가요?"


시위 현장에서 만난 한 경찰 간부는 이렇게 말했다. 어린 시절 손으로 모를 심으며 자랐다는 그 경찰은 "내년 2월에 보직 변경이 되어 시위를 막으러 현장으로 나가지 않게 되었다"며 빨리 시간이 흘러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막고 있는 경찰 앞에서 술을 마시며 농성하는 농민과 이를 설득하는 경찰 간부.
ⓒ 배만호
농민들의 삶은 술을 떼어놓고는 이야기할 수가 없다. 들판에서 일을 할 때도 술이 필요하고 아스팔트 위에서 시위를 할 때도 술이 필요하다. 왜 그런 걸일까?

들판에서 일을 할 때는 힘들어서 술을 마셔야 하고, 시위를 할 때는 타는 속을 달래기 위해 술을 마셔야 한다. 세상이 그렇게 만들었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만들었다.

▲ 제주의 대표적인 농산물인 감귤나무를 태우는 시위대.
ⓒ 배만호
한때는 감귤나무 한 그루만 있으면 자식을 대학까지 보낼 수 있다고 해서 '대학나무'라고도 불렀는데, 이제는 애물단지가 되었다.

귤을 대량으로 수입하지는 않지만, 귤의 대체 식품이라 할 수 있는 오렌지 등이 대규모로 수입되면서 귤은 상대적으로 소비가 줄어들었고, 이로 인하여 귤 가격은 하락할 수밖에 없다.

한미 자유무역협정에서 귤을 제외한다 하여도 안심할 수 없는 문제가 바로 이런 것이다.

▲ '한미FTA' 상여를 메고 가는 농민들.
ⓒ 배만호
원정 시위대와 제주도 농민들로 구성된 시위대는 '한미FTA' 상여와 제주의 조랑말, 농악대를 선두로 제주국제컨벤션센터를 향해 행진을 하였다. 경찰은 이 과정에 아무런 제재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도로 통제를 너무나 잘하여서 시위대가 아닌 일반인은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 도로를 가득 메운 시위 행렬.
ⓒ 배만호
1만여 명의 시위대가 처음부터 끝까지 통과하는 데는 무려 15분이 넘게 걸렸다.

주름살 가득한 농민들이 손에 깃대와 각종 현수막을 들고 구호를 외치며 아스팔트를 걷는 모습을 보며 사진을 찍고 있는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는 뭔가 뭉클한 것이 용솟음쳤고, 눈에는 눈물이 나올 듯하였다.

그 감정을 뭐라 표현할 수 있을까. 국제대회에서 우리나라 선수가 외국에 나가 힘들게 승리했을 때의 그 감정,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누가 농사밖에 모르는 농민들을 거리로 내몰았는가? 누가 저들을 80년대 민주화 운동의 투사와 같은 열정을 갖게 하였는가!

▲ 컨벤션센터 앞으로 들어오는 1만여 명의 농민들.
ⓒ 배만호
▲ 컨벤션센터 앞을 가득 채운 농민들.
ⓒ 배만호
협상이 열리는 제주 하얏트 호텔을 멀리 바라보며 농민들은 한숨만 짓고 있었다. 갈 수 없는 그 곳을 바라보며 멀리서 볼 수 있게 '반대 한미FTA'라고 적힌 대형 풍선을 띄우고, '안돼 FTA'라고 적힌 연을 날리기도 했다. 하지만 바람은 무심하게도 협상장 쪽이 아닌 반대쪽으로 불고 있었다.

▲ 방파제를 막는 용도인 콘크리드 구조물(삼발이)과 컨테이너로 도로를 차단한 경찰.
ⓒ 배만호
경찰들이 보기엔 농민들이 커다란 파도로 보였던 것일까? 파도를 막기 위하여 만든 대형 콘크리트 구조물(삼발이)로 도로를 막고, 컨테이너를 밀어 무너뜨리지 못하도록 길게 쌓아 두었다.

뒤에는 소방차와 살수차 등이 물을 뿌리려고 준비를 하고 있었고, 경찰들도 개미떼처럼 몰려 있었다.

하지만 농민들은 산으로, 바다로 향했다. 길을 막으면 다른 길을 만들어서 진군을 했다.

▲ 다리 아래쪽으로 몰려 있는 농민들. 이들은 멀리 보이는 방파제로 향했다.
ⓒ 배만호
방파제로 향하자 경찰들은 오히려 안심했다. 바다여서 포기하고 다시 돌아올 줄 알았던 것이다. 하지만 이내 경찰들은 다급해지기 시작했다.

돌아올 줄 알았던 농민들은 바다로 뛰어들었다. 약 30여m가 됨직한 바다를 헤엄쳐 건넌 것이다. 처음에 뛰어든 농민이 입에 밧줄을 물고 건너갔다. 그리고 콘크리트 구조물(삼발이)에 묶었다. 다음 농민들은 그 밧줄을 잡고 바다를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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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에 말이 적어야 하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하고, 머리에 생각이 적어야 한다. 현주(玄酒)처럼 살고 싶은 '날마다 우는 남자'가 바로 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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